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더 플레이어?”
근래 들어 ‘플레이어’라는 단어를 많이 듣긴 했지만 혜미가 말한 단어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고개를 젓는 우성에게 혜미가 말을 이어갔다.
“더 플레이어(The Player). 이건 게임이 아니고 사이트의 이름이야.”
“사이트?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인터넷 사이트 말하는 건가?”
“응. 아포칼립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의 사이트래. 누가 만든 건지, 운영자가 누군지를 전혀 알 수 없지만 게임 전반적인 이벤트나 대규모 전쟁 공지 같은 것들이 올라온다더라고. 플레이어들 나름의 팁 같은 것도 자주 올라오고.”
게임 사이트. 이것 역시 게임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 하지만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포칼립스는 게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과 한발 걸쳐 있는 ‘또 하나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퀘스트나 사냥도 그렇고, 이젠 게임 사이트까지 있다고 하니 현실과 게임의 사이에서 뒤죽박죽 혼동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이 게임을 만든 녀석이 만든 거겠지?”
“아마도. 다른 플레이어들 의견도 그렇더라고.”
“뭐, 우리야 좋긴 하지만. 조만간 확인 해 봐야겠어.”
그 조만간이란 당연하게도 현실로 돌아간 직후를 의미했다. 찝찝하긴 하지만 아포칼립스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다면 우성이나 다른 일행들에게나 꼭 필요한 사이트였다.
더 플레이어.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정보였다. 그 하나를 통해 무수히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이트에 불과할 뿐이라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겠지만 신규 플레이어인 그들에겐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지금 당장 시급한 건 돈이었다. 포인트도 중요하긴 하지만 우성은 한 시라도 빨리 도시로 향해 혜정의 직업을 찾아줄 생각이었다. 파티의 완성은 사제가 포함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할 수 있었다.
똑똑-.
그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무르익어가던 회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찾아올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안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신규 플레이어 이우성, 안현수, 박혜미, 박혜정. 나오십시오.”
안현수의 물음에 답한 목소리의 여성 플레이어의 것이었다. 가늘고 고운 목소리와는 달리 조교처럼 고압적인 말투였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현수는 정진혁이 떠올라 표정을 찡그렸다.
“클랜 가입 권유라면 사양입니다. 가시죠.”
“그런 거 아니니까 나오십시오. 나중에 보상 놓치고 후회하지 마시고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가라고 할 수만은 없었다. 안현수는 의아한 마음에 일단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이 열리고 이윽고 문 앞에 서 있는 로브 차림의 고운 여성 플레이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플레이어 이우성? 아니, 안현수인가요?”
“무슨 일이십니까?”
혜미와 혜정을 대신해 우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안현수 역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여성 플레이어와 조금 떨어졌다. 일찍부터 정진혁을 만난 그들에게 있어서 기존 플레이어의 이미지는 썩 좋지 못했다.
“오빠. 그 언니 꽤 좋은 사람이야.”
“……언니?”
“응. 정진혁 같은 사람 아니야. 마법사 전직 장소를 안내해 준 것도, ‘더 플레이어’라는 사이트와 포탈에 관해 알려준 것도 그 언니야.”
아무래도 여관 밖에 나가 혜미, 혜정과 친해진 플레이어인 모양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안현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고개를 숙였고 우성 역시 경계를 풀었다.
미리부터 경계하고 좋지 않은 말투를 사용한 건 자신들 쪽이었기에 우성 역시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사과할만한 건 일찍 사과하는 게 적을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낮에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이해합니다. 혜미와 혜정이에게 들었거든요. 정진혁, 그 인간이라면 붉은악마 클랜에서도 개새끼로 유명하죠.”
미인이라고 할만한 여성 플레이어가 담담히 험악한 욕설을 내뱉자 꽤나 매서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담담한 말투나 차가운 인상은 오히려 욕설조차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무슨 일이야?”
“네가 여기서 묵고 있다고 알려 줬잖아?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플레이어를 완전히 신뢰할 수만은 없어 우성은 결국 여성 플레이어에게 대답을 독촉했다. 그녀 역시 무작정 따라오라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대답했다.
“괜찮은 퀘스트가 하나 있어요.”
**
퀘스트라는 말에 우성은 곧장 여성 플레이어의 뒤를 따랐다. 수상한 구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혜미와 혜정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척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니 한 번쯤은 믿어볼 만했다.
여성 플레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정예지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퀘스트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는데, 일단 따라와 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밤이 되어있었다. 거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다들 여관으로 들어갔는지 몇 명 나와있지 않았다.
정예지가 향한 곳은 시작의 마을 구석의 으슥한 골목이었다. 순간 삥을 뜯는 불량배가 생각나 우성과 안현수는 걸음을 멈칫했다. 하지만 순진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정예지를 믿는 건지 혜미와 혜정은 쫄래쫄래 그녀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한숨을 푹 쉬며 우성이 안현수와 눈을 맞췄다. 퀘스트라는 말이 끌리기도 하고, 혜미와 혜정이 저토록 정예지를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일단은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성은 여차하면 마검을 꺼내 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이곳 시작의 마을에서 다른 플레이어의 살인은 금지되고 있었다.
정예지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자, 가장 구석진 골목의 작은 건물이 보였다. 열 평이나 될까 싶은 작은 단칸집이었는데, 정예지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며 말했다.
“여기에요.”
우성을 포함한 일행은 정예지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거지가 살았나 싶을 정도로 허름하고 지저분한 집 내부는 그리 특별할 게 없었는데, 곧 정예지가 바닥을 들춰냈다.
드드드드드득-.
바닥 한쪽을 잡고 쭉 잡아당기자, 가로 세로 1미터 정도 되는 문이 열렸다. 이윽고 바닥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나자, 우성을 포함한 일행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퀘스트로 통하는 입구에요. 일단 구경부터 하시는 게 어때요?”
마지막으로 선택권을 주는 모습이 영 꺼림직 했지만 우성은 조금 생각하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퀘스트가 있다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퀘스트가 필요했던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예지를 선두로 우성, 안현수, 혜미, 혜정의 순으로 뒤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천막 안은 계단으로 조금 내려오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다. <심연> 특성이 있는 혜미나 조금 보일 정도였다.
딱-.
그 때, 정예지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정예지의 주위로 밝은 구 몇 개가 떠올랐다. 마치 전구처럼 빛을 발하는 그 물체는 계단 안쪽의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와아.”
“신기할 것 없어. 혜미 너도 쓸 수 있는 기초 마법이야.”
우성을 대할 때와는 달리 빙긋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의 차가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우성은 혜미와 혜정이 왜 그렇게 그녀를 따르는지 알 것도 같았다.
“라이트(Light) 마법 말하는 거죠?”
“그래. 물론 혜미 네 건 하나에서 그치고 밝기도 조금 덜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신기하게 볼 것도 없다, 이거지.”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직 사용해 본 적은 없는데.”
마법사로 전직을 해서 그런지 혜미는 정예지가 보여준 마법에 관심이 많았다. 혜미는 마법사에 관해서나 마법에 관해서나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그녀는 그 질문을 받았다. 일행은 아주 잠깐 이어진 대화에 계단의 중간 지점에 도착했다.
아아아아아-.
우우우우-.
환호성 소리?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미약하게 들리는 소리에 우성은 귀를 기울였다. 계단을 점점 더 내려가며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환호 소리?”
“슬슬 들리죠? 이제 곧 도착이에요.”
정예지는 혜미와 대화를 한 덕분인지 조금은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환호성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는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좁았던 계단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졌다. 이윽고 라이트 마법이 빛을 비추는 끝으로 넓직한 철문이 보였다. 아까부터 들리던 환호성 소리는 철문의 작은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앞장서 걷고 있던 정예지는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앞으로 조금 힘을 주자, 곧 철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기기긱-.
죽여라, 죽여라-!
우우우우우-!
아까보다 훨씬 다양해진 환호성 소리. 그 속에 섞인 야유소리와 잔인한 구호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우성은 물론, 뒤따라오던 안현수 역시 할 말을 잃었다. 혜미와 혜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띠링-! 숨겨진 장소 ‘투기장’을 발견하였습니다.]
[투기장에서는 소지한 돈을 걸어 도박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권유하지는 않습니다.]
[투기장 참가 조건은 배치고사가 끝나고 7일이 지나지 않은 ‘신규 플레이어’에 한합니다.]
눈앞의 광경을 보나 메시지로 보나 이곳의 정체를 아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감옥 같은 철장을 가운데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두 명의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명은 그들과 같은 동양 계열의 사람으로 보였고, 다른 한 명은 금발 머리와 오똑한 코를 가진 서양 계열의 사람이었다. 설명을 보니 그들 역시 우성과 같은 신규 플레이어인 듯했다.
철장의 주위로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에 돈을 쥐고 있었는데, 그 수를 대강 살피니 어림잡아 오백 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들이 게임 속의 NPC인지 아니면 우성과 같은 플레이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상은 아닌 듯했다.
“투기장……?”
“괜찮은 퀘스트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그 괜찮은 퀘스트가 이겁니까?”
“네. 시작의 마을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B등급 퀘스트에요. 물론 A등급 퀘스트를 완료하신 배치고사 랭킹 1위 이우성씨에게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요.”
은근히 도발에 가까운 말에 우성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긴 해 우성은 고개를 치켜들고 말을 아꼈다. 정예지 역시도 이대로 설명을 마칠 생각은 없었는지 금세 다시 말을 이었다.
“투기장. 이곳은 시작의 마을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 살해’가 허락된 곳이에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80퍼센트 정도가 NPC이고, 20퍼센트 정도가 저희와 같은 플레이어고요.”
“……플레이어 살해가 허락됐다고요?”
“네. 바깥에서도 이곳에서 이루어진 살인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을 하는 분위기에요.”
플레이어 살해가 허락된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성에겐 가장 큰 혜택이었다. 계속해서 대진이 이루어지는 투기장 만큼 많은 양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장소도 없었다.
7일이라는 시간제한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니, 오히려 7일이라는 제한이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장소를 알았다는 게 우성에게 있어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포인트뿐만 아니라 선수로 참가해서 승리하면 추가로 돈을 배당받을 수 있어요. 최소로 걸리는 돈이 은화이니, 선수에게 돌아가는 돈은 최소한 금화 이상…….”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도박장인 만큼 선수로 참여하면 돈을 얻는 것이야 당연한 일. 우성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참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