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투기장>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한 배려인지 투기장에서는 플레이어들, 아니 정확히는 선수들에게 원하는 종류의 무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종류는 검, 창, 도끼, 메이스, 단검 등으로 접근전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화끈한 경기를 원하는 관중들의 취향을 노린 듯했다.
하지만 우성은 따로 검을 소지하고 있다며 지급하는 무기를 거절했다. 앞서 가던 플레이어는 ‘분명 검 같은 건 없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의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도 특전으로 장갑에서 무기로 변하는 검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자 천장뿐만 아니라 무대에 따로 설치된 조명 때문에 눈을 뜨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익숙해진 모양인지 우성은 건너편에 보이는 플레이어 ‘마히옹’을 바라봤다.
우성을 포함한 두 선수의 등장에 사회자는 우성과 마히옹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히옹 역시 우성과 같은 신규 플레이어였는데, 또한 마찬가지로 투기장에서의 첫 경기라고 한다. 왜 이렇게 빨리 경기 일정이 잡혔나 했더니 투기장 신인들끼리 한 번 붙여보겠다는 심산이었던 모양이었다.
마히옹은 프랑스 국적을 가진 플레이어였다. 배치고사에서는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았고, 삼 일 전 배치고사를 끝내고 다시 아포칼립스에 접속했다고 한다.
반면 우성은 이번 배치고사에서 1위를 기록한 새로운 신인이었다. 하지만 마히옹 역시 배치고사의 성적이 썩 나쁘지 않았고, 플레이어 3일 차라는 걸 감안하면 썩 가능성이 없다고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배치고사를 우승했다 하더라도 아포칼립스에서 3일이라는 시간은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히옹에 비해 우성에게 저울추가 더 기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곧 배당이 시작되었다. 목소리의 7할 이상은 우성에게 거는 목소리들이었고, 남은 3할은 마히옹에게 걸렸다.
“잘못 걸렸군.”
배당이 지속되던 중, 마히옹이 중얼거렸다. 거리가 엄청 가깝진 않았지만 우성은 그가 중얼거리는 걸 얼핏 들을 수 있었다.
소개로는 스물다섯 살이라고 하는데 덥수룩한 수염과 뒤로 넘긴 머리 탓인지 서른이 넘었다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무기는 남자 펜싱에 주로 사용되는 사브르였는데, 그리 위력 있는 무기가 아니었음에도 저 무기를 고집하는 걸 보면 펜싱 대회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분명 프랑스 사람일 텐데? 한국어로 들리는 말이 내심 의아했지만 이내, 정진혁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 언어의 장벽은 무너져 있다고 말이다.
“여긴 어쩌다 들어왔지?”
“젠장. 그 새끼 꼬드김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 같은 놈을 만날 줄 알았다면 안 왔을 거다. 이제 와서 후회 되는군.”
마히옹의 얼굴은 분함으로 일그러지면서 동시에 어두운 그늘이 져 있었다. 괜한 곳에 발을 들였다는 생각에선지 그는 괜한 철장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분을 풀었다.
우성은 정예지를 떠올렸다. 아마 마히옹 역시 자신처럼 기존 플레이어의 꼬드김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에 있는 기존 플레이어들 역시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신규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돈놀이라도 하는 건가?’
투기장은 싸움 구경을 하며 선수에게 돈을 거는 엄연한 도박장이었다. 그리고 도박장만큼 잘만 만지면 돈이 되는 장소도 없었다.
NPC들의 비중이 더 크긴 하지만 엄연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2할 정도는 기존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은 NPC들과 함께 어울려 선수들에게 돈을 배당하거나, 혹은 투기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그럼 정예지도 투기장과 한통속인가?’
한 번 의심이 시작되니 꼬리에 꼬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하루 만에 친해졌다고 해서 그 주변 사람인 우성이나 안현수에게까지 호의를 베푼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물론 우성에게 있어서 이곳 투기장은 괜찮은 퀘스트 장소이긴 하다. 하지만 그 외 다른 플레이어들에게까지 적용될 만한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어지 보면 작은 보상 하나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다. 자칫 재수 없게 강한 상대라도 만났다간 라이프를 잃어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자만하지 않고 우성은 긴장했다. 검 하나를 믿고 설치기엔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마히옹만 하더라도 배치고사에서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았다고 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토르안의 눈빛 역시 심상치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면 그 역시 꽤 실력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 창고로 들어가기 전 만났던 노인을 보면 이곳 투기장의 선수로 등록되기 위해선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선수의 소개와 배당이 모두 끝났는지 사회자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입에는 아무것도 대지 않았음에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투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다섯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직후, 사회자가 우성과 마히옹을 보며 손짓했다. 싸우라는 제스쳐에 철장에 기대어 서 있던 우성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히옹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우성은 사브르를 직선으로 세우며 다가오는 마히옹의 정보를 살폈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마히옹
직업 : 검사(劍士)
국적 : 프랑스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
클레스 : B
[능력치]
- [근력 : 17] [민첩 : 19] [체력 : 16] [맷집 : 15] [반사능력 : 14] [마력 : 14] [정신력 : 12] [PP : 80]
: (- 100p)
* 플레이어 특성 : 신속 Lv.2 <상세정보>
* 업적 : --
* 포인트 : 1250p
* Lv. 포인트 : 8
* Life : ****
다행히도 B클래스의 플레이어라 그런지 우성은 그의 플레이어 정보를 볼 수 있었다. 배치고사를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고 직업을 얻은 덕분인지 마히옹의 스텟은 꽤 준수, 아니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
비교하자면 배치고사 1일차의 우성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스텟이 더 높은 축에 속했다. 높은 근력과 민첩을 기반으로 낮지 않은 반사능력은 꽤나 위협적일 수 있었다.
물론, 예전의 우성이었다면 말이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아포피스의 대리자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칭호 : 생존자
클레스 : S
[능력치]
- [근력 : 23] [민첩 : 25] [체력 : 30] [맷집 : 26] [반사능력 : 23] [마력 : 22] [정신력 : 34] [PP : 1807]
: (- 100p)
* 플레이어 특성 : 불굴의 의지 Lv.2 <상세정보>
* 업적 : 죽어가는 숲의 생존자
* 포인트 : 5525p
* Lv. 포인트 : 10011
* Life : *****
압도적인 능력치 차이였다. 단순히 B클래스와 S클래스의 차이라고 보기에 우성과 마히옹의 사이에는 단순히 실력만으로 매울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스텟은 단 몇 포인트만으로도 확연히 두드러지는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민감했다. 1,2포인트 가지고도 몸이 가벼워지는 정도를 실감할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10포인트 차이라면 어느 정도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런데 우성과 마히옹의 사이에는 모든 능력치가 적어도 5포인트 이상, 많게는 10포인트까지 차이가 났다. 정신력과 같은 경우에는 2배가 훌쩍 넘게 차이가 나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소로운 마음에 우성의 입가에 씩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을 비웃었다고 생각한 마히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군.”
“아, 미안하다. 가소로워서 말이지.”
“……자만인가?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군. 그 자만이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오그라드는 말은 됐고, 후딱 덤벼. 니들 나라에서는 싸움을 주둥이로 하나 보지?”
애국심이 꽤 투철하기라도 한 듯 마지막 도발에 마히옹은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물론 그 속에는 우성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을 하겠다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신기하네.’
정확하게 왼쪽 가슴을 노리고 찔러오는 사브르를 멀뚱히 바라보며 우성은 눈을 깜박였다. 거리가 조금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히옹의 검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검이 잘 보인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문제였다. 엄밀히 말해 우성의 정신이 극도로 발달해 검이 다가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느리게 느끼게끔 ‘조절’한 것이다.
‘아, 이런 거였구나.’
정신력 스텟의 효용성을 깨달으며 우성은 드디어 아포피스를 휘둘렀다. 있는 힘껏 휘두른 검은 마히옹을 찌를 수 있었음에도 그의 사브르와 부딪혔다.
쨍-!
맑은 소리가 잠시 울린다 싶더니.
텅--.
부러진 사브르의 반쪽이 날아가 마히옹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꽂힌 반쪽짜리 사브르를 보며 마히옹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혹시나 했는데 진짜네. 이것 참.”
사브르는 펜싱 종목에 사용되는 검으로 대다수 검들에 비해 길이가 긴 반면 두께가 얇고 그만큼 내구도가 약했다. 거기다 마히옹이 가지고 있는 사브르는 어디까지나 기존 플레이어들이 보급용으로 제공한 싸구려 무기에 지나지 않았다.
우성은 마히옹의 검이 들어오던 순간, 마히옹이 아닌 그의 검을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근거에서 기인한 확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마히옹의 검은 우성의 검에 부러졌다. 애초에 플레이어간의 능력치에서부터 차이가 났고, 무엇보다 무기의 질에 있어서는 가히 하늘과 땅 차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순히 부러뜨리는 데에서 그쳤지만, 우성은 자신의 실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베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부러진 검과 멀쩡한 검. 아직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음에도 마히옹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조금씩 내려가는 마히옹의 검을 보며 우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만하면 결과는 났네.”
“아, 아직…….”
“포기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양심이 찔린다. 포기하면 그대로 죽는 건데 말이야. 그렇지?”
우성은 마히옹이 뒤로 물러났던 만큼. 딱 그만큼만 더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히옹은 저도 모르게 우성에게 압도되어 이제는 절반밖에 남지 않은 사브르를 앞으로 마구 휘둘렀다.
“그래.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싸워줘. 그래야지… 나도 죽이면서 덜 불편할 것 같으니까.”
“사, 살려…….”
“살려달라고 할 거면 검부터 치우던가. 아, 물론 안 살려 줄 거지만. 나도 포인트는 벌어먹고 살아야지?”
휘익-.
핏빛이 감도는 검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히옹은 우성이 다가올수록, 그의 검이 다가올수록 미칠 것 같았다. 배치고사 마지막 날 겪었던 첫 번째 죽음이 떠올라 그는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싫어! 죽기 싫어!”
발광에 가까운 동작과 절규. 마히옹의 절규를 무시하며 우성은 검을 대각으로 올렸다. 예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동작은 아포피스의 대리자로 전직하며 얻은 ‘마검술’의 영향 탓이었다.
민첩 스텟 25. 우성의 스텟은 이미 상식에서 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우성을 보며 마히옹은 눈을 까뒤집으며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죽기 싫은 놈이 여긴 왜 기어 들어오고 그래?”
“살려줘어어-!”
사악-.
“지지리도 약한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