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뭐?”
단검을 든 여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을 내뱉은 당사자인 우성 역시 놀랐다. 설마하니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현실과 비슷하다고 해도, 아포칼립스는 게임이었다. 다섯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횟수 제한이 걸려있긴 하더라도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이곳 죽어가는 자의 숲은 신규 플레이어들이 모인 곳으로, 누굴 죽이든 다시 살아난다는 조건은 같았다.
“그,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 더, 덤비게?”
“먼저 덤빈 건 너희들 아니었나?”
“나,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우성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위협적으로 단검을 휘둘러 우성으로 하여금 혜정이라는 여자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우성을 죽일 생각으로 단검을 찔렀다면 우성 역시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런 상처 없이 그녀의 단검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애초 우성을 상처 입힐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성은 그녀들을 위협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는 그녀들이 자신을 해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먼저 무기를 휘두른 쪽은 자신이 아니라고 되뇌며 검을 휘두르는데 정당성을 부여했다.
우성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혜정은 언니라는 여자의 뒤로 숨었고, 그녀는 좁은 어깨를 벌려 혜정을 보호했다. 그 모습을 보는 우성의 검을 들어 올린 팔이 부르르 떨렸다.
“……시팔.”
검을 들어 올렸던 우성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녀들이 자신을 죽어라 공격했더라면, 그 역시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들, 게다가 남자도 아닌 여자를 상대로 검을 휘두를 정도로 우성은 독한 마음을 먹지 못했다.
“하아.”
검을 내린 우성을 보며 두 여인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우성은 대한민국의 든든한 건아였다. 아무리 둘이라고 해도 우성이 죽이겠다고 검을 휘두르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혜정이는 싸움이라곤 쥐뿔도 모른다.
“고마워.”
“……그럼 포인트라도 내 놓던지.”
“그놈의 포인트. 시발, 그게 대체 뭐라고…….”
보아하니 그녀는 우성처럼 절실하게 원하는 소원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뒤에서 우성을 노릴 수 있었던 그 순간, 심장에 바로 검을 쑤셔 넣었겠지.
우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자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게임 안에서, 특히 이 죽어가는 자의 숲 안에서는 모든 플레이어가 적이라고 봐야했다.
“친자매인가? 아니면 그냥 아는 언니 동생?”
둘 사이의 관계에 호기심이 동한 우성이 물었다. 그는 아직도 갈등하고 있었다. 그녀들을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뜻 검이 움직여지진 않지만, 배치고사 설정에 의하면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고 그녀들을 죽여야만 했다.
“친자매야. 정확히는 쌍둥이.”
“쌍둥이?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아마 그럴 거야. 이란성 쌍둥이니까. 혜정이랑 난… 달라도 너무 달라.”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이었다. 쌍둥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 수 없을 만큼 그녀들은 다르게 생기고,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동생인 혜정은 청순하고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언니는 날카롭고 고혹적인 섹시함을 가지고 있었다.
외향적인 분위기 말고 성격도 마찬가지였다. 덜덜 떨리는 입술과 잔뜩 겁을 먹고 움츠러든 혜정과는 달리, 그녀의 언니는 조금 겁을 먹었을 뿐 당당해 보였다. 잘만 하면 우성과 맞서 싸울 수도 있을 만큼 용감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성은 그녀들이 조금 부러워졌다.
이곳 아포칼립스에서는 완전한 아군이란 찾기 힘들었다. 현실에서 역시 마찬가지지만, 현실과는 달리 아포칼립스에서 타 플레이어는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포인트나 마찬가지였다.
친구? 이곳에서 그런 게 존재하긴 할까? 게임 속이 아닌, 현실에서의 친구나 가족이 아닌 이상에야 이곳에서 친구란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아군이 함께하는 셈이었다.
‘뭐, 혜정이라는 여자는 별로 믿음직하진 못하지만.’
“이름이 뭐지?”
“이름? 나 말이야?”
“그래. 동생 이름은 혜정이인 것 같고, 네 이름.”
“이름은 박혜미. 나이는…….”
그녀가 막 자신을 소개하고 있던 참이었다.
쉬이익-.
푸욱-.
“아아악!”
“꺄아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발이 혜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혜정이의 가슴을 관통했다. 혜정이 몸으로 막은 덕인지, 혜경은 화살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격은 컸다. 가슴에 화살이 박힌 혜정을 보며 혜미가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연약한 혜정은 화살에 맞음과 동시에 앞으로 쓰러져 혜미의 품으로 안겼다.
“혜, 혜정아!”
“언……니…….”
화살은 정확히 혜정의 왼쪽 가슴, 심장 부위에 박혀 있었다. 혜정의 입 속에서 시커멓게 죽은피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우성은 생각했다.
‘가망이 없군.’
아직까지 숨은 붙어 있었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성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둘. 그 중 화살의 시위를 당기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그만하고 피해!”
“으어어엉. 혜정아!”
“정신 차려, 미친년아! 여긴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야!”
우성이 거칠게 혜미의 팔을 끌어 당겼다. 그 직후, 방금 전까지 혜정의 몸을 껴안고 있던 혜미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슈우우욱-.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나무에 박혔다. 만약 우성이 끌어당기지 않았더라면 이미 혜정의 몸에도 날카로운 화살이 박혔을 것이다.
‘정확하군.’
우성을 다시금 시위를 당기는 플레이어를 보며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그 역시 운동을 좋아하던 시절, 우연한 기회로 양궁을 접해본 적이 있었다.
양궁은 그렇게 쉬운 운동이 아니었다. 실내면 몰라도 이와 같이 실외에서, 특히나 지형지물의 방해로 가득한 숲에서 목표를 정확하게 맞춘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활을 처음 접해본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분명히 현실에서 활을 다뤄본 사람. 양궁 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 즐겨 하는 사람이나 선수를 준비하는 아마추어일 확률이 높았다.
“뛰어!”
우성은 혜미의 팔을 잡은 채 나무가 좀 더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갔다. 혜정의 죽음에 힘이 빠져 있던 혜미는 끌려가면서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거 놔! 혜정이는, 혜정이가!”
“지랄하지 마, 미친년아! 심장에 화살이 박혔는데 네가 옆에 있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아!”
“닥쳐! 혜정이, 혜정이를…….”
우성은 정신없이 횡설수설하는 혜미를 숲 속 어딘가로 집어 던졌다. 얼떨결에 엉덩방아를 찧은 혜미는 그 충격 덕분인지 놓았던 정신줄을 잡고 멍하니 우성을 바라봤다.
“뒤지고 싶으면 혼자 뒤져. 정신줄 놓은 새끼 감당하기엔 내 사정도 그리 좋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네 동생 아직 안 죽었어. 가이드한테 들었지? 이곳에서 플레이어의 생명은 총 다섯 개. 한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 하지만, 너처럼 정신 못 차린 머저리들은 다시 살아나도 또 죽을 뿐이야.”
우성의 말은 언뜻 혜미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번 한 번만이 아니라 다음 살아났을 때에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혜정이 죽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를 죽인 플레이어가 있다. 배치고사가 시작된 후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플레이어들끼리의 죽고 죽이기가 시작 된 것이다. 우성 역시도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거기 있어. 질질 짜면서 엄마라도 불러 보던지.”
“…….”
그렇게 우성은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혜미를 내버리고 수풀 밖으로 걸어갔다. 애초에 그녀를 챙겼던 것조차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누구라도 눈에 보이면 죽여 포인트를 얻겠다던 처음의 각오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지.
우성은 방금 전 자신들을 노린 두 명의 플레이어를 찾아 나섰다. 그리 멀리 뛰어오지는 않았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살피며 왔던 길을 돌아가자 역시나 방금 전 만났던 두 명의 플레이어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죽는 모습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아마 혜정은 이미 죽어 그들의 포인트가 되었겠지.
처음 혜정과 혜미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우성은 그들을 보며 알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들은 죽여도 된다.
“반가워 죽겠네.”
우성과 혜미를 찾으러 가고 있던 두 명의 플레이어는 반대로 우성이 자신들을 찾아오자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남성 플레이어가 둘. 그들은 각기 활과 검이라는 전혀 성향이 반대되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활을 사용하는 플레이어가 서둘러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당황할 법도 하건만, 우성은 오히려 달려들었다. 활과 검의 싸움이라면 활은 거리가 멀수록 유리하고, 검은 가까울수록 유리한 게 당연했다.
“어딜!”
남성 유저 한 명이 그런 우성을 가로막았다.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아무래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모양이었다. 혜미와 혜정처럼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 사이였을 수도 있다.
까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진검과 진검이 부딪힌 것이다. 검도를 했던 우성은 죽도와 죽도가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어보지 못했다. 대나무로 만든 죽도와 죽도가 부딪히는 것과, 쇠로 만든 진검과 진검이 부딪히는 것은 소리부터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생전 처음 진검을 맞댄 우성의 눈은 더욱 차분해졌다. 반면, 상대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 역시도 우성처럼 검도를 배웠던 사람인지 자세는 꽤 그럴듯했지만, 검이 부딪힘과 동시에 당황해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허점이 보인다. 허리가 훤히 드러났고, 어깨도 비었다. 우성은 활시위를 당겼던 플레이어는 우성과 가까이 붙어 있는 플레이어를 신경 쓴 탓인지 팽팽히 당겼던 활시위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멍청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쐈어야지.
퍽-.
우성의 검이 검을 든 플레이어의 허리를 베어갔다. 검은 플레이어의 허리를 자르지 못하고, 뼈에 가로막혀 박히는 데에서 그쳤다.
“아아악!”
“형!”
그 순간, 플레이어가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를 놓았다. 하지만 당황한 탓일까?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은 화살은 우성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푸욱-!
“커컥.”
목 한가운데 화살이 박힌 플레이어는 꺼져가는 숨을 간신이 붙들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어 죽을 목숨, 우성은 망설임 없이 플레이어의 머리를 향해 검을 꽂았다.
푸욱-.
[띠링-! 75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