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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22화 (22/258)

22화

서걱-.

육질을 베는 섬뜩한 소리가 우성과 혜미의 귓가를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직후 원숭이들의 비명소리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누군가 검으로 원숭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구지?’

원숭이들을 베어내는 소리는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한 사람의 지원으로 여유가 생긴 우성은 눈앞을 가로막는 원숭이들을 보다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아무튼 범상치 않은 실력자임은 확실했다. 우성과 혜미와는 달리, 그는 사방이 훤히 뚫려있는 곳에서 원숭이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빠른 속도로 원숭이들을 베어내고 있는 것을 보면, 앞서 상대했던 어중간한 플레이어들과는 차원이 다를 게 분명했다.

끼이익-!

원숭이 다섯쯤을 베어냈을 때, 남아있는 원숭이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 판단했는지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제 도망친 한 명의 플레이어와 겹쳐보여, 이런 걸 보면 원숭이들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눈앞을 가로막은 원숭이들이 사라지자 우성은 자신들을 도와준 플레이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우성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는 플레이어였는데, 훤칠한 얼굴과 눈앞의 원숭이 하나를 단숨에 베어버리는 모습이 크게 인상적이었다.

‘대단하군.’

이미 대부분의 원숭이들은 도망가고 없지만 아직 두 마리 정도가 남아있었다. 미끼인지, 아니면 동료를 잃은 분노를 못 이겨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들은 각각 한 마리씩 우성과 다른 플레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읍.”

달려드는 원숭이를 보며 우성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꽤 오래 전이었지만 검도를 배웠던 기억을 되새겼다. 검(劍)이라는 도구를 휘두를 때, 가장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공격. 바로 내려치기였다.

쉬익-.

끼이이이익-!

직선으로 곧장 달려오던 원숭이는 우성의 내려치기에 머리가 박살나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원숭이들은 어지간한 상처를 입어도 다시 달려들었지만 머리를 잃고도 움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순식간에 한 명의 원숭이를 쓰러뜨린 우성은 다른 플레이어를 지켜봤다. 그는 우성과는 달리 꽤나 유려하게 검을 휘둘렀다. 꽤나 솜씨는 있어 보였지만 검을 배우는 티는 나지 않았다.

서걱-.

순식간에 달려오는 원숭이 한 마리의 목을 베어낸 플레이어는 남아 있는 원숭이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긴 숨을 내쉬었다.

열 마리가 훌쩍 넘는 원숭이들. 게다가 한 놈, 한 놈이 어지간한 성인 남성 이상 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손에 무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놈들을 상대로 살아남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뜻깊은 일이었다.

우성은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강하다.’

꽤 이전부터 생각해 오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일용직 노동자에, 클럽 나이트에서 일하는 웨이터에 불과했던 우성은 선뜻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비록 오래 전에 꽤 깊은 수준으로 검도를 배웠다곤 하지만 그거야 말 그대로 오래 전 일. 게다가 검도와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하지만 검도를 배웠다는 사실이 우성에게 큰 힘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검에 힘을 실을 수 있는 방법이나 검을 다루는데 어색함이 덜하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한 발자국 정도 앞서나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오더는 그에게 A클레스라는 꽤 높은 등급을 매겼다. 이미 열 명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우성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수십의 괴물 원숭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우성은 눈앞에 있는 플레이어를 보며 눈에 보이지 않게 침을 삼켰다. 그는 원숭이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를 잔뜩 묻히고 등장했던 연쇄살인범 김정원을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플레이어는 우성과 혜미를 발견했는지 사람좋은 미소를 띠우며 다가왔다.

“둘 다 괜찮나?”

가면일까? 우성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그가 다가오기 전, 검을 살짝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거 너무 빡빡한데. 그래도 그쪽 목숨 구해준 은인인데 말이야. 아, 나 아니었어도 괜찮았으려나?”

플레이어는 우성과 혜미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원숭이들의 시체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그 역시 꽤 많은 원숭이들을 쓰러뜨렸지만, 우성과 혜미가 쓰러뜨린 원숭이들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너무 가까이는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 그럼…….”

말끝을 흐리던 플레이어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대충 매달았다. 명백히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인 후, 그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이럼 어때?”

“……싸울 생각만 없다면야.”

우성 역시 들어 올렸던 검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플레이어처럼 검을 허리에 매달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도 우성은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우성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혜미가 가장 먼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고, 우성의 몸짓에 플레이어는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오두막으로 첫 걸음을 내딛은 플레이어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띠링-! 위험한 쉼터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플레이어끼리의 싸움이 금지됩니다.]

[장시간 거주하기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

신기하다는 듯 오두막을 둘러보던 플레이어는 거실 안의 참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배치고사의 하루가 지나며 플레이어들의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싸우며 흘렸던 피가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았다. 벽과 바닥에 가득 뿌려져 있는 피는 한 사람이 흘린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대체 몇 명이 죽은 거지?”

사근사근했던 플레이어의 음성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전투불능 지역이라는 사실이 다행일 정도로, 그의 표정은 당장 검을 빼들어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다.

아무래도 싸움을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 자체에 썩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죽은 플레이어는 여덟 명. 아마 안쪽 방에서 죽은 놈들이 더 있을 거다.”

“많이도 죽었군. 네가 다 죽였나?”

“내가 죽이기도 했고, 다른 놈도 있었어.”

“다른 놈?”

“김정원. 혹시 기억하나? 연쇄살인범이라던데.”

우성의 대답에 플레이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나 놀란 표정이었는데, 아무래도 김정원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김정원… 그놈은 어떻게 됐지?”

“죽였다.”

“네가?”

“그놈뿐만 아니라, 여기 있던 놈들 대부분.”

싸늘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둘을 보며 혜미는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에 안절부절 둘을 번갈아봤다. 금방이라도 검을 빼들어 싸워도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였다. 설상가상, 이제 슬슬 12시간이 지나 오두막이 전투가능지역으로 바뀔 시간이었다.

플레이어는 주섬주섬 품 안을 뒤졌다. 원숭이들에게 긁혀 찢어진 옷 안에서 익숙한 물건이 꺼내져 나왔다. 바로 ‘담배’와 ‘라이터’였다.

“한 대 피겠어?”

“이건 어디서 났지?”

“신기하지? 나도 그랬어. 하프 구울이라는 놈을 죽였더니, 그 놈이 떨어뜨리더군. 시팔, 이것도 게임이라고… 몬스터를 죽이니 아이템을 다 주더라니까.”

하프 구울. 우성 역시 몇 놈 잡았던 녀석들이었다. 그 때는 경험치 포인트를 주고 끝이었는데, 아무래도 확률은 낮지만 아이템도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아이템이 담배라니. 하긴, 사람에서 구울이 되어가던 녀석이었으니 생전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아이템으로 떨어뜨리는 것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치이익-.

담배 곽에서 한 개비를 꺼내 우성에게 건넨 플레이어는 담배를 입에 살짝 물더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우성 역시 플레이어에게서 라이터를 받아들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불태웠다.

후우-.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던 뽀얀 연기를 뱉어내며 우성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혜미는 거북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두 걸음 떨어졌다.

“맛 좋군.”

“골촌가 보군.”

“하루 한 개비. 한 달에 한 갑 반. 담배를 피우긴 하지만 골초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특이하네.”

그는 담배를 길게 빨았다. 담배를 아예 피우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피우는 한 절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중독되면 될수록 계속 생각나는 마약 같은 존재가 바로 담배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하루에 반 갑 정도를 피운다. 조금 많이 피우는 사람은 한 갑, 지나치면 두 갑씩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두 개비는 사치니까.”

“이제 보니 짠돌이였군.”

“그래 보이나? 큭.”

우성은 버릇처럼 담배를 아주 천천히 피웠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 번 있는 이 시간이 아까워서 느릿하게 피웠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한층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라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담배 연개를 뱉어내는 우성을 보며 플레이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쁜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그렇게 보이나?”

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잠시 생각했다. 스스로 자신이 악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질문에 선뜩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심장을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느낌. 아무래도 아직 양심이라는 게 남아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봤다면 한참 잘 못 봤네. 나 이런 사람이야. 사람 하나 둘, 죽이는데 아무렇지 않은.”

“여긴 현실이 아니지. 게임, 빌어먹을 정도로 현실적인 게임이지.”

“…….”

“내가 보기에 넌, 현실에서 사람을 죽일 위인은 못 돼.”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못 죽이는 게 아니라 안 죽이는 거다. 죽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이곳에선 죽일 이유가 있는 건가? 소원 하나를 빌기 위해서?”

우성은 침묵으로 긍정의 표시를 대신했다. 이곳에서 소원이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오더의 설명대로라면 충분한 포인트만 있다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이든, 죽을 사람을 살리는 것이든 불가능 한 게 없다고 했다. 포인트를 모은다. 이 배치고사에서 그것은 곧 다른 플레이어들의 죽음, 곧 살인(殺人)을 뜻했다.

대부분 자기 욕심을 위해 포인트를 모으고 타인을 죽이는 보통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우성에게선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애절함. 절심함. 욕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어들이 우성을 보면 떠올랐다. 그 때문일까? 플레이어는 우성을 보며 꽤 흥미를 느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빙긋 웃으며 손을 건넸다.

“이거 통명성도 못했군. 내 이름은 안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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