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우성은 처음 맡아보는 진득한 피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에도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옅은 비린내를 맡긴 했지만, 이번처럼 진한 냄새는 처음이었다.
오두막의 거실 안은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뿌린 피가 가득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플레이어를 처리한 우성은 지친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몸을 앉혔다.
소파 하나가 놓여져 있는 거실의 가장자리에 앉은 우성은 왼쪽 옆구리의 상처부위를 손으로 만졌다. 괜찮을 거라 생각은 안했는데, 역시나 상처부위가 벌어졌는지 꽤 많은 양의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
손에 묻은 진득한 피를 벽에 대충 발라내며 우성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지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혜미 역시도 다친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파.”
“그럼, 칼에 찔렸는데 안 아프겠어?”
“넌 안 아파?”
“아프지. 아파 죽겠다.”
맷집이나 체력, 그리고 새로운 특성 덕분에 상처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뿐, 우성의 상처는 사실 심각한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 만큼. 하지만 게임은 게임인지 우성은 그만한 상처를 입고서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상처를 입긴 했지만 우성은 만족했다. 김정원을 죽여 얻은 475포인트는 물론이고, 다른 플레이어들을 죽여 얻은 포인트도 상당했다.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를 포함해 혜미가 죽인 플레이어의 수는 총 둘이었다. 거기에 도망친 플레이어가 하나, 남은 플레이어는 모두 우성의 손에 죽었다.
5명의 플레이어와 김정원. 우성은 이들을 죽이고 850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곳 한 자리에서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얻어낸 포인트였다.
우성과 혜미는 위험한 오두막에 조금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올 만한 플레이어는 거의 왔다가 죽거나 도망간 상태였고, 이곳만한 쉼터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밖으로 나가 다른 플레이어를 마주치기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머무는 게 훨씬 안전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오두막 한쪽에 모아져 있던 과일들을 먹으며 허기를 달랜 후, 우성과 혜미는 상처를 돌봤다. 혜미는 상처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고 우성은 <불굴의 의지>특성 덕분에 지혈되는 속도가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돌보며 시간을 보내자, 해가 질 때 쯤 다시금 메시지가 떠올랐다.
[위험한 쉼터가 생성된 지 24시간이 경과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위험한 쉼터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의 싸움이 금지됩니다.]
긴장의 끈을 붙잡고 있던 우성과 혜미를 풀어지게 만든 메시지였다. 많은 양의 피를 흘렸던 두 사람은 전투금지 메시지가 뜨자마자 각자 곯아 떨어졌다.
핏자국과 피비린내로 가득한 거실 안에서 잠이 든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를 흘리고 싸움을 끝낸 뒤의 피곤함에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어젯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피를 흘려 피곤했기 때문일까? 12시간이라는 안전한 시간이 있음에도 우성과 혜미는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윽.”
소파에서 막 몸을 일으킨 우성은 왼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지혈이 끝났는지 피는 멈췄지만, 통증 자체는 어제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 그쳤다는 건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현실에서 칼에 찔렸다면 당장에 입원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칼에 찔리고도 다른 플레이어들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이곳이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처 역시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었다. 아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움직인다고 상처가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처입은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힘든 정도였다.
혜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칼에 베였던 옆구리 쪽이 신경 쓰이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대단하다 싶었다.
[띠링-! 배치고사의 3일째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프 구울이 수면 상태에 빠집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수는 총 46명입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 전원에게 1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축하합니다.]
어제 아침과 같은 메시지 창이었지만 달라진 점은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는 것. 137명이었던 생존자가 46명으로, 거의 1/3정도로 줄어있었다.
게다가 지급되는 포인트가 늘어났다. 그 전날에는 50포인트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 두 배인 100포인트로 늘어났다. 아무래도 하루차가 지나갈 때마다 획득하는 포인트가 늘어나는 것 같았는데, 그 비율이 2배인지 50포인트씩 늘어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랭킹.”
[플레이어 랭킹(배치고사)]
1위 : 안현수
2위 : 이우성
3위 : 라정환
……
27위 : 박혜미
다시금 랭킹을 확인해 보자, 2위였던 김정원이 사라지고 우성이 2위로 올라가 있었다. 김정원이 사라진 것까지는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자신이 1위가 아니라는데 우성은 깜짝 놀랐다.
‘대체 이 녀석은 뭐지?’
하루 사이 우성은 김정원과 다수의 플레이어들을 죽이고 지금은 근 1500포인트에 가까운 포인트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심 자신이 1위가 아닐까 했는데 아직까지도 안현수는 굳건히 1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3위였던 박현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제 랭킹에서 우성과 같은 3위였다면 공동 3위로 같은 양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는데, 아무래도 안현수의 손에 죽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까지도 안현수가 1위를 유지하고 있나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혜미 역시 준수한 성적이라 할 수 있었다. 46명중 27위라면 낮다고 볼 수 있지만, 처음 배치고사의 시작은 300명이었다. 그들 중 27위라면 충분히 상위에 랭크된 플레이어라 생각할 만했다.
안현수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우성은 이 정도에서 욕심을 접기로 했다. 어차피 배치고사가 끝나기 전엔 언젠가 마주칠 것이다. 안현수가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이 1위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가자.”
사과 하나를 한 손에 집어 들며 우성이 혜미를 재촉했다. 그녀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잠시 오물거렸으나, 이내 군 말없이 우성을 따라 일어났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한 번 바라본 우성은 마지막 남은 사과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게임이라곤 하지만 이곳에서 역시 배고픔은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포만감’이라는 시스템이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식사 치고는 부실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허기는 달랠 수 있었다. 문득 오두막을 발견하지 않았으면 식사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생각과 누가 이 오두막과 사과를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게임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궁금증과 같은 것이라 우성은 잠시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접어두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포만감을 채우기 위해선 ‘조금씩’, ‘천천히’ 먹으라는 이야기가 떠올라 우성은 사과를 야금야금 베어 먹었다.
덜컥, 오두막의 문을 열자 우성과 혜미는 눈앞에 벌어져 있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은 아직까지 피가 묻어있는 무기를 부여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이것들은?”
깜짝 놀란 혜미가 말을 더듬으며 눈앞에 나타난 원숭이들을 향해 단검을 겨눴다.
오두막을 동그랗게 둘러싼 원숭이들의 주위에는 플레이어로 추정되는 사체의 일부들이 이리저리 찢겨져 있었다. 원숭이들 입가의 연갈색 털에는 붉은색 피가 잔뜩 묻어있었는데, 아무래도 인육(人肉)을 먹는 모양이었다.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원숭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거의 성인 남성만한 크기의 원숭이들이었는데, 그렇다고 고릴라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인육을 먹는 원숭이. 게다가 그 수는 열은 훌쩍 넘어보였다. 오두막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모양에서 우성은 위험한 쉼터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집을 빼앗겼다고 화내는 건가?”
“이것들도 몬스터야?”
“그럼, 보통 원숭이로 보여?”
생긴 건 멀쩡하지만 덩치나 식인을 한다는 점에서나 보통 원숭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체 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것이다.
‘이 몸으로 괜찮을까?’
우성과 혜미를 경계하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는 원숭이들을 보며 우성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한 눈에 보기에도 원숭이들은 하프 구울들과는 달리 날렵해 보였다.
끼익, 끼기긱-!
우성과 혜미를 노려보던 원숭이들은 두 사람에게서 피 냄새를 맡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원숭이들은 이빨뿐만이 아니라 손톱 역시 비정상적으로 길었는데, 그걸 본 우성은 원숭이들은 몬스터로 완전히 규정지었다.
“젠장! 일단 죽여!”
“어, 어떻게?”
우성은 대답보다는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두막의 입구는 사람 두어명이 어깨를 부딪치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았는데, 이대로 둘러싸이는 것보다는 좁은 지형을 이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는 우성과 혜미를 본 원숭이들이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어느 정도 지성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방금 전 플레이어들을 도륙했던 기억을 되살리고는 우성과 혜미를 향해 용감이 달려들었다.
끼리릭-!
푸욱-.
우성은 달려드는 원숭이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원숭이의 어깨가 꿰뚫렸다. 머리를 노린 공격이었는데, 어찌나 재빠르던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끼에에에엑-!
한 마리의 원숭이가 찔려 비명을 지르자, 뒤쪽의 다른 원숭이가 우성을 향해 팔을 뻗었다. 5cm정도 되는 길이의 날카로운 손톱이 우성의 볼을 긁고 지나갔다.
“이 빌어먹을 원숭이가?”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우성이 원숭이를 찔렀던 검을 뽑았다. 사람의 피와는 조금 다른, 검은색에 가까운 피가 검에 묻어 나왔다. 애초에 검은색을 띄고 있는 검이었지만 이렇게 잔뜩 피가 묻으니 겉모습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혜미 역시 우성을 도와 원숭이들을 향해 두 자루의 단검을 휘둘렀다. 검도를 배워 검이라는 도구에 익숙한 우성과는 달리, 단검에 생소한 그녀는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하나보다는 둘이라고 두 사람이 마주 설 수 있는 폭의 공간에서 그녀의 도움은 꽤 도움이 되었다.
‘이대론 곤란한데…….’
원숭이들을 상대하는 우성은 난감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우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대로는 혜미의 체력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혜미가 빠져버리자니 우성 혼자서 입구를 지키기란 불가능했다.
교대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막 떠오를 때쯤이었다.
끼이이이익-!
눈앞을 가린 원숭이들로 인해 보이진 않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원숭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검으로 무언가를 베는 듯한 섬뜩한 소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