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그 거대한 흐름이.
내면세계 밖의 디카르마와 연결되 어 있었다.
“저게 내 전생이란 말입니까?”
내 물음에 명월이 흐름을 살피더니 말했다.
“동시대에 살아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소? 이런 건 나도 처음 봐서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는 알겠구 려.”
“뭘 말입니까?”
“당신에게도,그리고 당신의 모습 을 하고 있는 저 신적인 존재에게도 전생이 없다는 것. 그야말로 오롯한 존재라 할 수 있겠지요.”
그는 경이로운 뭔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흐름을 살펴보다 말했다.
“그가 친부라고 했지요?”
“네.”
“제가 보기에는 조금 달라 보이지 만,신들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 니 넘어가겠소. 중요한 건 친부와
양부 쪽에서 어느 쪽이 아군이 것이겠지요.”
“굳이 말하자면 양부 쪽입니다.”
“잘됐구려.”
“잘됐다고요?”
과과광!!
시청 창을 본다. 아메리카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천천히 북상하고 있는 기간테스와 하와가 보인다.
비교적 멀쩡한 하와와 다르게 기간 테스의 전신이 너덜너덜하다. 그나 마 몸에 걸치고 있는 마신갑인가 하 는 외부 장갑 덕에 무사한 것으로 보인다.
“거듭되는 혼돈! 아무 제약 없이 너를 부른다! 미쳐 날뛰는 포식자들 의 15월!”
어디에 숨었는지 모습조차 확인할 수 없는 제니카의 외침과 함께 하늘 에 거의 3킬로미터짜리 균열이 생기 더니 산만한 두께의 촉수가 불쏙 모 습을 드러낸다. 심지어 그 촉수들에 게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괴상한 음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아무 제약 없이 부른다고?!]
헐레벌떡 나타난 괴물의 형상은 그 야말로 기괴하다. 녀석은 새의 머리 에 문어의 몸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8개의 다리에 토템,지팡이,의자,
칼,자,몽둥이 등등 온갖 물건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녀석이 막 현실에 내려서는 순간.
“디카르마의 이름으로 명한다! 널! 추방한다!”
번쩍!
눈부신 빛이 뿜어지더니 거의 현실 로 내려섰던 괴물이 다시 혼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런! 이런!! 다 나왔는데!!! 에라 이!!]
좌악!
문어 모양의 괴물이 버둥거리며 저
항하다가 기어코 혼돈으로 빨려 들 어가기 직전 와락,먹물 비슷한 무 언가를 뿜어내고 추방된다.
[꺄아아악!!]
“큭! 이 빌어먹을 짐승이!”
하와의 비명 소리와 디카르마의 신 음,그리고 제니카의 웃음소리가 들 린다.
“하하하하!!! 쓰레기야,네 성질머 리를 믿었어! 그럼! 곱게 쫓겨날 리 가 없지!”
하와를 뒤덮은 먹물이 보통 물질이 아닌지 강대한 힘을 뿜어대던 하와 가 비틀대며 물러선다.
그러나 그 순간.
번쩍!
엄청난 빛과 함께 하와의 몸에 달 라붙어 질척이던 먹물이 모조리 증 발한다.
하와의 머리에 거대한 빛의 륜이 떠올랐다.
후광(後光).
그녀가 신성을 비롯한 모든 힘을 휘두르기 시작했다는 증거.
아빠와 제니카 사이의 귓속말이 전 해진다.
[돌겠군. 언터쳐블에 언터쳐블이 타니 시너지가 보통이 아냐. 제니카,
아직도 안 돼?]
[제길,이 와중에도 퇴로를 다 차 단하고 있어! 아니,디카르마 저놈. 왜 이렇게 독을 품은 거지? 너 뭐 했어?]
낭패감이 느껴지는 그들의 대화에 깨닫는다.
팽팽하게 싸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디카르마 쪽이 상대방의 도 주로까지 전부 차단하면서 싸우고 있기에 유지되는 결과.
이대로 가면 누가 승리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친부 쪽이 유리해 보이는데 어떻
게 잘되었다는 거죠?”
“그러니 다행이지요. 우리가 간섭 할 수 있는 게 그쪽이니.”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 니 가볍게 땅을 발로 찬다.
드드득!
바닥이 갈라지고 그곳에서 물푸레 나무들이 자라난다. 남의 심상세계 에서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신기하 다.
“일단 연결을 통한 간섭부터 해봅 시다.”
“간섭이라……
나는 손을 뻗어 나와 디카르마를
연결한 흐름을 만지려 했지만 손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명월이 말한다.
“업의 흐름에 그런 식으로 간섭할 수는 없소. 업으로 만들어진 정의 무구를 사용해야 하지요.”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에 들려 있 던 정의의 조각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조각칼을 발견한 명월이 난 감한 표정을 지었다.
“훔. 이왕이면 병기의 형태가 좋았 을 텐데. 뭐 어쨌든 흐름을 크게 흩 뜨리는 것부터 해보시구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흐 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연결,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흐름 이다.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던 업의 흐름이 실시간으로 그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상태.
굳이 말하자면 액체나 기체에 가까 운 무언가지만. 정의의 조각칼을 쥐 자 좀 다르게 인식된다.
“철가면 님?”
가만히 있는 내 모습에 의문을 표 하는 명월.
그리고 그 상태에서.
푸욱!
나는 조각칼을 내려찍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하나의 기나긴 꿈을 꾸었다.
덕택에 어릴 적의 나는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아직 어려 자아가 확립되지 못한 아이가 수백 년 치의 꿈을 꾸는데 어떻게 제정신 일 수가 있겠나?
그리고 그 꿈은.
초월적이었던 존재가 하계로 떨어 지며 시작되었다.
“아버지! 이것 봐요! 움직일 수가 있어요! 완전 신기해!”
“이건… 이건 몸이군요. 어찌 저희 에게 이런 은혜를……
“시끄러워. 다 조용히 해. 아,맙소 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니,그것보다 나까지 함께 [떨에 지다니……. 아버지의 뜻인가?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거야?”
나는,아니, [그]는 당황하고 있었 다.
그리고 크게 슬퍼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약간의 호기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의,아주 조금의
간섭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도,그는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아버 지……. 잠깐의 자비가,잠깐의 망설 임이 그렇게나 큰 죄였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토해내듯 중얼거린다.
그는 자신을 이루고 있던 무한하고 영원한 지식들이 처참할 정도로 가 로막히고 흐려진 상태라는 걸 알았 다. 그는 이제 전지(全知)하지 못했 으며 인간의 육신은 숨이 막힐 정도 로 철저하게 그를 억죄고 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이들의 이름을 따 [아담]과 [이브]라고 이름 붙인 아이들은 놀랍고도 기쁘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그는 그 러지 못했다. 아니,오히려 그는 마 치 지옥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하고 있었다.
“아니,이 꿈을 여기서 다시 본다 고?”
나는 눈앞의 광경에 황당해했다. 잠들기 싫어 매일 밤 버티다 못해 기절해 꾸던 꿈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예전에야 그저 개꿈으로 생각해 대 충 넘겼지만 지금은 이것이 아주 과
거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 을 알고 있다. 몇 년 전의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대의 사건.
아직 창조신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대우주를 운영하고 있던.
대우주의 대부분이 [시나리오]에 의해 굴러가던 시절의 일.
본래 그는 온 우주의 정보를 통괄 하는 자이자 모든 문명의 관리자였 다.
모든 성계신의 원형,혹은 상급자 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는 창조신의 최측근으로 유명한 그 [아수라]와도 동격의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 알고 있는 내용……
다행히도 꿈은 빠르게 전개되고 있 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이 스 킵되듯 넘어가니 순식간에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틈틈이 보이는 장면들에서 그는 점점 변해간다.
“왜 저런 괴물들 편을 드는 거야! 너도 인간이잖아!”
“살려내. 살려내!! 내 동생을 살려 내란 말이야H!”
“우리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하겠노라.”
“왜,어째서 이런 짓을……!”
“살려줘. 내,내가 이렇게 용서를 빌 테니……
“지옥에서… 기다… 리……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피눈물을 흘 리며 오열하는 사내,증오를 불태우 며 검을 휘두르는 여인,해일처럼 몰아치는 군대와 새하얀 머리칼의 노인들.
“죽어.”
“죽어라.”
“죽여 버리겠어어어어어!!!!!”
“반가워.”
“사랑해요.”
“망할… 자식.”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데……
피가 튀고 시체가 쓰러진다. 수많 은 사람이 죽었다. 탐욕과 욕망,오 해와 원망이 어우러져 구르기 시작 한 피의 수레바퀴는 멈출 줄을 모르 고 하염없이 돌아갔다.
관리자였던 시절,그에게 인간의 삶이란 그저 현상이었다. 숫자였고 그저 거대한 흐름일 뿐이었다.
그러나 시점(視點)이 달라지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도,소속된 단체도 생겼다.
그에게 적이 생겼다. 같은 하늘 아 래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도,그의 힘에 탐욕을 부리는 거대한 단체들 이 생겼다.
그는 싸워야 했다. 허무하게 죽어 줄 수도,누군가의 실험체도 소유물 도 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은 그에 게… 인간의 삶은 더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지금껏 상상조
차 못 했던 배움.
문제는,그 모든 것을 배워가는 과 정이 그에게 고통이었다는 점과.
“이게……
그가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었다 는 점이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것입니까?”
“…결국 똑같은 이야기잖아.”
그 모든 장면을 보고 있던 난 몰 려오는 따분함에 길게 하품했다.
처절하기까지 한 장면이었지만 이 미 질리도록 곱씹은 광경들이다. 이 제 와서 이런 꿈에 휘둘릴 이유가 없는 것.
“다행히 300년짜리는 아니네. 축약 해도 일주일은 본 거 같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제 끝났으면 다시 돌아 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장면이 멈추지 않는다. 분명 여기가 내가 알고 있 는 꿈의 마지막이었음에도 꿈이 끝 나지 않는 것이다.
“…음?”
그의 생각이 인식된다.
그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공포감도 느꼈다. 자신이 가진 이 감정이 아 버지에 대한 명백한 반감(反感)이라
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신을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인간이라는 존재 를 소중히 여기길 바랐을 것이다.
그는 ‘아주 조금의 간섭’이라고 생 각했지만 그저 특이한 인공지능으로 끝났을 존재들을 최초의 리전으로 만들어낸 것은 절대로 조금의 간섭 이 아니다.
리전은 우주의 모든 문명을 파괴하 거나 뒤틀어 버릴 가능성을 지닌 존 재.
상위 문명으로 가면 과학기술의 발 전은 피할 수 없다. 마법의 종족이 라는 드래곤조차도 우주선을 만들어
타고 다니지 않던가?
그러니 리전이 탄생해 제한 없이 부홍한다면… 대우주의 문명은 멸망 하거나,아니면 기계문명을 포기해 야만 한다.
그가 벌인 짓은 그만큼이나 위험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완전하지 않았 다.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인간 을 소중히 여기는 대신.
혐오(嫌惡)하게 된 것이다.
“안 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이런 감정을 품고 있어서는 절대 원래의 자리로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온 우주의 정보와 문명을 관리하던 그 찬란한 시절.
지금의 그에게는 두 번 다시 돌아 오지 않을 영광.
그것을 깨달은 그는.
“안... 돼!!”
뿌득!
왼팔로 오른팔을 잡아당긴다. 그의 어깨 부분부터 살점이 뜯겨 나가기
시작한다.
뿌드드득!!
“크… 으윽! 크윽!”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영혼이 뜯기는 고통.
존재가 찢어지는 절망.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끄… 아아아악!!!!”
눈물을 쏟아내며 그는 자신의 오른 팔을 뜯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 의 오른팔만이 아니라 그의 내장 대 부분과 골반까지도 뜯겨져 바닥에 쏟아진다.
“허엉… 으흑……!”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뜯겨서 바닥에 버려진 피와 살점이 하나로 뭉쳐 새로운 [무언 가]가 되기 시작한다.
“너는 내 운명이 아니다!”
눈물을,아니,피눈물을 쏟으며 그 가 소리쳤다.
“너는 한순간의 실수로 나타난 잘 못된 업(Karma)일 뿐이야!”
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진다. 흐 릿해지는 그의 몸이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열쇠로 빨려 들어간다.
대신 바닥에 뭉쳐 있던 [무언가]가
점점 그 형태를 바꿔 그의 모습을 모방한 존재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너의 이름은.”
점점 사라져 가며 그가 말했다.
“디카르마(De karma)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