45화
<마병>
경기가 시작됐음에도 우성의 머릿속에는 토르안과 나눴던 대화밖에는 없었다. 새삼 아포피스를 보는 우성은 근심이 가득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애초 투기장에 온 것부터가 잘못이기 않았나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냐?”
옆을 돌아보니 안현수가 막 경기 하나를 끝내고 돌아오고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물론 안현수가 생각보다 경기를 일찍 끝낸 탓도 있었지만.
“아까 저 새끼가 한 말? 그게 걱정 되서 그래?”
“그래.”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안현수 역시 미간을 三자로 좁히며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분이 썩 좋아보이진 않았는데 경기를 치르느라 사람을 죽여서인지 아니면 우성의 걱정을 하는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뒤로는 토르안의 경기가 이어졌고, 토르안은 우성 못지않게 압도적인 경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마병 옥토퍼스는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상대의 무기를 부수고, 몸을 양단했다. 그 경기가 마치 우성과 마히옹의 경기와 비슷해 보였다.
다음으로 이어진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성이 참전한 경기는 토르안의 경기처럼 압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상대는 따로 밖에서 양질의 무기를 구해온 듯 무기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성의 능력치를 따라오지는 못했다.
“아주 날아다니네. 아니, 마검이고 마병이고를 떠나 저것들 정말 신규 플레이어 맞아?”
투기장 위쪽의 VIP룸에서 경기를 구경하던 샤오만이 막 경기를 끝내고 내려오는 우성을 보며 투덜거렸다.
“무기만이 아니라 저 놈들은 그래도 300명으로 이루어진 배치고사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둔 놈들이니까.”
“그래. 그렇겠지. 우리 같은 놈들이랑은 다르게 엘리트들이었지.”
정예지의 대답에 샤오만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는 곱지 않은 눈으로 우성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바로 질투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신규 플레이어일 뿐이다.”
“그건 그렇지.”
중앙에 앉은 남자의 말에 정예지와 샤오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저게 어딜 봐서 신규 플레이어야?’
신규 플레이어라기에 토르안과 우성의 실력은 이미 보통이 아니었다. 무기도 무기지만 간간히 보여주는 빠른 움직임과 힘은 게임을 시작한지 열흘도 되지 않은 신규 플레이어라고 믿기 힘들었다. 어지간한 6회 차 플레이어들은 한수 접어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우성과 함께 온 안현수라는 플레이어 역시 가볍게 보기 힘들었다. 그는 우성과 토르안과 같은 무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모든 경기를 압도적으로 끝내보였다. 사실 무기를 앞세워 압도적인 경기를 보여주느라 실력을 다 보이지 못한 우성, 토르안과는 달리 가장 두드러진 실력을 내보인 사람이 바로 안현수였다.
이전 투기장에서도 눈에 띄는 신규 플레이어들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평균적으로 배치고사에서 얻어낸 특전의 등급은 C나 B정도였다. 가끔씩 A등급의 특전을 얻은 플레이어가 있긴 했지만, 그거야 말 그대로 가끔일 뿐이었다.
“저것들은 단체로 A등급 특전이라도 받은 건가.”
안현수 역시 배치고사의 준 우승자라고 했으니 특전을 선택했을 건 자명한 일. 무기의 종류는 아니지만 그 역시도 특전의 혜택을 받아 이만한 실력을 보이는 것이리라.
쾅-!
“크, 큰일 났어!”
“뭔데 시끄럽게 지랄이야?”
방 안으로 들어온 동료 플레이어를 보며 샤오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리게 느껴졌다.
“대진표 좀 봐.”
“뭐? 대진표가 왜? 무슨 문제 있어? 투기장 쪽이랑은 이야기 다 된 것 아니었어?”
“지들 돈 되는 대로 대진을 바꾼 것 같아. 그런데 그게…….”
방 안으로 들어온 플레이어는 검은색 글씨로 가득 찬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 위로 쓰인 글씨들은 선수들의 이름이었는데, 어느 선수가 누구와 붙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선수들의 이름에는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몇 경기 후, 뒤를 본 샤오만의 눈이 치켜떠졌다.
“이런 개 같은!”
**
창고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새로운 신규 플레이어들이 선수로 들어왔다. 그들 역시 우성과 안현수처럼 스카우터들의 꼬임에 넘어간 모양인지, 처음 창고로 들어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몇 경기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우성은 속으로 새로 온 플레이어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하지만 이내, 남 걱정 할 때가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근심에 빠졌다.
경기 하나가 다 끝났는지 창문 밖으로 환호성 소리와 야유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한 경기가 꽤 길었다 싶었는데, 고만고만한 플레이어들끼리의 경기였던 모양이었다. 지루한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 사이에서는 환호성보다는 야유소리가 더 많이 섞여있었다.
다음 경기는 누굴까 생각하며 우성은 창고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어제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수의 플레이어들. 하지만 새로 들어오는 플레이어들을 보면 아마도 조만간 그 수가 메워질 것도 같았다.
“이우성, 토르안. 경기장으로 나와라.”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우성은 전의 뚱뚱한 플레이어를 돌아봤고, 곧이어 눈을 크게 떴다. 슬슬 한 경기를 더 치르겠구나 싶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 상대가 토르안일 줄이야.
언제고 만나긴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시기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하지만 생각해 둔 게 있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르안은 옆에 놓아둔 도끼를 집어 들었다. 육중한 몸과 거대한 무기가 우성의 뒤를 따라 창고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해라. 지지 말고.”
아직까지도 토르안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안현수는 으르렁거리며 우성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직후에 토르안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넌 이제 뒤졌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우성을 믿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우성의 마검이 토르안의 특전보다 높은 등급의 S급 특전임을 알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우성이 유리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성 역시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은 금물이었다. 몇 경기 동안 보아온 토르안의 능력은 지금껏 만났던 다른 신규 플레이어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토르안의 능력치 역시 알 수 없으니 더 긴장해야했다.
“생각보다 빨리도 만났어.”
경기장으로 향하던 도중, 토르안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껏 보아온 여유롭던 모습과는 달리, 제법 긴장한 모습이었다.
뒤를 돌아본 우성의 눈에 토르안이 아닌 그의 손에 잡힌 옥토퍼스가 들어왔다. 저만한 크기라면 제법 무거울 게 텐데, 토르안은 한 손으로 도끼를 흔들고 있었다.
근력 스텟이 높은 걸까? 아니면 무기가 좋은 만큼 가벼운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위력적일 수밖에는 없었다.
“이게 신경 쓰이나 보지?”
토르안은 손 안에서 흔들던 옥토퍼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우성의 손에 들린 아포피스를 가리켰다.
“나도 네 무기가 무척 신경 쓰여. 쌤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것도 그렇군.”
“누가 이기든, 한 놈이 마병 두 개를 갖게 되겠군. 큭. 그래 봤자 결국 주인은 다른 놈이 되겠지만.”
“말 한번 많군.”
“죽을 때가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가 말 많은 거야 이미 어제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하긴, 보기와는 달리 토르안은 말이 많긴 했다. 워낙 목소리가 낮고 담담해서 그렇지 묻지도 않은 걸 이것저것 알려주는 걸 보면 심심한 걸 어지간히도 못 참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떨었던 수다와는 달리, 지금 토르안의 목소리는 묘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억양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우성은 그의 눈동자가 붉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마병에 먹히고 있는 건가?’
우성과 토르안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두 사람의 등장에 앞의 시시한 경기로 식어있던 관중들의 반응이 다시 뜨겁게 올라왔다.
“와아아아아-!”
“토르안! 토르안!”
“이우성!”
토르안의 이름을 부르는 관중도 있었고, 우성의 이름을 부르는 관중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토르안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이 더 많았다. 투기장에 있었던 시간도 더 길었을 뿐더러 거대한 도끼로 찍어 누르는 그의 경기는 관중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관중들 틈을 살피던 우성은 그 사이에서 혜미와 혜정을 볼 수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배팅이 한참이었는데 혜미와 혜정은 당연하게도 우성에게 돈을 걸었다. 주머니가 하나 더 늘어나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간 우성과 안현수에게 돈을 걸며 꽤 이윤을 챙긴 모양이었다.
‘이번 배당이 크겠지.’
분위기를 보아 우성에게 걸리는 배당보다 토르안에게 걸리는 배당이 훨씬 적었다. 대부분의 관중들은 토르안에게 돈을 걸었고, 그래도 간혹 우성에게 돈을 거는 관중들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우성은 토르안을 죽이고 얻을 수 있는 다른 이득을 계산했다.
‘포인트도 제법 되겠지.’
토르안은 배치고사의 우승자다. 지금껏 만난 다른 신규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우성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많은 양의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1/10밖에 되지 않다 하더라도 그만하면 꽤 많은 포인트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늘게 뜬 눈으로 우성은 옥토퍼스를 바라봤다.
아포칼립스에서는 플레이어를 죽여도 가지고 있는 소지품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템 드롭(Drop)과 같은 시스템이 아닌, 노획(虜獲)시스템인 것이다.
그런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이 경기에서 승리해 토르안을 죽일 수 있다면 마병 옥토퍼스를 챙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지킬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말이다.
‘일단 챙기고 봐야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겨야 한다. 풀고 있던 긴장을 다잡으며 우성은 아포피스를 움켜쥐었다. 거기에 반응해 아포피스가 낮게 울었고, 우성의 검은자위가 깊어졌다.
“기대되는군. 같은 특전 무기끼리 싸우면 누가 이기게 될지. 그렇지 않나?”
“기대하지 마. 내가 이길 거니까.”
우성은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토르안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자신감, 혹은 자만이었지만 우성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애초에 같은 마병이라고 해도 특전의 등급 자체가 달랐다. 옥토퍼스 역시 A등급이라는 낮지 않은 특전이었지만 아포피스는 그 많은 종류의 특전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의 S급 특전이었다. 무기만 놓고 볼 때 우성이 유리한 건 당연했다.
“과연 그럴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토르안이 바닥에 옥포퍼스를 세웠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성은 애써 무시했다. 토르안이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부리고 있었다.
잠시 후, 토르안과 우성의 소개가 짧게 끝마치고 사회자가 경기를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야수처럼 달려들던 토르안이었지만 상대가 우성이기 때문인지 한층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안 보여줘도 돼.”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어. 난 여기서 죽고 싶은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거든.”
키기기기기기-.
키기기기긱-.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심장을 차갑게 식히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우성은 몸을 떨었다. 소리만큼이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소름이 끼쳤다.
옥토퍼스의 넓직한 양 쪽 도끼날에 각각 하나씩. 송곳니가 튀어나온 짐승의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무기와도 곧 안녕인데… 헤어지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써먹어 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