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 말을 시작으로 오더는 특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특전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긴 하지만 특전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무기의 형태의 특전이 있기도 했고, 더욱 강력한 새로운 플레이어 특성이나 패시브 스킬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다. 또는 간간히 엑티브 스킬 형태의 특전이 존재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외로 우성과 안현수는 오더에게서 미리 아포칼립스에 대한 정보를 흘려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직업’에 대한 것이었다.
특전의 종류 중 하나가 바로 일반적인 직업과 다른 ‘레어(Rare)’ 클레스 이상의 직업을 얻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성과 안현수는 아포칼립스에도 다른 게임들과 같이 클레스와는 별계의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걸 미리 알려줘도 되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고, 우수 플레이어들에게 이 정도 편의는 괜찮다나.
아무튼 그렇게 정리된 특전의 종류는 무기, 패시브, 엑티브 스킬, 플레이어 특성, 직업, 이렇게 분류할 수 있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에도 애매한, 하나같이 군침이 도는 보상들이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우성과 안현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어느 특전을 선택해야 앞으로 평탄한 길이 펼쳐질지, 아니면 조금은 돌아가거나 오르막길이 나오게 될지. 이 한 번의 선택에…….
“착각하고 있군.”
“응?”
“난 특전의 종류를 설명했을 뿐, 너희에게 선택권을 준다고 말 한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특전의 부여는 랜덤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뭐?”
소위 편한 아빠다리로 앉아있던 안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충 뭐라고 하냐면 ‘그럴 거면 왜 주절주절 설명해서 기대하게 만드냐’고 따지는 거였다.
괜한 기대로 부풀었다는 생각에 우성은 헛바람을 한숨으로 내쉬었다. 내심 특전으로 ‘직업’을 선택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날아갔다 생각하니 아쉽긴 했다.
패시브 스킬이나 특성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게임에 있어서 ‘직업’이란 앞으로의 게임을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직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게임 스타일도, 아이템이나 스킬도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제 계열의 직업만 나오지 않으면 다른 직업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진형이 악마 진형인 만큼 천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제 계열의 직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뭐, 지금 와서 생각해 뭐하겠어.’
특전을 고르는 방식은 랜덤. 우성이 무엇을 원하건 결국에는 운에 달려있었다. 하기사, 굳이 직업이 아닌 다른 게 나오더라도 기존에 있던 보상 외에 플러스알파로 얻는 횡재인 만큼 어느 게 나와도 아쉬울 건 없었다.
‘아니, 아쉽긴 하겠네.’
안현수는 벌써 1분이 넘도록 오더를 향해 이것저것 따지고 있었다. 그걸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오더는 우두커니 서서는 안현수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은 다 끝났나?”
“아, 그래. 내가 포기한다, 내가.”
푹 한숨을 쉬며 안현수가 다시 우성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힐끗 오더를 노려봤다.
“하여간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단 말이지. 안 그래?”
“공감.”
벌써 앞에서 몇 번 경험했던지라 우성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목숨이라는 말과 라이프라는 말을 교묘하게 돌리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던가. 게다가 특전에서까지 연달아 비슷한 짓거리를 하다니, 이젠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 시작하지.”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알면서 오더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꿋꿋이 자기 할 일, 할 말을 꺼내며 오더가 손바닥을 펴 아래로 내렸다.
지잉, 지이이잉-.
티끌 한 점 없는 새하얀 바닥이 울렸다. 지진이라기보다는 벌레가 우는 소리에 가까운 진동이었다. 그렇게 한참 바닥이 울리더니, 곧 새하얀 바닥에서 세로 1m 가로 30cm정도 되는 크기의 카드들이 뒤집혀서 나타났다.
카드의 뒷면은 새까만 면에 가장자리가 흰 색으로 테두리 되어 있었다. 랜덤이라더니 결국 카드 뽑기인 모양이었다.
바닥에서 뒤집혀서 올라온 카드의 수는 어림잡아도 백 개는 되어보였다. 원 카드처럼 모든 카드의 뒷면은 같았다. 저들 중 어떤 특전이 가장 좋을지는 하나하나 까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원하는 카드를 고르면 된다. 카드에 따라 특전의 종류의 성질이 달라지니 신중히 고르도록.”
“그래봤자 랜덤이지.”
안현수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신중하지 못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어차피 랜덤이라면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찍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기다리려, 플레이어 안현수.”
“또 왜?”
“순서가 있다. 우선 선택권은 배치고사에서 1위에 랭크된 플레이어 이우성에게 주어진다.”
“하아.”
가만히 듣고 있던 우성의 입에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차피 랜덤인데 그럼 카드를 뽑기 전, 안현수가 뽑은 특전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을 했었다. 어차피 랜덤인데 뭔 순서가 또 정해져 있는 건지.
“담배 한 개비 줄 수 있나?”
“1포인트.”
“……꺼져.”
전에는 그냥 주더니 포인트 좀 벌었다고 바로 빼앗으려고 한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는 우성에게 안현수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 건넸다. 그러며 자신도 한 개비 물어 입에 물었다.
치직, 라이터를 키자 담배 끝이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의 담배에 불이 붙고, 길게 빨아들인다. 게임 설명에 나와 있는 담배의 효과처럼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우.”
“고민하는 자세, 훌륭하다. 다시 말하지만 특전은 이후 플레이어의 운명을 좌우할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래봤자 랜덤이지.”
시큰둥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오더의 충고에 우성의 고심은 더 깊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어떤 특전을 뽑느냐에 따라 이후 우성의 활동이 훨씬 편해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5분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느리게 피우던 담배도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손잡이정도밖에 남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우성이 물었다.
“특전을 먼저 선택할 권리를 안현수에게 넘길 순 없나?”
“가능하다.”
“그럼 그렇게 해 줘. 난 고민을 좀 더 하게.”
“승인한다. 물론 플레이어 안현수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나야 좋지.”
지루하던 차였는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안현수였다. 자리를 박차고 흩어져 있는 카드 앞으로 간 안현수는 그래도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성은 바닥에 떨어뜨린 담배를 습관처럼 발로 지지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과연 안현수는 어떤 특전을 뽑게 될까? 그리고 특전이라는 것들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안현수는 어차피 인생 한 방, 모르면 찍어야지를 떠올리며 한 카드 앞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찍을 거면 그냥 눈앞에 있는 거 아무거나 고르라고 하고 싶었지만, 안현수에게도 소중한 기회인만큼 신중하다고 욕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 걸어가 오른쪽 끝자락쯤에 위치한 카드를 고른 안현수가 카드에 손을 가져갔다. 매끈한 감촉이 느껴지는 카드의 뒷면을 만지며 안현수가 오더를 바라봤다.
“이걸로 하지.”
“아직 확인하지 않은 만큼 바꿀 기회는 있다. 물론, 나 역시 카드 속에 어떤 특전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고 하는 말이니 어디까지나 바꿀지 말지는 플레이어 안현수의 선택에 달려있다.”
“아니, 됐어. 난 꼭 예전부터 시험 답안도 고치면 틀리더라고. 이걸로 할래.”
강하게 고개를 젓는 안현수를 보니 어지간히도 바꾼 답안이 맞지 않았나 싶었다. 그의 생각이 확고한 만큼 오더 역시 카드를 열어 특전을 확인했다.
지이이잉-.
오더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안현수가 고른 카드가 울리며 뒷면으로 뒤집혔다. 우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카드의 앞면을 바라봤다. 카드의 앞면에는 ‘특전 A : [유니크(unique) - 용기사(Dragon Knight)]’라고 적혀있었다.
“오오! 직업이다! 그런데 용기사면… 창을 쓰는 직업인가?”
“훌륭한 선택이다. S등급부터 D등급까지의 특전 중, 플레이어 안현수는 A등급의 특전을 선택했다. 그리고 플레이어 안현수의 성향을 살펴본 바, 검에 대한 재능과 창에 대한 재능에는 차이가 없다. 모든 무기에 대한 재능이 고루 분포된 만큼 특별한 클래스의 직업에 맞춰 무기를 선택하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유니크 등급의 직업은 아포칼립스 내에서도 유일무이한 직업으로, 다른 직업들과 다른 특별함과 권한을 지닌다. 특전을 받아들이겠나?”
오더는 특전뿐만 아니라 플레이어의 성향과 재능에 맞춰 적절한 충고를 곁들였다.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역할을 플레이어를 이끌어주는 가이드에 맞춰 본다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안현수 역시 검에 크게 미련은 없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직업과 다른 레어보다 높은 등급의 유니크 클레스의 직업이라면 앞으로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특전을 받아들이지.”
“특전의 지급은 플레이어 이우성의 특전 선택 후로 미루지.”
재촉이라도 하듯 오더는 우성을 돌아봤다. A등급의 특전으로 유니크 등급의 직업을 얻은 만큼 앞으로 그는 더 강해질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 유니크 등급의 직업이 어느 정도로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특별한 직업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게 분명했다. 당장 아이템만 하더라도 여타 게임에서 일반 무기가 유니크 등급의 무기에 한참 떨어지니까.
안현수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덕분에 우성은 특전에 S등급부터 D등급까지 구분이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성이 선택할 특전이 S등급에 가까워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 하나 알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흐음…….”
“답답하게. 그냥 나처럼 찍어. 그러다 나처럼 하나 얻어 걸릴지 누가 알아?”
“그러다 D등급이 뜨면 어쩌라고? 그리고 네가 얻은 용기사라는 직업도 엄밀히 말해 나와 맞는 것도 아니야. 직업 클래스의 특전은 썩 달갑지 않아.”
“그 말대로, 플레이어 이우성의 재능과 능력은 ‘검(劍)’이라는 도구에 집중되어있다. 검과 관련된 직업이나 무기, 특성, 패시브를 얻지 않으면 효과가 반감 이하로 떨어진다. 특전의 등급과는 별계로 검과 관련된 특전을 뽑는 게 중요하다.”
‘들었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안현수를 한 번 돌아본 우성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찍어야 된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우성은 천천히 카드들 앞으로 걸어갔다. 겉으로 봐서는 다른 점 하나 없었고, 다르더라도 어떻게 다른 건지 알아볼 길이 없었다. 하나하나 찬찬히 카드들을 둘러본 우성의 손이 정 중앙의 카드에서 멈췄다.
“이걸로 하겠어.”
“번복할 생각 없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나 역시 어떤 특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없어.‘
번복한대도 고민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성 역시 안현수와 마찬가지로 한 번 고른 특전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알겠다. 그럼 특전을 확인하지.”
지이이잉-.
안현수가 특전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우성이 고른 카드는 강하게 떨더니 이내 반대로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