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플레이어-20화 (20/258)

20화

꼭 김정원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혜미는 슬슬 몸을 떨었다. 피를 꽤 흘려서인지 맑았던 눈은 끈적끈적한 살기 띈 기분나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 몸으로 괜찮겠어?”

비단 눈뿐만이 아니라 우성의 몸상태는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몸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자잘한 상처는 그렇다 치더라도 왼쪽 옆구리의 상처에서는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경 꺼.”

“동맹이라며? 당연히 신경 써야 되는 거 아니야?”

당차게 나오는 그녀를 우성이 잠시 노려봤다. 번들거리는 살기어린 눈빛에 잠시 주춤했던 그녀였지만 이내 눈을 크게 뜨고 마주 노려봤다.

“아직은… 괜찮아.”

“그래?”

혜미는 움츠러들어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우성과 김정원의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단검을 이용해 쓰러져 있는 김정원의 옷을 찢어낸 혜미는 상처가 난 우성의 허리에 옷을 둘렀다. 매듭을 지어 꽉 묶어내자, 지혈 비슷하게 할 수 있었다.

조잡하게나마 응급처치를 한 덕분일까? 피가 흐르는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점차 지혈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불굴의 의지>의 효과가 다시 한 번 드러난 모양이었다.

우성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가? 상처 입은 맹수라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플레이어들은 각자 무기를 손에 쥔 채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도주로는 우리 뒤야. 겁먹을 필요 없어.”

“……그 몸으로 잘도 도망치겠다.”

한숨은 나오는 상황이지만 설득한다고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다가오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여섯. 우성과 혜미가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우성을 적으로 인식하고 잠정적 동맹을 맺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완전한 동맹이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공공의 적인 우성을 쓰러뜨리기 위한,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개념일 뿐이다.

“이제야 겁대가리들이 좀 사라졌나 보지?”

한쪽 손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허리를 꾹 누르며 우성이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에는 어느새 김정원의 것처럼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덤벼 봐, 송사리들아. 적어도 니들 중 두 놈 이상은 데리고 갈 자신 있어.”

그 연쇄살인마 김정원을 쓰러뜨린 우성의 장담이었다. 그저 흘려듣기엔 우성이 내뱉은 호언장담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우성을 상처를 입었고, 수적 우세를 믿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목숨이었다. 이 자리에서 우성을 죽이고, 오두막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모두가 동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시 서로가 먼저 덤벼들기를 원했다. ‘나만 아니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 그들의 동맹은 반쯤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금 겁먹은 플레이어들을 보는 우성의 입매가 히죽 벌어졌다.

“이익!”

“거기 발끈한 너. 좆같으면 덤벼. 왜, 다 죽어가는 새끼 상대하기가 그리 무서워?”

그래도 반응이 없자, 비웃음을 지으며 우성이 툭 내뱉었다.

“병신새끼.”

“으아아아!”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건가? 조롱을 들은 플레이어는 검을 들고 우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직선으로 곱게 휘둘러온 검은 막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쨍-!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아주 잠시 소강에 빠졌다. 플레이어는 우성이 부상을 당한 덕분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푸욱-.

“어억!”

살갗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플레이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을 찔린 그는 죽기 전, 겨우 고개와 시선을 돌려 혜미의 얼굴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잘했어.”

“……고맙다.”

혜미를 신경 쓰지 않은 게 플레이어의 불찰이었다. 우성은 플레이어를 도발하면서 함께 그녀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어제부터 각오를 다졌던 그녀는 결국 뒤에서 플레이어의 목을 찌를 수 있었다.

숨통이 끊겨 바닥에 엎어진 플레이어를 보며 혜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나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처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거북함은 남아 있지만 어제처럼 충격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제 다섯 놈 남았네.”

의도적으로 잔뜩 내리깐 목소리에 플레이어들은 반대로 반발했다. 방금 전, 플레이어 한 명의 죽음을 통해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힘을 합치자.”

“그, 그래. 당연하지.”

“저 건방진 새끼를 이대로 두고 볼 거야? 으득.”

꽤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진 우성의 도발에 플레이어들은 꽤 화가 나 있었다. 플레이어 이전에 그들은 한 명의 남자였고, 다섯이나 되는 쪽수로 한 명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존심에 금을 긋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성만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배치고사에 들어서기 전 지급받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아직까지 써 본 적은 없지만 무기를 휘두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적 우위를 생각하자 그들은 다시금 힘을 낼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누가 먼저 달려드냐였다.

“다구리라? 좋은 방법이야. 송사리 새끼들이 실력이 안 되면 쪽수라도 믿어야지.”

“닥쳐! 계집애 뒤에 숨은 새끼가 어디서 허세야?”

“그러는 사내새끼 넷 뒤에 숨은 넌 어느 집 애새끼냐?”

“이런 시발새끼가!”

거칠게 욕은 하면서도 그는 방금 전 플레이어와 같이 달려들거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우성과의 거리를 조금 좁히는 선택을 내렸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검이 닿지 않는 거리이면서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 한 명의 플레이어가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자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우성과 혜미와의 거리를 좁혀왔다.

생각 외로 플레이어 한 명이 똑똑한 판단을 내리자 우성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방금 전처럼 달려들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우성은 왼쪽 어깨를 한 번 빙글 돌렸다. 왼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정도는 참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굴의 의지>의 특성 효과와 그 덕분에 올라간 15포인트의 맷집과 21포인트의 체력, 그리고 24포인트의 정신력이 조화를 이룬 결과였다.

‘좋아.’

우성은 도박을 결정했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보이지 않게끔 옆으로 혜미를 툭 건드렸다. 두 사람의 눈이 교차하며 무언의 약속을 맺었다.

“야, 거기 송사리.”

“……나 말이냐?”

“하나같이 다 송사리들이지만, 네가 제일 작은 송사리 같아 보여서 말이지.”

다시 이어진 도발에 그는 잠시 울컥했으나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도발에 넘어갈 것 같아?”

“도발 아닌데.”

타닥-.

우성의 몸이 순식간에 말을 걸었던 플레이어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혜미 역시 두 자루의 단검을 교차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어어?”

“진짜로 네가 제일 약해 보였다고.”

서걱-.

가까이 거리를 좁혔던 만큼 플레이어는 순식간에 다가온 우성의 검에 의해 목 쪽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애초에 단칼에 죽이기란 힘들어 보였기에 우성은 죽이기보단 한 명을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데에 만족했다. 아마 이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곧 목숨을 잃을 것이다.

“으아악!”

“이 개년이!”

그 사이, 혜미는 다른 플레이어 한 명에게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플레이어 한 명의 배에 혜미의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 대신, 혜미 역시 옆구리쪽에 작은 자상을 입었다.

하지만 첫 기습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큰 성과였다. 처음 달려들었던 플레이어 한 명, 우성이 쓰러뜨린 플레이어 한 명, 그리고 혜미가 쓰러뜨린 플레이어가 한 명. 거리가 좁아진 만큼 기습의 효과는 더욱 컸다.

게다가 우성이 노린 노림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곧장 가까이 있는 플레이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쨍-!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으아아아아!”

“야, 야! 어디가 이 개새끼야!”

남아있던 세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거실에서 뛰쳐나갔다. 우성과 혜미가 기습적으로 달려들며 오두막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우성과 검을 맞대고 있던 플레이어는 깜짝 놀라 욕설을 퍼부었으나, 이미 밖으로 뛰쳐나간 후였다.

우성을 상대로 한 눈을 파는 게 아니었다. 우성의 근력수치는 13포인트. 체력이나 정신력에 비해 낮을 뿐, 절대 낮은 스텟이 아니었다.

쩡-!

한눈을 팔았던 플레이어의 검은 우성이 강하게 힘을 주자 위로 붕 떠올랐다. 깜짝 놀란 플레이어가 다시 검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서 멀리 떠나가 있었다.

우성의 발이 높게 올라가 플레이어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가뜩이나 검에 정신이 팔려 있던 플레이어는 우성의 발길질에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검을 들고 싸우는 중에 넘어졌다.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하지마!”

“……목숨 구걸은 하지 말자.”

푸욱-.

우성의 검이 플레이어의 머리를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죽이는 내가 너무 좆같잖아.”

우성의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게 바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우성, 김정원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싸움 실력을 떠나, 살인에 대한 마음가짐과 각오야말로 이번 배치고사의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남아있는 플레이어는 이제 한 명이었다. 그는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성과 혜미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뇌수에 박힌 검을 쑥 뽑아내며 우성이 섬뜩한 목소리를 씹어 뱉었다.

“이제 너 하나 남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