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익숙한 이름에 우성은 깜짝 놀랐다. 보통 플레이어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자신의 바로 위에 있는 안현수일 줄이야.
‘하긴, 이상할 것도 없지.’
원숭이들을 학살하던 안현수의 모습은 그만큼 대단했다. 어디서 검을 배우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기본적인 움직임이 어디서 운동을 하던 티가 났다.
랭킹 1위. 안현수를 바라보는 우성의 눈이 바다처럼 깊고 신중해졌다. 눈앞의 플레이어만 잡을 수 있다면, 우성은 명실부실 이번 배치고사에서 1위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성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안현수는 계속해서 자신의 소개를 이어갔다.
“나이는 스물여섯. 뭐, 나이가지고 유세 떨 생각은 없고. 지금 당장 네 나이가 많다고 형이라 불러줄 생각도 없어.”
“걱정 마. 나도 스물여섯이니까. 이름은 이우성이다.”
“이우성? 호오, 역시. 보통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안현수 역시 바로 자신의 아래에 위치해 있는 우성을 만나자 큰 관심을 보였다. 비록 1위라는 위치에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언제 뒤집어질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의 차이는 간소했다.
랭킹 1위와 2위. 비록 정식으로 게임이 들어가기 전, 배치고사 단계일 뿐이었지만 가장 높은 랭킹에 위치한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연이 아닌 인연이라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안현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우성에게 있어서 안현수는 이번 배치고사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쓰러뜨려야 할 잠정적 ‘적’일 뿐이었다.
“아, 이쪽 아가씨는?”
“아, 난 박혜미. 나이는… 스물 넷.”
혜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그 이유는 금방 우성의 반응에서 볼 수 있었다.
“……너 나랑 동갑 아니었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그런데 왜 반말이지?”
“그거야… 에이씨, 그래서 뭐? 지금부터라도 꼬박꼬박 존댓말이라도 해 드릴까요?”
어색한 말투에 우성은 팔뚝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냥 오빠라고만 해.”
“네네, 오빠.”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우성의 모습을 보며 안현수의 입가를 타고 웃음이 흘러 나왔다.
“사이 좋아 보이네. 원래부터 알던 사이?”
“아니.”
동시에 대답하는 둘을 보며 안현수는 더욱 크게 웃었다.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로 가득한 이곳에서 참으로 오래간만의 느낌이었다. 우성과 혜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뭘 그리 웃어?”
“두 사람이 보기 좋아서. 아, 그나저나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군. 김정원 그 새끼는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야.”
김정원의 이름을 입에 담는 안현수의 눈매에 한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감돌았다. 아무래도 김정원과 안현수,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김정원을 알아?”
“반 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마. 내 동생을 강간하고, 죽인 개 시팔 새끼. 그리고 내가 감방에 집어넣은 놈이지.”
으득-.
한자 한자, 씹어 내뱉듯 말하는 안현수의 표정은 섬뜩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다시금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듯 그의 어금니에서는 으드득 소리가 한동안 지속됐다.
“그 개새끼를 내 손으로 못 죽인 게 한이야. 그 때 총으로 쏴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다행이야. 이런 곳에서라도 죽일 기회가 생겼으니.”
아무래도 꽤 깊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김정원이 안현수의 동생을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말에서 혜미는 깜짝 놀라 입을 가릴 정도였다.
“현실에서 경찰이었나?”
“어디 경찰서인지는 말 못해주겠고, 경찰 형사과 김정원 연쇄살인사건 담당 형사였다. 뭐, 이 정도만으로도 대충 지역은 알 수 있겠지만.”
“그렇군. 내가 김정원을 죽여서 아쉽나?”
“아니. 꼭 내 손으로 죽일 필요는 없어. 그 새끼가 죽었다는 게, 그리고 앞으로도 죽일 기회가 있다는 게 중요하지. 오히려 고맙다. 김정원, 그 새끼를 죽여줘서.”
안현수의 눈을 본 우성은 그의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김정원을 증오하고 있었고, 김정원을 죽인 우성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형사과 소속이라니 원숭이들을 죽이며 보여준 그의 움직임이 이해가 갔다. 실전에서 범인을 잡는 만큼 운동신경이 보통이 아닐 것임은 당연했다. 단순한 운동이 아닌, 흉기를 들고 있는 범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반사능력 역시 뛰어날 터. 지금껏 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조금만 있으면 슬슬 오두막의 전투불능 지역이 풀릴 시간이었다. 그 때까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안현수와 싸울지, 말지를.
‘일단은…….’
“배치고사 마지막 날까지는 되도록 휴전했으면 좋겠군.”
우성은 손을 내밀었다. 만약 안현수를 혜미처럼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이만한 동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성은 안현수를 혜미처럼 동료로 받아들이기가 썩 달갑지 않았다. 허술한 면이 있는 혜미와는 달리 그는 어딘가 위험한 느낌이 풍겼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성이라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원숭이들과 싸우면서 보여준 안현수의 움직임은 그 정도였다.
그렇기에 휴전을 신청한 것이다. 싸우자는 여지를 남겨 두면서, 동료가 아닌 적으로 못을 박아두는. 우성이 생각하는 안현수와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였다.
“휴전이라. 하긴, 언젠가 싸워야 되긴 하지.”
그 역시 배치고사 5일이 지나면 두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남아있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역시도 지금 당장 우성과 싸우는 게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그 순간, 안현수의 눈에 상처입은 우성의 왼쪽 옆구리가 들어왔다. 왼쪽의 상처는 방금 전 싸움에서 무리한 탓에 조금 벌어져 있었다. 이 정도 상처를 가지고도 그런 싸움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 한 편,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틀 뒤라…….’
어느덧 배치고사는 사흘째에 들어서고 있었다. 첫날에는 5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어 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또 그렇게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성은 위험한 존재였다. 우성이 안현수를 위험하다고 느끼는 만큼, 안현수 역시 우성의 존재를 위험분자로 인식했다.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을 막아내는 우성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상처 입은 맹수는 더 이상 같은 맹수의 상대가 아니었다. 가늘어진 안현수의 눈빛이 우성의 눈과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 순간, 안현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도록 하지.”
고민하고, 갈등하던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처음의 사람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혜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군.”
“김정원을 죽여준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찌 보면 넌 내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의 속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성의 눈을 마주한 순간, 맹수는 아직까지 맹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옆에는 아직 혜미라는 변수가 끼어 있었다.
‘시기상조(時機尙早). 시간은 많으니까…….’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안현수는 우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틀 뒤 이 오두막에서 보자고.”
그런 계산이었던 건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틀 뒤라면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 그 때라면 혜미라고 해서 아군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플레이어는 한 명뿐이니까.
2:1의 상황이 1:1:1로 바뀌는 순간. 안현수는 그 순간을 우성과 싸우는 날로 정했다. 우성의 머릿속에 어쩌면 지금 당장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 역시도 시기상조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안현수의 손을 맞잡는 것으로 휴전과 약속이 동시에 정해졌다. 안현수는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세 번 흔들고는 다시 놓았다.
“그럼, 그 때 보자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안현수를 보며 우성은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이틀 뒤가 걱정이었다.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안현수와 헤어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오두막은 다시금 전투 가능 지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차피 싸울 상대도 없었고, 우성과 혜미는 미련 없이 오두막을 나섰다.
**
[띠링-! 배치고사의 4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프 구울이 수면 상태에 빠집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수는 총 14명입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 전원에게 2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축하합니다.]
나흘째 아침이 밝았다. 우성과 혜미는 퀭한 눈으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목이 반쯤 떨어져 덜렁거리는 플레이어와 팔이 잘려나가거나 배가 꿰뚫린 플레이어들. 모두 우성과 혜미에게 죽은 플레이어들이었다.
우성은 안현수와의 싸움을 대비해 몸을 추스르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방심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습격하려 했는데, 새벽에 반대로 습격을 당했다.
다행히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던 중, <심연>특성을 가지고 있는 혜미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발견했다. 그 덕분에 늦지 않게 준비할 수 있었고, 세 명의 플레이어들의 습격을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 명의 플레이어들을 처치하고, 나흘째 아침이 밝자 남은 플레이어들의 수는 총 14명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지급된 200포인트. 이번에 습격한 플레이어 중 2명을 우성이 처리하고, 1명은 혜미가 숨통을 끊었다. 이로서 우성은 총 2250포인트를 보유하게 되었다.
배치고사가 진행될수록 새로 만나는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많은 양의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방금 전 만난 플레이어는 600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었는지, 죽을 때 300포인트를 헌납하고 말았다.
“……힘들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혜미가 중얼거렸다. 씩씩하던 그녀의 눈이 그렁거렸다. 일분일초가 숨 막히는 긴장의 연속이었고, 사람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졌다. 정신력 강한 우성도 지치는 마당에, 연약한 그녀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답은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이곳을 버틸 방법이란 없었다. 긴장의 끈을 붙들고 있는 날카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찌르는데 망설이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배치고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 갈수록 혜미의 정신은 점점 망가져갔다. 한 시라도 빨리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앞에 불구덩이가 있다면 뛰어들어, 동생인 혜정의 얼굴을 보며 펑펑 울고 싶었다.
우성 역시 크게 다르지만은 않았다. 그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고, 어서 빨리 현실로 돌아가 서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딸아이의 힘내라는 한 마디면 지친 몸에 날개가 생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혜미와 우성의 다른 점은 여기에 있었다. 혜정이를 비롯해 돌아갈 곳이 있는 혜미와는 달리, 우성의 딸 서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포인트를 모아, 서현이의 병을 고쳐야 한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으며, 우성이 지친 혜미를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