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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41화 (41/258)

41화

“잘 생각하셨어요.”

정예지는 눈을 반짝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우성에게는 처음 보여주는 미소였는데, 투기장의 뜨거운 열기와 어울려 그녀의 웃는 빨간 입술이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그쪽은요? 안현수씨?”

“……참가하죠. 돈은 필요하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안현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정예지의 뒤를 따랐다. 우성과 함께 나란히 서며 안현수는 혜미와 혜정을 돌아봤다.

“둘은 여기 있어. 오빠들이 돈 벌어올게.”

“……다녀오세요. 몸조심 하고요.”

이런 분위기에서까지 농담이라니. 어지간히 담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사이 우성은 이미 정예지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혜미와 혜정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인 안현수가 그 뒤를 따라갔다.

정예지의 뒤를 따라 우성과 안현수가 도착한 곳은 투기장 뒤쪽의 매표소였다. 그곳에는 각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옆으로 배당률이 적혀있었다. 선수들의 수는 대략 오십 명 정도로 생각보다 썩 많았다.

‘다른 국적의 플레이어들까지 있는 걸 보면, 많은 건 아닌가?’

아포칼립스는 총 7개국의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국적별로 신규 플레이어는 300명씩이니, 총 2100명의 신규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그들 중 50명이라면 그렇게 많다고 볼 수는 없었다.

“배당 걸로 오셨소?”

“그것도 있고, 선수 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정예지는 노곤한 표정의 노인의 물음에 우성과 안현수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잠시 정예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노인은 곧 우성과 안현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영 실없어 보이는데.”

“이래 보여도 배치고사에서 우승, 준우승을 거둔 실력자들입니다. 이번 7회 차의 슈퍼 루키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놈들이? 의외군. 그 정도라면야…….”

아무나 등록이 되는 건 아니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과 종이를 잡았다.

“이름, 나이, 직업, 국적, 그리고 플레이어 일차. 순서대로 말 해.”

“이름은 이우성, 나이는 스물여섯, 직업은 검사입니다. 국적은 한국이고 일차는 하루입니다.”

“이름은 안현수, 나이는 스물여섯, 직업은 창술사입니다. 국적은 마찬가지로 한국이고 일차는 하루입니다.”

노인은 부르는 대로 종이 인적사항을 적더니 그 위에 인장을 찍었다. 두 장의 각기 다른 종이를 각각 우성과 안현수에게 건넨 노인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이거 들고 저 쪽으로 가 봐. 이거 들고 가면 번호표랑 대진표를 짜 줄 거야.”

노인이 건넨 종이 위에는 우성의 이름과 나이, 직업, 그리고 국적과 플레이어 일차가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노인은 투기장의 선수를 선발하는 일종의 감독관인 모양이었다.

우성과 안현수는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죽간에 함께 가던 정예지를 경비병으로 보이는 남자가 막아섰다. 이 이후로는 검증받은 선수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정예지 역시 모르지 않았던 듯 우성과 안현수를 배웅하며 인사를 마쳤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곳에 오는 게 한 두 번은 아닌 모양이었다.

경비병에게 검증을 맡은 우성과 안현수는 안쪽 철문으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문이었지만 그 안쪽으로 보이는 창고는 작은 운동장이라고 볼 수 있을 만했다.

창고 안에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목에는 각각 플레이어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들이 적혀있었다.

입구에 있던 뚱뚱한 남자에게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를 건네자, 잠시 후 그가 다른 플레이어들의 것과 같은 목걸이를 만들어 왔다. 목걸이를 각각 받아 쥐자 우성과 안현수에게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도착!]

이름 : 비밀의 투기장

구분 : 비밀 퀘스트

등급 : B

보상 : 100G(골드), 500포인트

* 시작의 마을의 지하에 위치한 비밀 투기장. 신규 플레이어로서 선수로 참가해 투기장에서 우승하라.

* 한 게임을 승리할 때마다 추가 골드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B급 퀘스트. 우성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처음 투기장에 들어섰을 때보다도 더한 짜릿함과 놀람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우선 100골드라는 보상은 이곳의 물가에 무지한 우성이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금전의 최고 단위가 브론즈(Bronze)이고 그 다음이 실버(Silver),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위가 골드(Gold)였다. 100골드라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닌, 아니 오히려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무엇보다 500포인트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포인트였다. 게다가 매 경기마다 상대 플레이어를 살해하며 추가로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으니 이만한 보상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빠르게 퀘스트를 수락하자, 곧 뚱뚱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흘흘. 잘 부탁한다. 듣자하니 이번 플레이어들 중 최고 신인들이라던데.”

“플레이어들 중? 아저씨도 플레이업니까?”

“당연하지. 이곳 투기장을 만든 것도 플레이언데. 이곳을 운영하는 놈들 모두 너희와 같은 플레이어들이야. 손님들이야 NPC가 대부분이지만.”

뜻밖의 이야기였다. 게임 내의 시설이기에 당연히 NPC가 만든 것이라 생각했는데, 플레이어가 만든 시설에서 퀘스트가 생성될 수도 있다니.

“이름표는 잘 간수하고.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시간이 되면 부를 테니.”

“경기 구경은 못하는 겁니까?”

“저쪽에서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으니 걱정 마. 그런데 뭐, 여기서 며칠 있던 놈들은 그런 거 관심 없더라고.”

“왭니까? 다른 사람 경기를 보면 나름대로 실력도 파악할 수 있고 대처할 수단도…….”

“그거야 곧 알게 되겠지.”

안현수의 질문을 중간에서 탁 끊으며 뚱뚱한 플레이어가 흐물흐물하게 웃었다. 까닭 없이 기분 나쁜 웃음에 안현수는 몸을 살짝 떨었다.

“너희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 플레이어는 철장 문을 닫고 창고를 나섰다. 문이 닫히자 창고는 금세 어두워졌는데, 창고 군데군데 나 있는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지다 보니 음산한 느낌에 살갗이 에는 듯했다. 꽤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따로 친분들은 없는 듯, 창고 안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서로간에 대화가 없었다. 간간히 몇 마디씩 나누는 소곤거림이 있는 걸 보면 몇 명은 그래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듯했다.

창고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우성과 안현수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들 중에서는 상처를 입은 플레이어보다는 입지 않은 플레이어가 훨씬 적었는데, 아무래도 대부분 경기 도중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잔인하군.’

플레이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었다. 검으로 찌르면 피가 흐르고, 고통까지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 안에 사람을 가둬두고 사람과 사람끼리 거로 무기를 겨누는 이런 경기. 이곳 투기장은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인간성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토르안! 토르안!

창문 밖으로는 경기 중인 선수의 이름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성은 안현수의 팔을 툭 건드리고는 창문 쪽으로 향했다. 따라 오라는 손짓에 안현수가 우성을 따라 바로 옆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창고의 벽에 1미터 간격을 사이에 두고 군데군데 나 있었다. 어지간히 키가 작은 사람이 아니라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밖을 훤히 볼 수 있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우성은 다시 한 번 넋을 놓고 말았다.

“……미친.”

“이런 시발…….”

다른 말이었지만, 우성과 안현수는 동시에 입밖으로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악, 흐아아악, 그, 그만!”

“헉. 헉.”

“흐앙, 하, 하지마-!”

두 명의 플레이어가 열기 속에 서로의 몸을… 아니, 정확히는 남성 플레이어가 여성 플레이어의 몸을 강제로 범하고 있었다. 남성 플레이어는 달뜬 신음을 흘리며 여성 플레이어를 덩치로 깔아뭉갠 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정사를 즐겼다.

한층 뜨거워진 투기장의 열기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펼쳐지는 자극적인 섹스(Sex). 투기장을 즐겨 찾는 관중들에게는 하나의 묘미일지 몰라도 지극히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우성이나 안현수에게 있어서는 그저 구역질나는 광경뿐이었다.

“……혜미랑 혜정이를 안 데려오길 잘 했군.”

“동감이다.”

혜미나 혜정은 우성이나 안현수와 같이 강하지는 못하다. 혜정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배치고사를 오래 겪고 마법사로 전직한 혜미도 투기장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들이 고집을 피워 자신들도 퀘스트를 받겠다고 투기장에 들어왔으면 상당히 난감해졌을 것이다. 어느 여자라도 저런 꼴을 당하고서 정신이 멀쩡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투기장 한가운데에서 두 플레이어의 정사는 꽤 길게 이루어졌다. 마지막까지 욕구를 표출한 남성 플레이어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듯 가지고 있던 도끼를 들어 여성 플레이어의 목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투기장 바닥에 피분수가 뿌려지고.

와아아아아-!

곧이어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투기장을 가득 메우는 시끄러운 소음에 우성과 안현수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미친 곳이었군.”

“……여긴 저런 놈들밖엔 없나?”

저 남성 플레이어 역시 따져보면 자신들과 같은 신규 플레이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살다가 게임을 시작하고 며칠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대체 어떻게 저런 사고방식이 나오는 것일까?

우성은 여성 플레이어를 죽이고 유유히 창고를 향해 걸어오는 남성 플레이어, 토르안을 빤히 노려봤다. 그 때, 우연히 창고로 걸어오던 토르안과 우성의 눈이 마주쳤다.

‘웃어?’

밝은 황갈색 눈이 우성과 마주치자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기분 나쁜 웃음이라고 생각하며 우성은 마주 웃어 보였다.

‘그래. 꼭 한 번 만나자. 꼭.’

이윽고 토르안이 무대에서 퇴장하자 소란스럽던 투기장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물론 그것도 경기 중일 때와 비교해 조용해졌다는 것뿐이지 평상시라면 귀가 시끄러울 정도의 소음은 지속되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금 창고의 문이 열리고 토르안과 함께 한 플레이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창고 안의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꽤 그럴싸한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존 플레이어인 모양이었다.

“다음, 플레이어 이우성. 이우성 선수와 플레이어 마히옹. 마히옹은 지금 당장 투기장 무대 위로 올라오도록 하십시오.”

“어라? 벌써?”

안현수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을 등록하자마자 바로 경기 일정이 잡히다니 뜻밖이었다.

하지만 우성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차였고 많은 경기가 잡힐수록 우성은 환영이었다.

토르안이 안으로 들어와 앉고 우성은 밖으로 향했다. 어두운 창고와는 달리 형형색색 빛나는 조명들로 가득한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지이이잉-.

손에 착용한 장갑이 미약하게 떨었다. 그리고 직후, 우성의 손아귀에 반(半) 마검 아포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안에 쥐어진 아포피스를 보며 우성은 든든함을 느꼈다. 검붉은 검을 조명에 비추며 우성이 중얼거렸다.

“첫 무대 한 번 화끈하네.”

우웅-.

우성의 말에 아포피스가 화답하듯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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