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사악-.
우성의 검이 처음으로 공격적으로 나섰다. 기습적으로 뻗어간 우성의 검은 안현수의 오른쪽 가슴을 얇게 베며 지나갔다.
“윽.”
“이제 슬슬 힘든가봐?”
이죽거리며 웃는 우성의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늘게 베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어딜. 이 정도 가지고.”
“허세는. 슬슬 호흡도 달리는 게 보이는데.”
“그거야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성이나 안현수나, 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나 우성은 체력 스텟 포인트가 무려 21포인트로 보통 사람의 두 배가 훌쩍 넘었다.
아마 안현수도 그에 크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성과 검을 나누며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현수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바로 우성의 플레이어 특성과 24포인트라는 어마어마한 정신력 스텟이었다.
싸움에 있어서 정신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적지 않았다. 특히나 체력적 소모가 큰 이런 장기전에서는 정신력의 우세가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뿐더러, 주먹이나 칼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된다. 안현수와 우성의 경우가 딱 그 꼴이었다. 한 마디로 지친 것이다.
하지만 높은 정신력 수치를 가지고 있는 우성은 지친 와중에도 평소와 비슷한 상태로 싸울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았지만, 적어도 줄을 놓지 않는 이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나야… 늘 한결같은 남자지.”
“큭. 이 상황에 농담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었네.”
“밤새서 입 터는 게 직업인데, 그럼. 말 놀리는 데는 자신 있지.”
“운동선수 아니었어?”
“아쉽게도. 그래도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고.”
운동이라고 해봤자 막노동, 근력이나 체력 운동 수준이었지만 그것도 나름 운동이라면 운동이었다. 특히 체력은 힘든 일을 하는 만큼 충분히 길러져 있었다. 정신력이야 왜 그렇게 높은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슬슬 끝이 보이는 것같은데.”
“그래. 저쪽도 끝난 것 같고, 우리도 이제 슬슬 끝낼 때 됐지.”
크어어어어-!
그 때 구울 한 마리가 수풀 사이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한 마리가 아니었다. 그 뒤쪽으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구울 무리가 먹이를 바라보듯 우성과 안현수, 혜미와 장미연을 노려봤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아직까지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지만 아마 곧 저것들은 먹이를 찾아 달려올 게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 우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것들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말이야.”
“시팔, 그건 그렇군. 차라리 네 검에 뒈지고 말지.”
안현수 역시 소름 돋는 건 마찬가지인 듯,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검을 든 손을 다시 오른손으로 바꿔 잡았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새롭게 시작해 봐야지?”
“허세 떨기는.”
“허세 떠는 건 너겠지. 왜, 내가 오른팔로 싸운다고 생각하니 겁나? 목소리가 떨리는데.”
그래. 사실이었다. 아무리 다쳤다고 해도 안현수가 원래의 팔로 검을 휘두르면 어떤 위력을 낼지 미지수인 만큼 살짝 두려운 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안현수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우성은 검을 쥔 손을 더욱 굳건히 하고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쓰읍. 후우우.”
우성이 숨을 크게 들이쉰 순간, 이미 안현수의 발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처음 시작과 마찬가지로 공방의 시작은 늘 안현수가 먼저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었다.
쉬익-, 쩡-!
서로가 달려드는 돌진이 충돌하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두 자루의 흑검(黑劍)이 부딪히며, 주황색의 불똥이 튀어 두 사람의 얼굴을 매만졌다.
생각지도 못한 반탄력에 안현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팔에 무리가 간 건 당연하고 손아귀에 들어온 반탄력도 상당했다. 조건은 같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우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무리하지 말고 이만 쉬어, 친구.”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우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검을 곧게 위로 올려 세운 우성이 그대로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정직한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검은 안현수의 머리를 반으로 쪼갤 듯 위협적이었다.
쩡-!
하지만 호락호락 당할 안현수는 아니었다. 높은 반사능력 스텟과 민첩 스텟으로 인해 안현수는 빠르게 검을 들어 우성의 검을 막아냈다.
물론 거기서 끝날 리 없었다. 우성의 검은 위에서 아래로, 횡으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찌르기로 안현수를 위협했다. 호기롭게 오른팔로 검을 들었던 안현수는 예상외의 반격에 쩔쩔매고 있었다.
“헉!”
우성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아 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긋자, 안현수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몸을 뒤로 굴렸다. 검은 허공을 베었지만 그만한 소기의 성과는 있는 셈이었다. 안현수의 자세를 무너뜨렸으니 말이다.
쉴 틈을 주지 않으며 우성은 곧장 바닥을 구른 안현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루하다. 끝내자.”
지루하다.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겁이 났다. 한 번 승기를 잡았지만, 언제 어떻게 결판이 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끝낼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아야 이길 수 있었다.
푸우욱-.
육질을 파고드는 섬뜩한 칼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어진 결과는 어느 한 쪽이 이겼다고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쓰읍…….”
“쿨럭!”
우성은 고통에 신음했고, 안현수는 피거품을 뱉었다. 이 차이만 보더라도 승패를 알 수 있었다.
왼쪽 가슴을 찌른 우성과는 달리, 안현수의 검은 한 번 다쳤던 우성의 왼쪽 옆구리를 다시 찌르는데 그쳤다. 애초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태인지라 검을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에로사항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팔… 졌…네.”
“그래. 내가 이겼다.”
다른 때 같으면 다 죽어가는 플레이어를 앞에 두고 검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성은 곧장 검을 휘두르지 않고 잠시 멈춰 새빨갛게 죽어가는 안현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냥… 그 때… 싸울…….”
“기껏 한다는 게 후회냐? 한심하긴.”
하긴, 이해는 갔다. 후회할 만 하니 하는 것이다.
만전의 상태로 싸웠다면 승패는 어찌될지 모르는 싸움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현수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익숙하지 않은 왼 손으로 싸웠음에도 이 정도 싸움을 보여준 것만 해도 그렇다.
하지만…….“
“이긴 놈이 이긴 거지.”
“그건… 그래.”
“잘 가라. 가능하면 웃는 얼굴로, ‘아포칼립스’에서 보자.”
푸욱-.
단단한 뼈를 꿰뚫고 뇌수에 검이 박힌다. 안현수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됐다가 초점을 잃으며 흐릿해졌다.
[띠링-! 172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긴 싸움으로 힘이 빠졌던 우성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메시지였다. 예상했던 바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포인트가 눈앞에 떠오르자 우성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기존 2750포인트에 더해 1725포인트. 이로서 합이 4475포인트. 이 정도면 꽤 만족할 만하다 싶었다.
“아아, 씁…….”
달콤한 승리에 취해있던 때, 안현수에게 찔린 상처가 우성을 괴롭혔다. 하필이면 원래부터 부상이 있던 곳을 또 찔려서 고통이 배가 되었다.
“더럽게 아프네.”
피가 줄줄 흐르는 왼쪽 허리를 감싸며 우성이 시선을 돌렸다. 싸우는 도중이라 주변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다른 쪽 싸움도 이미 끝난 후였다.
“호오?”
우성의 입에서 의외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혜미를 혼자 놔둬서 불안했는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안하긴 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고 무려 서 있기까지 했다.
즉, 우성과 안현수를 제외한 최종 승자는 그녀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쓰러져 있는 라정환과 고명균, 김상민을 보니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난전. 개판 싸움은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지.’
한 마디로 얻어 걸린 것이다. 혜미가 실력이 뛰어나 저들 모두를 쓰러뜨렸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피식 흐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안현수를 쓰러뜨렸더니 결국 최종 보스는 그동안 함께 다녔던 혜미라는 소리였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끄응.”
힘겹게 몸을 움직이는 우성은 한 눈에 보기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두 번 당한 상처에는 <불굴의 의지>특성도 소용이 없는지 지혈은 전혀 되지 않았고, 뻘뻘 흘리는 식은땀은 그가 얼마나 지치고 고통스러운지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우스웠던 혜미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이야. 몸 상태가 좋지 않긴 한 모양이었다.
“그만……. 움직이지 마.”
혜미는 천천히 다가오는 우성을 보며 손을 저었다. 점차 흐릿해지는 시야를 눈으로 비비면서도 우성은 멈추지 않았다. 들리는 소리나 몸짓으로는 그녀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 때, 혜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잠시 아래로 내렸던 자신의 쌍단검을 다시 위로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우성에게서 몸을 돌려 장미연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언니… 미안해요.”
쉬익-.
푹-.
몸을 돌린 혜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장미연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우성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장미연은 혜미의 기습으로부터 저항하고자 몸을 일으켰지만, 다친 왼쪽 다리가 발목을 잡았다.
혜미의 단검은 장미연의 목을 관통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컥컥 끊기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눈을 까뒤집으며 고통스러워하던 장미연은 혜미가 단검을 손에서 놓는 것을 기점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눈앞에 떠오른 어마어마한 포인트에도 불구하고 혜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우성의 눈썹이 기역(ㄱ)자로 꺾였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그 모습이 어쩐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시발.”
카악, 퉷.
입 안에 고인 물을 뱉어내자 침이 아닌 새빨간 피가 뱉어졌다.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성은 자신의 눈도 함께 붉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혜미를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눈, 전에도 봤지만 진짜 소름 돋아.”
혜미는 처음 만난 이래 두 번째로 우성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 당시에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였던 위협용 검이었지만, 이제는 몇 명의 플레이어의 목숨을 앗아간 만큼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는 우성과 김정원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 당시 우성의 눈은 평소 그의 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살기를 띠고 있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할지언정 가끔식은 부드러운 모습이나 재치있는 모습도 보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혜미는 그런 우성의 모습이 무서웠다. 지치고 다쳐 있지만 그래도 무서웠다. 저 눈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혹한기의 차디찬 한파를 마주하는 것처럼 온 몸이 떨렸다.
“그래도…….”
혜미의 발걸음이 우성에게로 향했다. 그와 똑같이 별로 빠르지 않게, 산보라도 하듯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한 손으로는 상처를 누르고, 한 손으로는 혜미를 겨누며 우성은 어지러운 몸을 이끌었다. 아무리 상처를 누른다 해도 흐르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빠, 그래도 꽤 좋은 사람이잖아?”
띠딩-.
혜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이 끝자락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애써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양 팔을 활짝 벌렸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