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화
온 세상을 다 박살내 버릴 듯 치 열하게 싸우던 두 거인이 사라지자 이면세계가 침묵에 잠긴다.
“운이 좋았군……
밀레이온은 근처에 굴러다니던 바 위에 몸을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언터쳐블을 상대로,그것도 위명이 쟁쟁한 기계신 디카르마와 하와를 상대로 승리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온갖 보정과 지원을 받는다 해도 어 떻게 황제 클래스 둘이 언터쳐블 클 래스 둘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단 말인가?
대전쟁 때 황제 클래스와 언터쳐를 의 교환비가 10:1을 훌쩍 넘었다는 걸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밀레이온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승리는 그가 잘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황이 급하게 흘러가다 보니 이렇 게 된 것이지,사실 그 역시 승리가 아닌 도주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만약 전투 중간에 갑자기 디카르마 가 침묵하지 않았다면 그로서도 큰 손실을 감수하고 최후의 수를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져왔어!”
“봉인은 제대로 했어?”
“당연하지.”
창백한 얼굴의 제니카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뭔가를 들고 밀레이온 의 옆으로 돌아온다.
“…나 참. 도망이나 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하하하! 그래도 좋지 않아? 하와 면 연합의 대적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네임드인데. 게다가 우리가… 우웨엑!!”
신나서 출랑거리던 제니카가 피를 토한다. 밀레이온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어? 초월 주문은 원래 하루에 한 번만 써야 하는데… 아이고!”
제니카가 털썩 주저앉더니 밀레이 온의 몸에 기대며 눕는다. 밀레이온 은 그런 그녀를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았지만 이내 한숨 쉬며 힘을 풀었다.
“죽겠군… 몇 년은 정양해야겠어.”
“나도 주문 사용에 애로 사항이 꽃 피겠는걸… 한동안은 궁극 주문도 힘들 정도니 죽었다 하고 숨어 있어 야겠어.”
“하긴, 너 죽이겠다고 신나서 날될 녀석이 한둘이 아니지.”
“뭐래,그런 녀석은 네 쪽이 훨씬 많거든?”
그들이 그렇게 투닥거릴 때였다.
후우웅-!
하늘에서 빛이 떨어진다. 늘어져
있던 밀레이온은 어느새 클레이모어 를 들고 몸을 일으켰고,제니카의 머리칼이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올 을이 일어난다.
“아빠?”
밀레이온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하 를 바라보았다. 잠시 디카르마가 아 닐까 의심했지만 느껴지는 기색이 다르다.
대하 역시 밀레이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아빠가 아니군요?”
“흠.”
밀레이온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 었다. 그는 대하의 존재를 알고 있 었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 다. 그가 34지구에 왔던 것은 대하 의 모친이 태어날 때쯤이었고 대하 에 대한 이야기는 편지로만 받았기 때문이다.
“안녕!”
그런데 그가 대답하기 전에 제니카 가 끼어든다.
“너! 날 참 오래도 이용해 먹었지?” 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대하가 웃었다.
“대신 살려 드렸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지만 살려준 다음에 도와달라면 되잖아!”
“그러기엔 마도황녀님의 위명이 워 낙 무시무시했던지라.”
대하의 말투는 극도로 차분하다. 빛나고 있는 두 눈은 앞에 있는 밀 레이온과 제니카가 아닌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듯 멍하다.
“디카르마는 어떻게 된 거지?”
“아직 싸우는 중입니다. 당신은 아 빠와 무슨 관계죠?”
“소개가 늦었네. 밀레이온. 다른 지 구 출신이지. 이건영이라고 불러도 되고… 네 아빠와는 동일인이다. 적
어도 과거에는 그랬다는 말이야. 지 금은 좀 다른 모양이지만.”
밀레이온은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다. 사람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영혼을 찾는 것이고… 너의 어머니는 그 후 보 중 하나였지. 꽤 유력하기는 하 지만 유일한 후보는 아닌데다 나도 워낙 바쁜 상황이라 분신 중 하나를 그녀 옆에 남겨두고 떠났었다.”
“그게 우리 아빠라고요?'
대하의 물음에 밀레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관일한이라는 이름이었지.
하지만,어느 순간 녀석이 갱신을 하지 않게 되었어.”
“갱신이요?”
“지금까지 얻은 경험과 기억을 본 체인 나에게로 보내고 육체를 갱신 하는 과정 말이야.”
대하는 어머니가 죽으면서부터 아 버지가 본체인 그와 다른 생각을 하 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마 법사가 남긴 안배. 깨어날 게 뻔한 종말 프로젝트의 존재를 알고 장기 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아마도.
아마도…….
“일단 제 차원으로 가서 부상을 회 복하세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비교적 멀쩡한 외향이었지만 대하 는 밀레이온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니카 역시 그보다는 나아도 제대로 된 힘 을 쓸 수 없는 상태.
제니카가 물었다.
“괜찮겠어? 우릴 받아들이면 몇몇 세력들이 널 건들 텐데.”
“누가요?”
질문이었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 다.
누가.
감히?
밀레이온은 대하를 바라보았다. 그 의 눈이 밝게 빛나고 있다. 그 빛이 어찌나 강한지 스펙트럼이 번져 나 갈 정도다.
팟팟!
밀레이온과 제니카가 고유세계로 이동한다. 다만 제니카가 들고 있던 물건 하나는 그렇지 못했다.
두근!
그것은 심장이다. 물론 생명체의 그것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심장.
“아이언 하트라.”
고유세계로 이동한 제니카가 뭐라 뭐라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 하는 무시하고 아이언 하트를 살펴 보았다.
원래 하와에게는 아이언 하트가 없 지만 잠시 기가스의 형상으로 화하 면서,그리고 그 상태로 죽으면서 아이언 하트만이 남았다. 수백 미터 가 넘는 육신을 이루던 금속은 모조 리 사라지고 오로지 이 심장만이 남 았다.
쿵!
그것을 고유세계로 넣어보려 했지 만 실패한다. 밀레이온이나 제니카 와 다르게 하와는 제대로 된 신성을 가진 존재다. 그녀는 리전의 존재를 수호하는 일종의 종족신이기 때문에 기계신이라는 자리를 포기해 버린 대하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니.”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야! 정신 차린 거야!?]
의식을 고유세계로 넘기자 두 관제 인격의 목소리가 급박하게 그를 반 긴다. 거기에 담긴 걱정에 대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러나 회포를 풀 시간이 없다.
“지니,내 피를 좀 뽑아 가.”
[혈액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대하는 지니에게 하나의 설계도를 [전송]했다. 그 설계도를 확인한 지 니가 되묻는다.
[함장님,게이트라니…….]
“내 피 말고는 평범한 구조야. 가 급적 3시간 안에 만들어줘.”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 어가 평소 사용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자 그가 앉은 의자의 형상이 변한다.
-당신은 챌린저 랭크입니다.
-당신은 챌린저 랭크입…….
-당신은 챌린저 랭…….
-당신은 챌…….
-당신은…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텍스트가 뭉개진 직후.
번쩍!
[이건……J
[…지니,주변을 차단해. 중요한 순
간이야.]
[그러지요.]
[하. 설마 이런 장면을 또 보게 될 줄이야…….]
두 관제인격이 놀라고 있는 사이 현실로 의식을 옮긴 대하는 근처에 있는 바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정의의 조각칼을 꺼내 들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 간뿐. 시간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 되리라.
■지만 그걸 절대 두고 보지 않을 녀석이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스테이지 (Stage)가 오픈됩니다!
-레벨 20. 중급(中級)이 설정되었 습니다.
-종말의 거인을 처치하십시오.
-10초 후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10. 9. 8. 7…….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젠 스테 이지 간격도 없다 이거지?”
대하는 쓰게 웃으며 들고 있던 정 의 무구로 게시판에 접속했다.
-저를 보호해 주세요.(철가면)
내용도 작성했다.
-제작에 들어갑니다. 제작이 끝나 면 우리는 모든 스테이지를 끝내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작 와중 저는 무방비. 따 라서 종말 프로젝트의 공세를 막으 실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적은 초월자급일 가능성이 높으니 극도의 위험이 따르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대하는 그렇게 게시물을 올렸다. 잠시 끊었던 [시청] 또한 이미 켜놓 은 상태였기에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
[네,함장님.]
“전투 인원을 내 주변으로 배치하 고… 알바트로스함도 전력으로 도와 줘.”
[맡겨주십시오.]
대답을 들은 대하는 조각칼을 들었 다.
그리고 천천히.
하와의 심장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쿵!
현실에 내려섰던 종말의 거인이 차 원을 찢고 이면세계로 진입했다.
종말 프로젝트는 초월의 경지를 찍 어낼 수 없다.
물론 지금껏 종말 프로젝트로 인해 멸망한 문명들은 마지막에 초월자급 적을 만났지만 그건 종말 프로젝트 가 찍어낸 몬스터가 아니라 종말 프 로젝트 그 자체,즉 [종말의 마수] 의 아바타였다.
종말 프로젝트가 직접 조정해야만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한번 에 등장시킬 수 있는 숫자에는 제한 이 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상관없었다. 보 통 20랩 스테이지 쯤 되면 생존자 의 숫자가 극히 적어지기에 그 방식 으로도 충분했던 것.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10억이 넘는 생존자!!!
이렇게 되면 초월자 한 명보다는 19레벨 10억을 보내는 게 종말 프 로젝트 입장에서 훨씬 좋다. 아무리 19레벨과 20레벨이 신과 인간의 차
이라 불린다 하더라도 그 숫자가 10억 배나 차이 난다면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
그러나 이미 규칙을 어길 대로 어 긴 상황에서 스테이지 레벨과 다른 몬스터를 내보낼 수는 없다.
결국 지금의 종말 프로젝트가 할 수 있는 것은 20레벨 몬스터를 5마 리(중급 난이도임으로)씩 10억 번 보내는 것뿐이다.
“온다!! 포격 개시!!”
“비행편대 출동해! 철가면 님을 지 켜야 한다!”
걸어오는 종말의 거인을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포격이 쏟아진다. 하 늘에는 만 대도 넘는 비행형 기가스 가 벌 떼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과과광!!!
포격이 쏟아져 종말의 거인을 후려 친다. 막대한 물리적,영적인 파괴력 에 대지가 갈라지고 공간이 울린다.
그러나 그 순간.
기잉-!
한 줄기 빛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쿠콰콰콰광!!!
“산개! 산개해!!!”
“제기랄,한 방에 다 죽어버린다 고?!”
하늘에서 포격을 가하고 있던 비행 형 기가스들이 마치 살충제 맞은 벌 레들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플레이어들도 결코 호락호 락한 존재가 아니다.
기잉!
정면으로 쏘아진 회색의 빛줄기가 잔뜩 뭉쳐 있던 포격 부대를 후려친 다.
그러나 하늘을 가로지를 때와 달리 빛줄기가 가로막힌다.
'으… 아!!!”
빛줄기 앞에 커다란 덩치의 기가스 가 서 있다. 인급 기가스,이순신의
조종사 재석은 빛에너지를 진동에너 지로 변환했다.
우우웅!!!!
지금껏 다뤄왔던 그 어떤 진동과도 비교를 무시하는 파괴적인 진동! 그 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제어했지만 마치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주체하 기가 어렵다.
“쿨럭!”
“서연이 아빠!!”
“호,호들갑 떨지 마… 간다!!”
이순신에 내장된 어빌리티,일휘소 탕 혈염산하(一揮婦蕩 血染山河)가 발동한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 산을 물들인다는 이순신 장군의 검 명과 같이 거대한 힘이 광대한 공간 을 짓누르며 쏘아진다!
과르릉!!!
폭음과 함께 차원이 뒤흔들린다. 그러나.
퍽!
종말의 거인의 가슴팍에 생겨난 회 색의 방패가 그 모든 진동을 깔끔하 게 막아버린다.
“정비조!! 기체 정비 시작해!! 힐 러! 재석 님을 치료하고!!”
“교체 교체!! 부상자들을 빼!”
“세상에. 무슨 저런 괴물이……!”
“시간을 끌기도 힘들단 말인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그리고 그때.
탁.
허공이 갈라지며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소년이다. 새까만 머리칼 과 하얀 피부 때문에 마치 만화 캐 릭터를 그려놓은 것 같은,웃으면 화사하게 주변이 밝아질 정도의 미 모를 가진 소년.
“어? 사람? 드디어 이 괴상한 귀 신의 집 같은 게 끝난 건가? 아니
면 NPC?”
어리둥절해하던 소년은 이내 저 멀 리에 서 있는 거인과 그것을 공격하 고 있는 수천수만의 기가스를 보았 다.
소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무슨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 이다.
“•••여기 34지구 맞나? 막 43지구 같은 데로 온 거 아냐? 하지만 이면 세계로 온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투덜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뭐,저 사람들한테 물으면 되겠 지.”
어느새 그의 손에-
한 자루의 커터 칼이 들려 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