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창을 확인한 우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치고사. 생소하지 않은 단어였다. 반배치고사라고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반마다 시험을 봐 공부를 잘하는 반과 그렇지 않은 반을 나누곤 했었다.
하지만 게임에서도 그런 시험을 보는 경우는 생소했다. 배치고사라고 하면 각자의 실력에 맞게 사람을 구분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미를 따져 본다면 각 플레이어들을 시험해 해당 플레이어에게 적합한 무언가를 설정해 준다는 뜻이리라.
“오더는 어디로 간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오더가 보이지 않았다. 하얀 공간을 벗어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가이드였던 오더가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부터는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안내자인 오더가 사라진 만큼 우성은 더욱 긴장했다. 지금부터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가 판단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초보 플레이어들의 낙원, 죽어가는 자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것 참 환영할 일도 많다. 이제는 오더가 아닌 메시지 창이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낙원이라고 하기에 숲은 습하고 칙칙했다. 하늘을 보니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밤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울창한 나뭇가지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햇빛이 들어오긴 하지만, 어둠을 걷기엔 미약한 수준이었다.
상쾌해야 할 숲속의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름 때문일까? 죽어가는 자의 숲이라는 이름이 어딘가 모르게 썩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어가는 자의 숲에는 플레이어 우성을 포함, 총 삼백 명의 플레이어가 들어와 있습니다. S클레스 플레이어부터 D클레스 플레이어까지, 모든 플레이어는 지금부터 죽어가는 자의 숲에서 동시에 배치고사를 시작합니다.]
역시 이곳 장소는 배치고사를 보는 시험장이었다. 튜토리얼이 끝난 후, 곧장 게임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 무덤덤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우성이 새로운 시선으로 숲 속을 바라봤다. 메시지에 의하면 저 숲속 어딘가에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가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자의 숲에서는 타 플레이어 사살시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의 1/2을 획득합니다.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포인트는 100포인트로 시작합니다.]
“뭐? 절반?”
배치고사에 대한 설명에 우성이 깜짝 놀랐다. 오더의 말에 의하면 플레이어 사살시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고작해야 그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의 1/10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 죽어가는 자의 숲, 배치고사에서는 무려 그 다섯 배인 절반을 빼앗을 수 있었다.
배치고사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배치고사는 게임을 시작함과 동시에 우수한 플레이어에게 많은 양의 포인트를 지급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반대로 수준이 떨어지는 플레이어는 절반의 포인트를 빼앗긴다. S클레스든 D클레스든 모든 플레이어에게 고르게 100포인트를 지급하더니, 이런 곳에서 그 차이를 두는 모양이었다.
S클레스에 가까운 플레이어는 보통 플레이어에 비해 신체 능력이든 게임 내에서의 적응력이 뛰어나다. 그만큼 다른 플레이어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이고, 이번 배치 고사에서 많은 양의 포인트를 얻어 갈 게 분명했다.
반면 D클레스에 가까운 플레이어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배치고사는 많은 양의 포인트를 얻을 기회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많은 양의 포인트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이걸 기회라고 할 수 있을까?’
기본으로 주어진 포인트는 총 100포인트. 플레이어 한 명을 제거할 경우, 50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플레이어를 죽인 후, 바로 죽었을 땐 가지고 있던 150포인트 중 75포인트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남는 포인트는 75포인트. 기존에 가지고 있던 100포인트에 비해 낮은 수치였다. 최소한 두 명 이상의 플레이어를 죽여야 기존에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든 플레이어는 5일 동안 타 플레이어를 찾아 제거해야 하며, 한 명의 플레이어가 남게 됐을 때 배치고사는 끝이 납니다. 만약 5일 뒤 둘 이상의 플레이어가 남아있을 경우, 두 명의 플레이어 모두 라이프를 잃게 됩니다.]
“그것 참 룰 한번 빡빡하군.”
설정 하나하나에 불만을 토로하며 우성이 계속해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배치고사의 결과에 따라 각 플레이어의 클레스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5일 뒤까지 생존한 플레이어는 A클레스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한 단계 클레스가 상승합니다. 배치고사가 끝난 뒤 플레이어는 각자의 클레스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A클레스를 제외하면… 난 제외군.”
[5일 뒤 한 명의 플레이어가 남아있으면 해당 플레이어는 배치고사 퀘스트의 완료 보상으로 클레스에 상관없이 S클레스로 배정받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 도착!]
이름 : 죽어가는 자의 숲
구분 : 배치고사, 강제 퀘스트
등급 : A
보상 : S급 클레스
* 5일 뒤까지 죽어가는 자의 숲에 숨 쉬는 모든 플레이어를 죽여라.
강제로 받아진 퀘스트. 무려 사람을 죽이라는 퀘스트였다. 보상인 S급 클레스야 어쨌건 이번 배치고사를 통해 많은 양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성은 다시금 떨리는 팔과 다리, 그리고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켰다.
우성은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려 눈앞으로 가져왔다. 다행히 오더가 사라지면서 무기가 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나마 손에 무기가 들려 있으니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더라도 대항할 만한 수단이 있었다.
‘뭐, 그건 다른 플레이어도 마찬가지겠지만.’
우성이 특별한 게 아니라면 다른 플레이어들 모두 오더와 같은 가이드가 붙었을 것이다. 지금껏 같은 과정으로 튜토리얼을 진행했다면 그들 모두 우성과 같이 각자에게 맞는 종류의 무기를 지급 받았을 터. 무기가 있다는 조건은 모두가 동등했다.
[지금부터 배치고사를 시작합니다.]
**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하늘엔 태양이 있었고, 푸른 하늘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죽어가는 자의 숲에서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우거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빛을 다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해가 점차 기울어졌다. 이제는 낮치고 조금 어둡다는 느낌을 넘어, 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언제, 어디서 다른 플레이어가 튀어나와 등을 찔러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게 우거진 숲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파삭-.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을 때마다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수풀 너머까지는 아니지만 가까운 거리까지는 눈에 보였다.
파삭-.
그 때,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여자?”
가까이서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로 가느다란 여자의 것이었다.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죽고 죽여야 할 이런 험한 곳에 여자가 들어와 있다니. 하긴, 어차피 그녀도 우성처럼 스스로 선택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긴 할 것이다.
우성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보자 그림자처럼 검게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활시위를 당겨 우성에게 겨냥했다.
“오, 오지 마요! 더 이상 다가오면…….”
“다가오면 뭐?”
저벅-.
우성은 오히려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크게 다가갔다.
“쏴 봐.”
우성은 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이 건조하고 딱딱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그는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당한다.’
검도 아니고, 설마하니 활을 들고 있는 상대를 만날 줄이야.
‘손을 유심히 본다. 시위가 당겨지는 순간, 빠르게 몸을 숙이고 돌진을…….’
머릿속으로 다음 동작을 떠올리고 있을 때, 우성의 등으로 서슬퍼런 느낌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튼 우성은 그대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어, 언니.”
“혜정아. 이리로 와.”
나뭇가지 틈으로 비춘 햇빛을 받은 무기는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이었다. 갑작스럽게 모습을 타나낸 사람 역시 여자였는데, 앞서의 여자와는 달리 가까워서 그런지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곱게 생긴 여자였다. 오른손에 꽉 쥔 무기는 대략 30cm정도 되어 보이는 단검이었는데, 남자에 비해 근력이 떨어지는 여자에게는 무거운 장검보다는 가벼운 단검이 더 어울렸다. 사용자의 특성에 맞게 무기가 주어진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말이 진짜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옆으로 활을 든 여자가 다가왔다. 기가 세 보이는 단검을 든 여자와는 달리 그녀는 울상을 짓고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전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던 이유는 성격이 부드럽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자매인가?”
“그래, 이 새끼야.”
“욕은 자제하지? 초면에.”
“닥쳐! 방금 혜정이를 죽이려 해 놓고는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을…….”
그녀의 말을 끊고, 우성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죽여도 다시 살아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