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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17화 (17/258)

17화

두 명의 플레이어가 피를 뿌리고 죽어버린 거실 안은 기분 나쁜 피비린내가 풍겼다. 한껏 긴장감으로 고조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거실 안의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모아졌다. 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홀로 유유히 등장한 한 명의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떨었다.

“으으으…….”

새롭게 등장한 플레이어의 모습은 우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태성이 뿌린 피 조금 묻었을 뿐인 우성과는 달리, 그는 거의 상체 대부분 피를 적신 상태였다.

사람의 심리에 있어 시각적 효과, 청각적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그 누구도 새로 등장한 플레이어의 실력을 보지 못했음에도 피를 묻힌 채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정황상 앞의 비명소리는 눈앞의 플레이어가 만들어낸 게 분명했다.

그 시각적 효과는 다른 플레이어들만이 아니라 우성에게도 역시 적용되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습뿐이지만 우성은 그가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 둘은 아니군.’

비명소리로 보나, 몸에 묻은 피로 보나 눈앞의 플레이어의 손에 죽은 플레이어는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비록 우성이 그 사이 두 명의 플레이어를 죽였다고 하나, 그는 본질적으로 우성과는 달랐다.

“살인에 재미라도 느끼는 건가.”

“무슨 소리야?”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온 혜미가 우성의 옆에 꼭 달라붙었다. 워낙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우성의 중얼거림을 듣고 표정에 물음표를 띄웠다.

“저 녀석, 메시지가 뜨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플레이어들을 죽였어. 몇 명인지는 몰라도 꽤 여러 플레이어가 그 사이 저 녀석 손에 죽었고. 살인이라는 걸 조금도 주저하는 녀석이 아니야.”

“……우성 너와는 다른 거야?”

“넌 날 뭐로 보는 거냐?”

우성이 저지르는 살인은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살인이다. 살생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살인을 통해 얻게 되는 포인트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플레이어는 표정에서부터 즐거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유형.

“싸이코패스.”

“응? 저 녀석이?”

“아마도. 현실에서는 뭐 하는 녀석인지 궁금하군.”

지금껏 죽어가는 자의 숲에 들어온 이후로 매 순간마다 당당했던 우성의 몸이 살짝 떨렸다. 혜미 역시 그가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의외라는 표정과 함께 눈앞의 플레이어를 경계했다.

꿀꺽-.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침이 넘어갔다. 조용하던 거실 속에 다시금 피를 묻힌 플레이어의 목소리가 울렸다.

“킬킬. 니들 나 무서워? 그렇지? 그런 거지?”

거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배를 부여잡으며 과장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면 자신을 보며 떨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정말 많이 우스웠거나. 후자라면 나사가 하나가 아니라 꽤 많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정신병자 새끼.”

“음… 넌 내가 안 무섭나봐?”

플레이어의 시선이 우성에게로 향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검을 꺼내보였다. 한손 단검. 흔히 단검(短劍)하면 떠올릴 수 있는 평범한 검이었지만 그 무기를 꺼내든 순간, 다른 플레이어들은 기겁성을 터뜨렸다.

그가 꺼내든 단검은 손잡이에서부터 검신까지 온통 피에 적셔져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묻어 있던 피도 있었는지 응고가 시작되어 끈적거리는 피도 있었다.

살해한 플레이어의 수가 한 둘이 아니라는 뜻. 우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내 이름? 그건 왜 궁금하지?”

“너도 플레이어면 메시지를 받았겠지. 랭킹 시스템, 확인 안 해봤나?”

우성의 물음에 플레이어는 아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킥, 하며 실소를 터뜨린 그는 우성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해 주었다.

“김정원. 2위더라고. 넌? 혹시 네가 안현수라는 놈이야?”

“아쉽지만 아니야. 왜, 안현수와 아는 사이라도 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내 위에 있다는게 마음에 안 들어서. 뭐 하는 놈인지, 어떻게 생긴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만나서 죽여 버리고 싶어.”

김정원은 혓바닥을 길게 내밀어 단검에 묻어 있는 피를 핥았다. 단검에 묻어 있는 피가 혀끝을 타고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다른 놈들이면 같잖은 위협이라며 코웃음을 치겠지만, 김정원의 그 모습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무섭긴 하네.”

“그래서 네 이름은 뭔데?”

“이우성. 아쉽지만 네 밑이네.”

당연히 알거라 생각했는데, 김정원은 의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그는 단검의 손잡이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우성? 몰라. 안현수라는 놈이 아니면 관심 없어.”

아무래도 그는 자신 밑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밑이라곤 하지만 우성의 랭킹은 김정원의 바로 한 단계 밑밖에 되지 않았다.

우성은 양 손에 검을 꽉 쥔 채 김정원을 경계했다.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른 손으로 주고받기를 반복했다. 아직까지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 모습에서 우성은 그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현실에서도 꽤나 검 좀 써본 사람일 터. 하지만 현실의 그 어떤 운동 종목에서도 단검을 다루는 종목은 없었다.

우성은 별로 어렵지 않게 현실에서 그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깡패라도 되나 보지?”

“응? 너 나 몰라? 다른 놈들은 몇 명 아는 것 같은데.”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본 김정원의 시선이 혜미에게로 멈췄다. 그녀는 김정원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경멸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김정원이 누군지 아는 게 틀림없었다.

“누군데?”

“김정원 몰라? 반 년 전쯤에… 한창 뉴스에서 떠들썩 했던 연쇄살인마.”

“연쇄살인마?”

역시나. 현실에서도 저런 종류의 짧은 검을 사용할 일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성의 그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정신이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해서 싸이코패스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는데, 설마하니 유명한 연쇄살인범일 줄이야.

“그리고 변태 강감범 새끼.”

“……저질이네.”

“시팔, 싸이코도 보통 싸이코여야지, 로리콤 변태 콤플렉스 걸린 싸이코라니 최악이야. 그런데 저 새끼는 분명 잡혔다고 들었는데?”

“낄낄낄. 거기 아가씨?”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김정원이 단검을 혜미를 향해 가리켰다. 단검에 묻은 번들거리는 피를 보며 혜미는 흠칫 놀라 우성을 향해 조금 더 달라붙었다.

“로리콤이라니, 말 한 번 너무하네. 어른, 아이, 여자면 가리지 않는 것뿐이지 특히 애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밤길 돌아다니는 새끼들이 애새끼들밖에 없어서 그렇게 된 거지.”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변명? 아, 맞다.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지? 뭐 어때. 나도 오랜만에 이쁜 아가씨랑 얘기하니 좋아서 그런가 봐. 너도 조만간 곧… 킬킬킬.”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김정원의 입매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표정과 눈빛을 마주하는 혜미는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휘어 감는 착각이 들었다.

귀엽게 몸을 부르르 떠는 그녀를 보며 김정원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감옥에 갇힌 거 맞아. 지금도 내 몸뚱이는 철창 안에 갇혀 있겠지. 그런데 여긴 현실이 아니잖아?”

현실에서 몸이 어디에 있다고 한들, 이곳은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이다. 게임은 수십, 수백 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끝내주는 곳이야. 사람을 죽이면 보상을 받는 곳이라니. 게다가 여자도 많고, 여긴 천국이야!”

현실에서 살인은 중범죄다.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더 큰 죄는 없으며, 현실에서는 그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살인범에게 큰 형벌을 내린다.

살인범에 대한 처벌이 비교적 약한 나라가 바로 우성과 김정원이 살고 있는 한국이었다. 그곳에서조차 살인범에게는 보통 15년 이상의 형벌을 내리고, 연쇄살인범에게는 그보다 더 오랜 형을 내린다.

연쇄살인, 강간 등 무거운 죄를 연속해서 저질러온 김정원은 감옥에 갇힌 이상 인생이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게임을 통해 새로운 안식처를 찾은 것이다.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여자를 범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김정원에게 있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미친놈. 진짜 못 들어주겠네.”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우성이 앞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피하기는커녕 반대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우성을 보며 김정원은 토끼눈처럼 눈을 크게 키웠다.

“넌 나 안 무서워?”

“너도 똑같이 사람새끼고, 내가 어제 죽였던 강간범 새끼들이랑 똑같은 놈이라면 무서울 것 없지.”

“칼 안 보여?”

“네 손에만 칼 있냐? 네 눈엔 이건 칼로 안 보이나 봐?”

우성은 1m에 가까운 자신의 긴 장검을 휘둘러 보였다. 김정원의 눈은 좌우로 휘둘러지는 우성의 검을 쫒았다. 아무래도 이런 싸움에서는 짧은 단검보다는 기다란 장검이 유리한 게 사실이었다.

등장 후부터 쭉 웃음기 가득하던 그의 입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던 눈도 차분하게 가늘어졌다. 웃음기가 지워진 그의 무표정은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그러다 죽는다.”

“살려 달라고 하면 살려 주려고?”

“그럴지도 모르지. 칼 버리고, 무릎 꿇고, 거기 여자 이쪽으로 보내면. 잘만 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그 말에 우성은 잠시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붙어 있던 혜미는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가려진 그의 입이 크게 웃고 있는 것을.

순식간에 입가의 웃음기를 싹 지워낸 우성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는 한쪽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엿먹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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