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가린다.
대하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 고 서 있던 방어조의 리더,알렉스 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플레이 어들의 대화가 그에게 전달된다.
“비가 오겠는데.”
“다 진창 되겠네. 어차피 기가스에 타고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하지만 철가면 님은 지금 맨몸 아 니야?”
알렉스는 기가스들 중 하나가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사실 그 동작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와 그의 동료들,저스티스 리그는 대부 분 정의 무구의 소지자였기 때문이 다.
아마 그의 기가스 한편에는 대하를 [시청]할 수 있는 화면이 떠 있을 것이다.
끼긱. 끼긱.
대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없는 잔잔한 표정으로 정체 모를 철구를 조각하고 있다. 그가 조각을 할 때마다,글자를 하나 만들어낼 때마다 그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 치고 주변으로 영기가 휘몰아치는 모습이 보인다.
성지의 벽화에서나 볼법한 신성한 모습.
‘신.’
알렉스는 무신론자였다.
그는 악을 저지르는 것도,악을 심 판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인간뿐이라
생각해 왔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 켜보고 있는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있어 인간의 선악을 평가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오만이라 생각했던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인류의 선과 악을 평가해 상 과 벌을 내리는 신이,그리고 무엇 보다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이 존재한다.
그는 자신이 그런 존재를 절대 받 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인간이란 자기들 위에 올라서는 초월자를 용 납하지 않는 오만한 존재라 생각했 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철가면은 인류 전체가 긍정하 는 신앙의 대상이다.
“아,말씀드리는 순간 쏟아집니다.” 다른 플레이어의 속삭임대로 묵직 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 론 기가스가 젖는 일은 없다. 장갑 표면에 흐르고 있는 영기에 충돌해 사방으로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
“아니,이건……
“와……
플레이어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개중 몇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하고 있다.
여태 지켜보기만 했던 알렉스였지 만 경계 중에 이 정도의 방만함을 방치할 수는 없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경계에 집중 해!”
“하,하지만 장군님!”
“하지만? 지금 하지만이라고 한 거 냐?”
어처구니없는 반문에 기막혀하던 알렉스는 기가스들이 하나같이 자신 의 뒤편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몸을 돌린 그가
본 것은.
“이게… 무슨?”
놀라고 있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뭐야,이게……
“신이시여……
쏴아아!
쏟아지는 빗방울이 기가스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튕겨 흩어진다. 하지 만 그렇다고 빗방울이 어디로 사라 지는 건 아니었던 만큼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금세 진창이 되었다.
그러나… 조각을 하고 있는 대하의 주변은 다르다.
슈아아--
셀 수 없는 꽃잎들이 쏟아지고 있 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주변을 회오리치고 바닥에 쌓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높 은 인지능력을 기가스가 보조해 주 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조차 인식된다.
떨어지던 빗방울이 대하의 반경 1 킬로 안에 들어서는 순간 장미꽃 잎 으로 변하는 모습 역시.
장미꽃뿐이 아니다. 벚꽃도 있고 개나리꽃,국화꽃 등등.
빗방울이 가지각색 온갖 종류의 꽃
잎으로 변해 쏟아지고 있다.
팔랑! 팔랑!
쏴아아-!
“…맙소사.”
꽃이 쏟아지고 있다. 바닥에 가득 히 쌓이고 있었다. 심지어 범위 밖 에서 잔뜩 고여 졸졸 흘러들어 간 빗물조차 범위 안으로 들어가자 꽃 잎으로 변해 버린다.
끼긱. 끼긱.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대하는 조 각을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눈으로. 그리 고 정의 무구를 통해 지켜보고 있
“안! 돼!!”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인간뿐이 아니다.
종말 프로젝트의 아바타,검은 아 이 역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안 된다고!”
이를 벅벅 갈고 손톱을 다 물어뜯 으며 검은 아이가 꽥책 괴성을 질렀 다. 상당한 소란이었지만 뒤에 있는 일한은 가부좌를 취한 채 마네킹처 럼 앉아 있을 뿐이다.
“막아야 해! 죽여야 해!”
검은 아이는 쏟아지는 꽃잎 속에서
조각을 계속하고 있는 대하의 모습 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예전 스스 로의 규칙을 깨고 대하의 깨달음을 방해했을 때와도 비교가 안 되는 불 길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검은 아이는 또다시 규칙을 쩔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지 (Stage)가 오픈됩니다!
-레벨 20. 상급(上級)이 설정되었 습니다.
-제한 없음. 종말의 거인을 전멸시 키시오.
아직 중급 난이도가 끝나지 않았음 에도 상급 스테이지가 시작된다.
“그래! 이번에도 막으면 돼!!”
미친 듯 소리 지르며 새까만 오오 라를 쁨어내는 검은 아이. 그는 승 리를 확신했다.
한 번에 소환되는 20레벨의 거인 10체! 그리고 21레벨 거인 1체!
아무리 지구의 초월자가 공간을 마 음대로 넘어 다닌다 해도,아무리 많은 인간이 진을 치고 있다 하더라 도 한 번에 이만한 규모의 초월자를 상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다
하더라도 모조리 박살 내고 저 망할 반칙쟁이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순 간.
“…드디어.”
지금껏 눈을 감고 있던 일한의 눈 이 떠진다.
“선을 완전히 넘었군.”
-스테이지 (Stage)가 오픈됩니다!
-레벨 20. 상급(上級)이 설정되었
습니다.
-제한 없음. 종말의 거인을 전멸시 키시오.
난데없이 떠오르는 텍스트에 플레 이어들 모두가 기겁했다.
“뭐,뭔 소리야!? 아직 중급도 끝 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미친! 설마 종말의 거인이 10마 리,아니면 20마리씩 나타날 거라는 건가?”
“아니,이런 게 어디 있어? 스테이 지를 클리어할 것 같으니 꼬장을 피 우다니!”
“비상! 비상 상황 발령! 대기 인원 전부 출동시키라고 전해!”
모든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전투 모 드에 들어간다. 아직 적이 나타나지 는 않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뻔히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건 못 막는다.’
지금 인류의 모든 역량이 5기의 거인을 해치우는 데 집중되어 있다. 교대 인원이 있지만 휴식 중인 그들 이 어느 세월에 전투 준비를 하고 전선을 짤 수 있겠는가?
하물며 한두 기도 아니고 10기 이 상이 추가된다면?
혹시나 그 10기 이상의 거인 중 자폭병이 섞여 있기라도 한다면?
하루 만에 플레이어들이 전멸하고 그들을 수호하는 신,철가면이 죽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모두!!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켜 라!!”
“네!!”
“제길! 다 깨가는데! 이제 정말 다 왔는데!”
“으아아!!!”
포효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기세가
폭발한다. 절망의 순간에도 패닉에 빠지지도 공포에 주저앉지도 않는 역전의 용사들!
그리고 그 순간 새로운 공지가 떠 오른다.
-시스템이 일부 업데이트됩니다.
-종말의 거인이 스페셜 보스,함은 정으로 변경됩니다!
-스페셜 보스는 2개의 특수 능력 을 가집니다.
수렴: 동일 시간 선에 등장하는 모 든 스테이지 몬스터의 힘이 스페셜 보스에게 수렴됩니다. 등장하는 적
은 스페셜 보스뿐입니다.
불사(不死): 스페셜 보스는 스스로 원치 않는 이상 죽지 않습니다.
한순간 전장이 침묵에 잠긴다. 다 들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공지 를 읽고 있다.
“이,이게 뭐야. 모든 몬스터의 힘 을……. 그러니까 남은 인류가 5억 이니까……. 종말의 거인 50억… 혹 은 100억 마리 이상의 힘이 한 몬 스터한테 집중된단 말이야?”
“중급 스테이지의 거인도 남아 있 으니 200억 이상일지도 모르지.”
“그럼 대체 레벨 몇 정도의 적이라 는 건데……
“아니,그보다 불사 이게 뭐야. 스 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안 죽는다 고? 이게 뭔 개소리야??”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설명에 플레 이어들 모두 할 말을 잃는다.
놀라고 있는 건 그들뿐이 아니다.
종말의 거인들을 조종하려던 검은 아이는 느닷없이 바뀌어 버린 체계 에 당황해 물었다.
“뭐야! 너,뭘 한 거야? 스페셜 보
스라니?”
“굳이 시간 질질 끄는 것보다 강력 한 보스 하나로 밀어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차분한 대답에 살짝 수그러든 검은 아이가 묻는다.
“불사 능력 뭐야? 이런 게 가능했 어? 완전 사기 능력인데?”
“능력을 잘 특화시키면 가능하지 요.”
“진짜? 아닌데 안 되던데……
검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
팟.
스페셜 보스,함은정이 플레이어들 앞에 나타난다. 그 너머에는 조각을 하고 있는 대하의 모습이 보인다.
스페셜 보스 함은정이 말했다.
“여기가… 어디야? 난 죽었는데?”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멍한 표정 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국이나 지옥으로는 안 보이는 데. 게다가 저 로봇들은 뭐야?”
중얼거리는 그녀를 플레이어들 역 시 발견한다.
“9시 방향! 소녀의 형상을 한 거수 자가 등장했습니다!”
“민간인 아닌가?”
“아닙니다! 스페셜 보스! 스페셜 보스 함은정입니다!”
“모두 대기!! 명령이 있기 전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마라!”
그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공지사 항 때문에 플레이어들 역시 섣불리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적이 얼마나 강한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특수 능력 수렴과 불사가 가지는 압박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 이다.
그런데 그중 몇몇 플레이어가 말했 다.
“저,저기요. 대장님.”
“뭐냐?”
“저기,함은정이라는 이름이… 왠 지 익숙한데요.”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 거 지?”
“역사책에서 본 거 같은데……
“뭐?”
플레이어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역 시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스페셜 보스 함은정은 문득 자신의 손에 접 힌 쪽지 하나가 들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쪽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익숙한 필체로 짧은 내용
이 적혀 있다.
[보는 즉시 항복해.]
- 일한이가.
“이게 무슨 소리야… 항복?”
얼떨떨한 목소리.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축하합니다! 스테이지가 완벽하게 클리어되었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여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축하합니다! 스테이지가 완벽하게 클리어되었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기여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두 개의 스테이지가 클리어 된다.
그뿐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이것으로 모든 스테 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잠시 후 정산 절차가 완료됩니다!
“…뭐? 뭐지?”
“뭔 소리지? 끝이라고? 모든 스테 이지가 완료되었다고?”
“종말 프로젝트가… 끝나?”
혼란스러워하는 플레이어들 .
그리고 그 모든 이들보다 더 크게 놀라는 존재가 있었다.
“취소!!! 취소야!!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항복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스테이지 클리어는 취소 야!!! 항복 따위는 없어!”
검은 아이가 미친 듯 발악하며 소 리친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일한은 고개 를 흔들었다.
“거부한다. 항복은 패배와 같으니 틀림없이 스테이지 클리어 조건이 될 수 있다.”
“취소! 한다고!!!”
“거절한다.”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발작하듯 소 리 지르던 검은 아이가 고개를 돌려 일한을 바라본다.
온통 새까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아이의 눈만이 새빨갛게 빛나 고 있다.
“너. 너어어어어——
쿠구구구---
강렬한 기운이 끓어오른다.
“감히!!! 감히--!!! 감히감히감히 ——!!!”
터져 나오는 포효!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한은 한 걸음 물러섰다.
좌악!
“통합 스킬 가동.”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었다. 잠 시 후 정산 절차가 마무리될 때까지 [취소 요청]이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스테이지는 완전히 종료되고 종말 프로젝트는 힘이 부족함에도
강제로 종말의 마수로 변형되게 되 겠지.
‘즉. 이제 시간만 끌면 된다.’
턱.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묵직한 디자인의 클레이모어가 그의 손에 잡힌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웅혼한 기운 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일한이 말했다.
“을 마스터.”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