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형 놈 새끼……
그저 기가 차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거냐?]
순간 주변 바람이 뒤로 밀려나고 거대한 무언가가 내 오른편에 내려 선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레스가 자 세를 한껏 낮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
[그렇습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내 왼편에 또 다른 거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빛으로 이루어진. 로봇이 라기보다는 빛의 정령으로 보이는 외향의 기가스.
초월병기 92번.
라 (RA) 이다.
“물론. 아주 괜찮지.”
[뭐야? 넌 또 어떻게 여기에 온 거 야? 세레스티아 옆을 지키고 있지 않았나?]
[그랬었는데 느닷없이 열린 구멍으 로 빨려 들어오고 말았지. 그리고
벌어진 일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 지만… 날 고통스럽게 하던 신성이 이제야 빠져나갔다는 게 느껴지는 군. 왕이여. 다시 신성을 받아들인 건가?]
“그렇게 되었지. 하지만 억지로 떠 넘긴 다음 이렇게 된 건 좀 무안하 네.”
[어차피 버거운 힘이었다. 하지만…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레온 하르르 제국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왕관 형태의 나는 제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으니.]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어떻게든 책임을 져주긴 해
야겠지.”
원래 내 것이었고 강제로 뺏어 온 것도 내가 아니긴 하지만 결국 내가 흡수해 버렸으니 어느 정도 상황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상체를 숙이고 있던 아레스의 머리 가 열리며 나를 잡아 조종석에 태운 다.
번쩍!
그리고 눈부신 빛과 함께 왕관의 형태로 변한 라가 아레스의 머리에 씌워진다.
의식이 확장되어 우주로 향한다.
“뒤처리부터 완벽하게 해야겠지.”
“어? 대하야 어디 가?!”
저 아래에서 날 부르는 형의 목소 리가 들린다. 그뿐이 아니다. 저 멀 리에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플 레이어들의 안내를 받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도 보인다.
‘어머니라.’
꽤 훤칠한 신장의 소녀는 어이없게 도 나의 친모이다. 심지어 그 나이 는 고등학생!
내심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짓는 다.
‘아니,형하고 동갑이잖아… 심지 어 나보다는 훨씬 어리네.’
얼굴 한 번 안 보이던 아버지가 여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종말 프 로젝트의 힘을 이용해 어머니를 되 살리기 위해 암약했던 모양이다. 심 지어 나도 형도 얼굴조차 본 적 없 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 까지 걸어버리다니?
내가 신성을 수습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어머니를 얻고 아버지를 잃는 막장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보다……
나는 형을 보았다. 형의 머리 위에 한 단어의 문자가 쓰여 있다. 어머 니의 머리 위에도,기가스들의 머리 위에도.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한 단어의 문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과거 내가 볼 수 있었던 칭호와는 차원이 다른 종류의 정보 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그야말로 그들의〈모든 것〉이 표 시되어 있다.
성격과 성향과 취향과 습관,그 근 본과 정체성,살아온 생애,심지어는 앞으로의 미래까지…….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진명(眞 名)? 통합 정보?’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알았 다.
이걸 자유롭게 편집하게 되는 순 간.
친부가 그토록 원했던 [관리자]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안 되지.’
그러나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권능은 물론 절대권능까지 우습게 볼 정도의 힘이었지만-
감히〈캐릭터 편집〉을 하려 들었
다가는… 창조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고대의 올림포스 신족처럼 소멸해 허신(虛神)이 되고 싶지 않다면 쳐 다보지도 말아야겠지.
‘그보다는 내 신성하고 권능이나 살펴야겠다.’
나는 친부에게서 문명과 정보의 신 성,더불어 그가 영락해 얻게 되었 던 기계신의 신성을 얻었다.
‘그리고 게임의 신이 되었지.’
덕택에 내가 타고난 권능이 상대의 [모든 것]이 머리 위에 표시되는 새 로운 권능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천천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겠지.
‘대신 게임 카테고리를 벗어나는 기계신의 권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조종술,제작 등등 게임 카테고리 에 들어가는 권능들은 오히려 강화 되었지만 기계문명에 관한 권능들은 약화되거나 심지어 사라지기까지 했 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 그것 들을 가지고 아담이 기계신으로 부 활하게 되겠지.
‘다른 권능은 몰라도 절대명령은 좀 아쉽구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계들이 나에게 가지는 강력한 호감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라나 아레스 가 떠날 거라고 걱정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아담이 와서 [절대명령]을 사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진 않겠지.’
뒈지기 싫으면.
파라락.
내 앞으로 한 권의 책이 떠올라 저절로 페이지가 펼쳐졌다.
〈신의 한 걸음〉
〈점프. 우주 여행자를 위한 지침서〉
〈허공도(虛空道)〉
〈은하를 뛰어넘는 용〉
네 개의 초월기가 저절로 발동하며 단 한순간에 우주 한가운데로 이동 한다.
-그아아아아!!!
도착과 동시에 무지막지한 포효가 온몸을 후려친다. 주변에 있던 행성 들이 박살이 나 흩어졌지만 나는 그 모든 충격을 가볍게 흩어버리며 녀 석과 마주 섰다.
“흉하구만.”
그것은,거대한 괴물이다.
어찌나 큰지 머리통 하나만 떼어놔 도 지구와 맞먹는 사이즈를 가지고 있다. 온몸에 잔뜩 나 있는 수십만 개의 눈동자와 마치 촉수처럼 보이 는 수만 개의 팔다리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 광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기괴하다.
一너! 너어어어--!!!
녀석이 나를 보며 포효한다. 무지 막지한 기세지만 코웃음이 나올 뿐
이다.
“겁먹은 개가 짖는구나.”
녀석은 지구에서 너무나 많은 손해 를 보았다. 녀석의 힘,녀석의 설정, 녀석의 자원,녀석의 생명이 지구에 잔뜩 투입되었는데 막상 되돌려받지 는 못했기 때문이다.
회사에 재산을 몽땅 투자했는데 상 대방이 그걸 들고 날라 버린 상황이 다.
“뭐,억울해할 게 있나? 좋은 뜻으 로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다 집어 삼키려고 투자를 한 건데.”
태연히 말하는 나에게 종말 프로젝
트,아니,[종말의 마수]가 덤벼든 다.
행성을 부수고 위성을 잡아먹는 규 모를 가진 마수의 맹습!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물리적인 크기와 힘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차라리 [시스템] 형태인 종말 프로 젝트가 더 상대하기 까다롭다.
“좋아.”
가볍게 손을 뻗었다.
다른 정명한 생명체들과는 다르게 언네임드는 창조신의 관심을 받지 않는다. 절대로 사용되면 안 된다고 금단 병기라 이름 지어진〈설정 파
괴탄〉의 유일한 사용처가 괜히 언 네임드인 것이 아닌 것.
나는 녀석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문장을 ‘인식’했다.
그리고.
“초코 볼.”
편집한다.
아무리 언네임드라도 녀석 정도의 격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을 기술이 었지만 지구에서 본 손해로 크게 손 상된 종말의 마수는 이를 견디지 못 했다.
팟!
행성보다도 거대한,수십만 개의
눈과 수만 개의 팔다리를 가진 괴수 가 사라지고 손바닥 위로 초콜릿으 로 만들어진 과자 하나가 모습을 드 러낸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었다가는 편 집이 풀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 는 난 즉시 움직였다.
꿀꺽.
그것을 삼킨 것이다.
쿵!
배 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그러나 나는 스탯, 영약,스킬,자원 등등의 형태로 녀 석의 힘을 흡수한 경험이 있었고.
지금의 나는 이 흡수를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 돌릴 만한 역량이 있었다.
[특성 고유세계 (Legend++++) 가 랭 크 업 합니다!]
[SS랭크 一 SSS랭크]
고유세계가 확장된다. 심지어 한 번으로 끝도 아니었다.
[특성 고유세계 (Legend++++) 가 랭 크 업 합니다!]
[SSS랭크 一 SSS++랭크]
[특성 고유세계 (Legend++++) 가
랭크 업 합니다!]
[SSS++랭크 -* SSS++++랭크]
무려 다섯 번의 랭크 업! 시스템의 인식 한계는 SSS랭크가 끝이었기에 추가적인 랭크 업은 그저 +가 추가 되는 형태로만 표시되었다.
쿠구궁!
당연히 고유세계에 난리가 난다. 그러나 고유세계의 건물들은 최초 건축 때부터 바닥에 고정하는 대신
배처럼 사철의 대지를 떠다닐 수 있 는 구조로 만들게 법제화했기에 빌 딩이 무너진다거나 도시가 파괴된다 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돌아가자.”
[…끝난 겁니까? 방금 그거,언터 쳐블급으로 보였는데.]
혼란스러워하는 라와.
[결말 참 허무하구만. 스테이지는 수십만 년도 더 걸렸는데.]
허무해하는 아레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금 급이 있는데 저런 부상 자하고 오래 싸우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니냐?”
[하긴.]
[왕다운 말씀입니다.]
납득하는 두 기가스와 함께 공간을 넘자 파랗게 빛나는 34지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걸 잠시 내려다보았다.
나는 과거 평범한 삶을 꿈꿨다. 그 건 영락해 물질계로 떨어진 뒤 매일 매일 고통 받아 온 친부의 소망이기 도 했다.
그러나 그냥 지구에서 평화를 만끽 했다면 폭주한 아담에게 잡혀 죽었
을 것이다. 순순히 신성을 받아들였 다 해도 언젠가 디카르마에게 자아 를 빼앗기고 말았겠지.
돌이켜 보면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내가 노력한 결과라고는 도저히 말 못 하겠군.’
우연과 우연, 기적과 기적이 겹쳐 진 결과다. 하필 종말 프로젝트가 34지구에 잠들어 있지 않았다면. 하 필 녀석의 스테이지가 게임의 형태 가 되지 않았다면. 정령신이 나에게 고유세계를 주지 않았다면. 또 다른 언네임드 후안이 정의,진실,명예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내가 사람들
의 우상이 되지 않았다면. 명월 스 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푸확!
대기권 안으로 들어선다.
저 아래,내가 앉아 조각을 이어나 가던 자리에 모여 있는 억 단위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저 잠깐의 시간 이 홀렸을 뿐이지만 거의 모든 인류 가 지금 이 장소로 모이고 있는 것 이다.
“라,날개.”
[어떤 용도로 만들어놓을까요?]
“그냥 크고 화려하게만 만들어. 저 아래에서도 보이게.”
[알겠습니다.]
라는 뜬금없는 말에도 별다른 반문 없이 내 말에 따랐다.
푸확!
아레스의 등에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30미터의 아레스가 손가락 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날개가 펼 쳐진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추락하 던 아레스의 몸이 일정 고도 아래로 내려가자 두 날개가 자연스럽게 양 력을 발생시켜 속도를 늦춘다.
나는 하늘에 떠 땅의 사람들을 보 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쩌면 관리자는… 인류를 사랑했 을지도 모르겠네.”
애증(愛情)이다. 인간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었기에 그토록 인간을 혐 오할 수도 있던 것.
땅이 가까워진다.
사람들의 소음이 귀에 들어온다. 소리치고 있는 사람. 서로 껴안고 입술을 맞추는 연인. 주저앉아 눈물 을 홀리고 있는 여인. 무릎 꿇고 기 도하고 있는 노인.
그들에게서 전해지는 [신앙]이 나 를 떠받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또한.
나의 존재가 온 우주에 새겨졌다는 사실도.
쿵!
바닥에 내려선다. 수천,수만,수억 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조금 전의 소란이 거짓이었다는 듯 경건 한 분위기.
나는 주먹을 든 오른손을 번쩍 들 어 올렸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린다.
대우주 전체에 널리 이름을 떨칠.
최상급 신격의 탄생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