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형이 초월지경에 이르면서 혼란이 가라앉는다.
스테이지 진행이 안정적으로 변하 면서 사상자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종말의 거인을 죽이는 속 도 역시 미친 듯 빨라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외부] 상황일 뿐이지만… 종말의 거인이 죽을 때 마다,전투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은 막대한 경험치를 벌었고,그렇게 번 경험치는 신앙과 함께 바쳐져 신성 을 강화했다.
그리고 그렇게 신성이 강화되면, 나는 그것을 그저 먹는 대신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다음 차… 앗!”
“어?”
'오오오!!!”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번쩍 들며 기 뼈한다. 그러지 못한 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철가면 님께서!”
“철가면 님께서?”
“새로운 가호를 내리셨어!”
그들의 말대로 나는 새로운 권능, [스킬 북]을 만들었다.
어빌리티 북처럼 그냥 얻는 능력은 아니고 일종의 신성 주문 목록이다. 직접 익혀야 하는 능력이기에 어빌 리티처럼 경험치나 신앙을 바칠 필 요는 없지만 대신 다른 것들이 필요
하다.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스킬도 있고 노력과 재능이 필요한 스킬도 있지 만.
대체로는 ‘재화’가 필요하다.
왜 재화가 필요하냐면 장치가 필요 한 스킬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가스 콜- 구매한 레어 메탈 제 품을 이용해 기가스를 불러낼 수 있 다. 스킬 랭크 상승 시 불러낼 수 있는 기가스의 등급이 상승한다.]
[긴급 방어- 구매한 제품에 영력 을 저장해 위급 상황 시 본인을 보
호할 수 있다. 스킬 랭크 상승 시 효율이 상승한다.]
같은 스킬이 있다. 당연하지만 저 ‘레어 메탈 제품’은 나에게서 구매 해야 한다. 스킬의 종류를 늘릴 여 유가 없어서 일단 10개만 만들었다. [외부 배터리]. [오늘의 어빌리티 갱 신]. [조종술의 가호 갱신] 등 보조 능력 중심이다.
또 시간이 지난다.
이번엔 새로운 권능,[레벨 북]을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건 대부분의 플레이 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권능 이다.
“쳇. 역시 종말 프로젝트 녀석하고 겹치나.”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스탯 시스템 을 중첩해서 내려줄 수는 없었다. 사실 플레이어들은 스스로의 역량보 다 레벨이 훨씬 높은 이들이 대다수 라서 굳이 기존의 레벨 시스템을 걷 어버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
그러나 종말 프로젝트의 스테이지 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는 걸 감 안해야 한다.
지금 살아남은 인류 대부분이 플레 이어인 것은 사실이지만 온갖 이유, 그러니까 어렸다거나 아팠다거나 그 것도 아니면 그냥 강철계에서 살아
왔다던가 하는 이유로 스테이지를 진행하지 않은 이들 역시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 역 시 스테이지의 레벨 시스템을 이용 하지 못할 테니 레벨 북은 반드시 필요하다.
“큭! 득큭큭!”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I ”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잠시 외부에서 눈을 돌려 내면세계 를 살폈다.
내 앞에 주저앉아 있는 디카르마의
모습이 보인다.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모습은 한계까지 내몰린 그의 상황을 보여준다.
“어이가 없군… 내가,내가 발판이 된다고? 네까짓 어린놈에게 내 가……‘?”
주도권 싸움은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플레이어들이 계속해서 바 치는 신앙이 아직 위태롭던 [게임의 신]으로서의 신성을 보완하고 강화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라는 개념은 이렇게 쉽 게 압살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지 만… 디카르마는 기계라는 개념을 완벽히 장악한 존재가 아니다. 해당
개념에는 [아담]이라는 강력한 경쟁 자가 있는 것이다.
오오오오---!
나는 신성을 피워 올렸다. 신성을 이렇게 [소모]해 버리면 그걸 복구 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 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녀석을 치 울 필요가 있다.
“함께해서 엿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러나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는 순 간.
쿵!
세계가 흔들린다.
“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와중 새로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20대 초반 의 청년. 뚜렷한 이목구비에 까무잡 잡한 피부를 지닌 사내,후안.
디카르마가 웃었다.
“너만 뒤로 다른 짓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후안, 여기 왜 왔지?”
“•••인류의 신은 내가 되어야 한다.”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녀석을 들여 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던 녀석의 눈동자가 질투와 광기로 이글거리고
있다.
‘그렇군.’
녀석은 신이지만 신이라고 완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나만 해도 그 러했고,[나]의 경우는 뭣도 모르는 애송이로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녀석은 인류 문명이 태동한 이후 가장 정의롭고 진실하며,명예를 지 향하는 인류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위업이었지만… 그 건 녀석이 대단한 지혜를 가졌기 때 문이 아니라 그저 강대한 권능을 가 졌기에 가능한 일일 뿐.
정의와 진실,명예라는 거대한 영 향력을 발휘하던 그였지만 그 본질
은 그저 편협하고 치기 어린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디카르마,녀석을 불러와 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후안은 외 부의 존재야. 주도권 싸움에 영향을 줄 수는 없을 텐데.”
느닷없는 후안의 등장에 내가 의문 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고오오---!
내면세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 한다. 내가 여태껏 차지했던 주도권 이 엉망으로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
진다.
“이게 뭔……?!"
“애송이 녀석! 하하하하!!!”
디카르마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린 다. 녀석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지만 디카르마의 손짓과 함께 허공이 갈라지고,그 사이에서 모습 을 드러낸 물건이 단번에 상황을 이 해시 킨다.
웅-!
여태껏 내가 모아왔던 신성을 가볍 게 능가하는 강대한 빛이 내면세계 전체를 진탕시킨다.
그것은 빛의 왕관.
그 정체를 깨달은 내가 비명을 질 렸다.
“미친놈아! 이걸 왜 가져와?!”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저건] 기계 신이 신성이 아니다. 그보다 더 상 위의,기계신을 잘라내고 남은 문명 과 정보의 신의 신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결코 디카르마에게 좋 은 일이 아니다. 예전이면 몰라도 이제 녀석도 그걸 알 텐데 이딴 깽 판을 치다니!
번쩍!
눈이 멀 것 같은 빛과 함께 내면 세계가 찢겨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거대한 신성의 폭발이 모든 것을 뒤 덮었다,
- 아.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한 사내를 보았다. 마치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 모습이 특정되지 않는 무언가의 모 습.
녀석이 말했다.
- 망했군.
“넌 또 뭐야?”
-나는 [투쟁]이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그 정체를 깨달았다. 후안의 아버지라던 언네 임드의 이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아니, 곱게 뒤진 놈이 없네.”
-너무 그러지 마.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생명의 본능 아니겠나?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실패한 모양이 야.
녀석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살아남아 날 만들다 만 창조신 녀석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 었는데…….
번쩍!
다시금 터져 나온 빛에 투쟁의 몸 이 찢겨 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사내가 모습을 드러
낸다.
“오,이제야 끝나가는 모양이구려.”
“…명월 스님? 아직 살아계셨습니 까?”
“죽기는 예전에 죽었지요. 내 시체 는 아직도 정의의 요람에 있다오.”
그렇게 말하는 명월의 앞에 한 시 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짝 마른, 뼈 위에 한 겹의 거죽을 둘러싸고 있을 뿐인 [허물].
내게 말을 걸고 있는 후덕한 턱살 에 불룩한 배를 가진 사람 좋아 보 이는 명월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명월이 말했다.
“내가 우주의 비밀 하나를 알려 드 려도 되겠소?”
뚱딴지같은 소리였지만 그것이 유 언이라는 걸 눈치 천 나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우주의 비밀 말입니까?”
“나는 정의의 요람에서 [업]의 존 재에 대해 깨달았소. 기연이었지. 업 을 직접 다루는 삼신의 존재. 그리 고 그 업의 힘으로 만들어진 정의의 요람이라는 공간이 나에게 전혀 새 로운 감각을 일깨워 준 것이니까.”
파스스스...
바짝 말라 있던 시체가 먼지로 변
해 흩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 며 명월이 말했다.
“업은 태어난 생명의 모든 것을 결 정하오. 재능,환경,심지어 천성까 지……. 윤회(輪週)로 인해 인간이 가진 가능성과 업이 쌓여가는 것이 지요.”
번쩍!
과르릉!!!
내면세계 전체가 미친 듯이 요동친 다. 단숨에 우리 모두의 존재를 찢 어버리겠다는 듯 난장을 부린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모든 흐름 이 우리와 유리되어 있음이 느껴진
명월이 말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다음 생에 지능 이 높은 존재로 태어나오. 자신의 힘으로 큰 부를 손에 쥐었다면 금수 저를 물고 태어나게 되고 몸을 많이 썼다면 합당한 육체적 능력을 타고 나게 되지. 업 자체를 보게 된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소.”
인간은 윤회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렬한 업을 쌓아나가며,그렇게 쌓 인 업이 많을수록 초월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업이 마냥 쌓이기만 하는 것 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방만하게 살면 힘겹게 쌓은 부(富)의 업은 사 라지오. 똑똑한 머리를 타고나 그것 을 활용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지. 세 상 모든 존재는 무한히 굴러가는 윤 회 속에서 업을 쌓아가지만 계속해 서 위로 갈 수 있는 존재는 한 줌 의 한 줌도 되지 않지요.”
명월의 몸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한 다.
“그렇다면 당신도… 초월하는 겁니 까?”
“방법은 있었지.”
갑자기 가벼워진 말투로 명월이 말
했다.
“업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난 알 았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을 나락으 로 빠뜨린 자들을 용서하려고 했었 고… 만약 진실로. 내 마음 깊은 곳 에서부터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 다는 것을.”
명월이 말했다.
“그래.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긍흘(務懷)히 여기는 존 재. 온 세상을 대자대비(大慈大悲) 하게 바라볼 수 있는 초월적인 존 재. 저기에서 자신의 신성에 목매는 태생신과도 전혀 다른 초월자!”
우우우--!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내면 세계가 뒤흔들린다. 마치 [세계]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그를 설득하는 듯 기묘하기까지 한 현상.
그러나 명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아니다.”
그가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원한을 품고 살아가는 것 또한 나 (我)다. 그것을 그냥 버리는 것은 인간성 역시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지.”
그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진다. 나
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웃으실 수 있습 니까?”
“그야.”
씩 웃는 명월의 웃음이 마치 악동 같다.
“다음 생의 나는 절세미남이 될 테 니까.”
«..
“하하하!”
나는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 러다 간신히 힘을 내어 되묻는다.
“그,뭐,네???”
“하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건 결정 사항이지! 나는 세계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선업을 쌓았고 선업은 매력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틀림없 이 세계적인 미남이 되겠지!”
자신이 온 세상에게 사랑받을 존재 가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물론 절세미녀가 될 가능성도 있 지만…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 는군. 게다가 나는 재물도 꽤 모았 으니 적당히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 날 거고 머리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다. 몸도 괜찮게 타고나겠지. 이 정도면 거의 축복받은 삶 아니겠 어?”
“아,아니……
기막혀하는 나를 보며 명월이 웃는 다. 그의 모습이 더 흐릿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부신 빛 속에서 한결 차분해진 그의 목소리 만이 들렸다.
“나는 인간으로서 죽겠소. 당신은 신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시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그가 말 한다.
“부디,좋은 신이 되기를.”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