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오두막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안전한 장소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곳이, 순식간에 바깥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아니, 바깥과 다를 바 없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오히려 바깥보다 훨씬 위험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은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전투 가능 지역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과를 베어 먹던 플레이어는 멍한 얼굴로 눈을 굴렸고, 우성에게 가까이 다가왔던 플레이어는 조심스레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한심한 놈들.’
우성은 주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이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만 해도 그들이 겁쟁이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바뀐 상황에 그들은 또 다시 스스로의 가치가 바닥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성은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허리춤에 있는 검을 쥐고 있었다. 언제든 플레이어의 공격으로부터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심지어 옆에 있던 혜미조차 언제든 방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 그 누구도 그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오직 공황 상태에 빠져 상황을 지켜 볼 뿐. 그런 점에서는 우성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우성은 적어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싸움이라는 선택을 배제하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자, 잠깐 기다리려 봐. 우리 일단 말로 하자고.”
사과를 베어 먹던 플레이어가 반쯤 남은 사과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양 손을 들어 손에 무기가 없음을 보였다.
“우선 내 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태성이다. 우태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싸움을 원치 않아. 그래서 이 장소를 발견하자마자 이곳에서 남은 5일을 버티겠다고 결심했고. 너희들도 그렇지 않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태성은 짧은 말 끝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동조를 구했다. 이대로 두고만 봤다면 누군가 먼저 분위기에 못 이겨 도망치거나 무기를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적절한 개입 덕분인지 주변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은 조금 안도한 듯했다.
“맞아.”
“나도 그래.”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에는 혜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오직 한 명, 우성만이 그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우성을 제외한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성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방금 전 메시지를 너희도 다 확인 했을 거다. 길게 돌려 말하지 않겠어. 난 이 장소에서 12시간 동안 버티고 싶다. 그 뒤, 다시 이곳이 전투불능 지역이 되면 이번에도 이 거지발싸개 같은 곳에서 또 하루를 버는 셈이고. 아마도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 그건 그렇군.”
“12시간만 버티면…….”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2시간. 그리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 버티면 다시 12시간동안 이곳은 전투불능 지역으로 바뀐다.
이론적으로는 참 그럴듯했다. 평화주의자, 비폭력주의자. 이런 말들이 절로 떠올랐다. 이곳 죽어가는 자들의 숲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 싶었다. 이상도 좋지만, 저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짜 제대로 된 놈들이 없네.’
여태껏 한심하게만 여겼던 혜미가 그나마 낫다싶었다. 그녀는 적어도 처음 우성을 보고 죽이지는 않더라도 무기를 휘둘렀던 정도의 배짱 정도는 있었다.
우성은 그들 하나하나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평화주의자. 말이 좋지 현대가 아닌 이곳 죽어가는 자들의 숲에서는, 그리고 아포칼립스라는 게임에서는 결코 가져서는 안 될 사상이었다.
칼로, 창으로, 도끼로 적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당할 수밖에 없다. 하룻밤 사이 우성이 이해한 이곳의 생태계는 오직 양육강식. 약자는 강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론, 죽어가는 자들의 숲만이 아닌 이후 아포칼립스의 구조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말이다.
‘먼저 나설 놈이 없다면…….’
어물거리는 분위기에서 우성이 막 검을 빼어들려던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아악-!”
“무, 무슨 소리야?”
평화를 외치던 태성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들린 소리는 누가 들으나 사람의 비명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를 외치던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분주히 자신의 무기를 찾아갔다.
당황과 불안, 두려움으로 물든 플레이어들의 표정과는 반대로 우성의 얼굴엔 웃음기가 번졌다.
‘영 머저리들만 모인 건 아니었군.’
스윽-.
우성이 몸을 돌려 가장 가까이 있던 플레이어에게로 빠르게 접근했다. 그는 바로 방금 전 혜미에게 ‘여우’라 했던 플레이어였다.
“어어?”
“악감정은 없지만… 미안하다.”
“자, 잠깐만… 아아악!”
서억-.
우성이 검을 드는 것을 본 플레이어가 미리부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남자의 비명에 멈출 만큼 우성의 검은 무디지 않았다. 이미 오두막 안이 전투 가능 지역으로 바뀔 때부터, 우성은 플레이어들을 모두 죽일 작성을 하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냐니? 포인트 획득 중이지, 보면 모르냐?”
우성의 태연한 대답에 태성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의 플레이어의 목을 베어 피를 뚝뚝 흘리는 우성의 검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기습적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를 처치한 우성은 빠르게 거실 안을 훑었다. 우성과 혜미를 포함해 거실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는 총 여덟 명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시각으로는 2대 6의 상황이었지만, 우성과 혜미를 제외한 거실 안의 다른 플레이어들은 동맹이 아니었다. 냉정히 따져보면 1:1:1:1:1:1:2의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유일한 동맹 관계인 우성과 혜미가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난 겁쟁이가 아니거든.’
“이, 이러지마아아아악-!”
또 다시 들려온 비명소리. 아까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던 것이었다. 우성은 이 오두막 안에 꽤 위험한 플레이어가 있음을 직감했다.
“뭐, 아무렴 어때.”
저벅-.
우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발걸음이 뻗어간 방향에는 태성이 있었다. 평화를 외치던 그의 손에는 어느새 자신의 무기인 방패와 한손 메이스가 들려 있었다.
“오, 오지 마!”
“싫어.”
“얘들아! 도와…….”
터엉-!
우성의 검이 태성의 방패에 막혔다. 하지만 내내 겁을 잔뜩 집어먹어 덜덜 떨고 있던 태성은 우성의 칼질에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그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메이스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 손에 들린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거북이처럼 숨었다.
“도와달라고 이 개새끼들아!”
태성의 외침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까지 갈등하고 있었다. 과연 태성을 도와 우성을 제압하는 게 맞는 일일까?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에 비친 우성은 이미 한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마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두려웠다. 자신들과는 달리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우성이. 혹여나 쓸데없이 태성을 도왔다가 우성의 검이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을까 그들은 마음을 졸였다.
“시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거 참 시끄럽네. 괜히 시간 끌지 말고… 그냥 좀 빨리 죽어.”
잘못한 거? 없다. 그는 물론이고 방금 전 죽인 플레이어, 그리고 앞으로 죽일 플레이어들까지. 일면식 하나 없는 그들이 우성에게 잘못한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우성은 포인트가 필요할 뿐이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던 사람 백 명, 천 명의 목숨보다 서현이 한 명의 목숨이 훨씬 중요하다.
우성은 태성의 방패를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거북이의 등처럼 태성을 감싸고 있던 방패가 벌어지며, 그의 덜덜 떨리는 몸을 훤히 드러냈다. 막 그가 태성을 향해 검을 찔러 넣으려 할 때였다.
“이, 이런 시팔!”
부웅-.
생존을 위한 본능인가? 방패가 벗겨지고 우성의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태성은 한 손에 쥐고 있던 메이스를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던 태성의 공격은 느리고 뻔했다. 우성은 황급히 얼굴을 들어 태성의 메이스를 피해내고는 다시금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우성의 얼굴을 향해 튀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걸쭉한 피가 얼굴에 묻는 경험은 썩 달갑지 않았다. 정확하게 태성의 왼쪽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며 우성이 중얼거렸다.
“……미안.”
“커컥.”
심장을 관통당한 태성은 입안에서 피가 섞인 거품을 토해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아마 현실에서는 꽤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우성 역시 악인은 아닌지라,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취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커커…….”
[띠링-! 7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하루가 지나며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포인트가 주어진 탓인지, 한 명의 플레이어도 죽이지 않은 태성은 우성에게 75포인트를 제공했다.
이곳 죽어가는 자들의 숲, 배치고사의 요점은 생존이었다. 오래 생존할수록, 1일이 지날 때마다 다량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고 그만큼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때마다 더 많은 양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성은 입 안에 피거품을 물고 죽어간 태성의 시체를 보며 다짐했다. 절대 죽지 않겠다고. 그리고 반드시 이번 배치고사에서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피를 뚝뚝 흘리는 검을 아래로 내리며 우성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거실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는 우성과 혜미를 제외하고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아직까지도 수적으로는 그들이 위에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우성을 향해 달려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태성만 하더라도 무기만 갖췄지, 약해도 너무 약했다. 아니, 모든 걸 떠나서 그는 제대로 싸울 의지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선뜻 맹수를 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맹수는 우성이었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사람이었다. 무기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맹수를 잡겠다고 나설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그 때, 잠시 조용해졌던 거실 안으로 침묵을 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