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런 시팔…….”
그는 화가 크게 난 듯, 얼굴을 종잇장마냥 구기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싱글벙글 장난스러운 표정과 무표정, 화난 표정까지 그는 그 잠깐 사이 수많은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엔 우성이 웃고 있었다. 물론 김정원을 약올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는 속으로 꽤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었다.
‘랭킹 2위면… 가지고 있는 포인트도 꽤 되겠지.’
우성은 김정원을 죽이는데 주저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죽이는데 있어서는 아직까지 조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김정원은 아니다. 그는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한 연쇄살인범이다. 우성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이 게임 속에서 그를 다섯 번 죽여 현실에서의 그의 존재를 깨끗하게 지워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김정원을 죽이면서 다량의 포인트를 벌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현재 우성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는 550포인트였다. 기존 100포인트의 무려 5배가 넘는 수치. 총 6명의 플레이어를 죽이고, 하루 동안 살아남아 추가로 50포인트를 획득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포인트 가지고도 전체 플레이어들 중 3위밖에 되지 않았다. 1위인 안현수는 물론이고, 눈앞에 있는 김정원 역시 우성보다 높은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최소 550포인트 이상. 그 중 절반이면 단숨에 225포인트 이상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것도 최소로 잡았을 뿐, 그보다 많은 포인트를 획득할 게 당연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 3명을 죽여야 얻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그만큼 보상이 큰 일종의 보스 몬스터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
‘나도 정말 막장이군.’
아무리 포인트라는 보상을 준다지만 사람을 몬스터와 비교하다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데서 우성은 소름이 쫙 끼쳤다.
‘아니, 저 놈은… 그렇게 봐도 돼.’
몬스터(Monster).
한국말로 직역하면 괴물이라는 뜻이다. 우성은 눈앞의 김정원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여 온 김정원은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말하자면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할까.
그리고 우성 역시 스스로 그렇게 되기로 다짐했다. 현실이 아닌, 이곳 아포칼립스에서 사람을 죽이는데 주저하지 않기로. 적어도 이 게임 속에서만큼은 괴물이 되는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뭐 하냐? 안 덤비고.”
번들거리며 눈을 번뜩인 김정원은 단검을 크게 샥 휘둘렀다. 날카로운 단검의 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통해 느껴졌다.
우성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빠르게 한 번 주위를 훑었다. 우성과 김정원, 혜미를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들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숨소리라도 크게 낼까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마 우성과 김정원의 싸움이 시작되면 겁 많은 플레이어들은 사방으로 도망가기 시작할 것이다. 김정원을 죽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우성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망가기도 별로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담…….’
잠시 고민하던 우성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심스레 검을 들며 우성이 김정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김정원은 우성이 달려들자 눈을 번뜩이며 단검을 휘둘렀다.
“죽어어!”
쉬이익-.
김정원 검은 짧았지만, 그만큼 재빠르고 민첩했다. 검의 무게가 가벼운 만큼 그의 움직임은 다람쥐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우성은 김정원을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었던 게 아니었다. 검을 조금 휘둘렀던 우성은 김정원의 검을 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까 패기는 어디 갔어? 혹시 허세였냐? 이 좆밥아!”
“말 하는 꼬라지는…….”
맞서 욕을 뱉으려던 우성은 복부로 찔러오는 김정원의 단검을 간신히 피해냈다. 검이 짧은 만큼 상대하기가 수월할 거라 생각했는데, 검이 짧으며 무기가 가벼운 만큼 김정원은 날렵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성과 김정원의 싸움은 우성의 수세로 시작했다. 처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우성은 김정원의 검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모습이었다.
“조심해!”
그 모습을 보며 혜미는 땅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우성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조금만 늦으면 그대로 찔리고, 베일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함의 연속이었다.
사악-.
조금씩 피하던 우성이 검을 한 번 크게 휘두르며 김정원을 떼어냈다. 내내 피하기만 하던 우성이 반격을 가하자, 김정원은 조금 당황하여 뒤로 주춤 물러났다.
뚝-.
우성의 다리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김정원의 연속된 칼질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조금 베이고 만 것이다.
“아프네.”
날카로운 단검에 허벅지를 베인 우성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공격은 도외시하고 피하는 데에만 집중했는데도 김정원의 검을 다 피하지 못했다.
김정원의 움직임은 우성이 본 그 누구보다도 빨랐다. 가느다란 몸 덕분인지 그는 휘두른 검을 회수하는 것도, 그걸 다시 휘두르고 찌르는 동작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다른 능력치 포인트는 몰라도 아마 민첩 스텟 하나만은 우성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게다가 무기도 가벼운 축에 속하는 단검이었다. 오더는 플레이어에게 가장 적합한 무기를 선정해 준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였다.
“왜 안 덤벼?”
장검의 사정거리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는 김정원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는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격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을 텐데, 우성은 지금껏 김정원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처음의 패기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 큰 어른이 아무데서나 싸우면 쓰나.”
“약먹었냐? 무슨 헛소리야?”
김정원은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우성의 말은 곧, 일부러 김정원을 유인하며 자리를 옮겼다는 뜻이었다.
오두막 안, 거실. 자리는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우성의 의도를 눈치 챈 김정원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킥. 키키킥.”
미친놈처럼, 아니 이미 반쯤 미쳐 있는 김정원의 실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쫙 끼치게 만들었다. 그는 한동안 단검으로 웃는 얼굴을 가리다가 금세 얼굴을 굳히고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너 지금 네가 이길 거라 생각해?”
“그럼, 죽을 생각이겠냐?”
“미친놈. 아니아니, 미친놈은 나였지? 킬킬킬. 하지만 너도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키키키키킥.”
무표정과 웃는 얼굴을 빠르게 반복하며 김정원은 우성을 노려봤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거실의 입구였다. 정확히는 다른 방이 아닌, 오두막 밖으로 통하는 입구. 즉 두 사람이 서 있음으로써 거실 안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도주로가 차단된 것이다.
우성은 김정원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일도 대비했다. 아무리 김정원이 죽일 놈이고, 죽였을 때 얻는 포인트가 많다고 해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는 무려 여섯 명이었다. 그들을 모두 잡을 수만 있다면 어쩌면 김정원을 잡았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거실의 입구를 싸움 장소로 선정했을 때의 이점은 또 있었다. 우성은 김정원에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큰 부상을 당할 경우까지는 생각해 두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아무리 다른 플레이어들이 약하고 겁쟁이라고 해도, 우성 혼자 그들을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거실의 입구는 도주로를 막는 동시에 김정원과의 싸움이 끝난 후 도주로를 확보해 주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우성이 김정원을 상대로 이겼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의도를 알기에 김정원이 우성을 비웃은 것이다.
“진짜… 넌 꼭 죽여 버린다.”
무시 받았다는 생각에 김정원의 눈에 불이 켜졌다. 그는 발을 한 번 타닥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우성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아까와는 달리 우성은 피하지 않고 맞서 검을 휘둘렀다. 검도를 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우성은 높게 들었던 검을 아래로 찍었다.
쐐애액-.
아무리 재빠르다 해도 거리가 긴 장검을 상대로는 힘든지 김정원은 더 이상 달려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열이 오를 만큼 오른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시금 우성을 향해 단검을 찔러갔다.
사악, 사악-.
“큭.”
우성의 검은 길고 무거운 만큼 힘은 강하지만 김정원처럼 빠르진 못했다. 그리고 김정원은 검뿐만 아니라 움직임도 다람쥐처럼 재빨라 우성의 검을 크게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우성의 민첩성 스텟이나 반사능력 스텟은 그리 낮은 편이 아니었다. 민첩성 13과 반사능력 12는 플레이어들의 평균 스텟을 몇 단계 뛰어넘는 수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성은 김정원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마 그 역시 우성의 정신력 스텟처럼 민첩성 스텟이 비정상적으로 높을 것이다.
‘젠장. 대체 정신력 스텟은 어디에 쓰는 거야?’
민첩 스텟이 높으면 김정원처럼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하고, 근력 스텟이 높으면 압도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력 스텟은 지금 당장 마땅히 쓸 데가 없다고는 하지만 혜미의 경우를 보면 새로운 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력 스텟은 24포인트라는 높은 수치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마땅히 쓸 곳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짧은 생각이 지나가는 순간에도 우성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우성 역시도 민첩과 반사능력 수치가 낮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민첩성 스텟을 가지고 있는 김정원의 공격을 다 피해내기란 힘들었다.
그 때, 우성의 눈앞으로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다량의 출혈로 인해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가 발동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