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언제나 그러하듯 광화문 광장은 사 람으로 가득했다.
물론 사람으로 가득하다. 라고 해 도 몇 달 전의 광화문 광장과는 전 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지구에 남 아 있는 이들은 95% 이상이 정의 무구의 소지자.
그리고 인류 전부가 플레이어니까.
광화문 광장에는 수급,혹은 인급 기가스가 잔뜩 늘어서 있다. 그뿐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는 기간틱 레일 건. 플라스마 해머. 레이저 소드 등 현 인류가 아직 그 원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첨단 병기들이 가득 하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대예받은 것으로,스테이지가 끝나면 반납하 겠다고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여가 아닌 증여로 받으려면 그 병 기의 수준에 걸맞은 레어 메탈과 마 정석을 지불하면 되지만 최상위 플 레이어 중에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 은 극히 드물었다.
“넌 무장 안 해?”
“무장은 무슨. 19레벨 상급에서 내 가 뭘 할 수 있어? 공략파한테 부 담이나 주겠지… 난 그냥 요람에서 시청이나 할 거야.”
“그래도 아깝잖아. 너도 나름 소드 마스터인데.”
“영약빨로 검기 뿜는 나 같은 물마 스터 따위 기가스를 타든 말든 19 레벨한테는 한 방이야. 하… 나름 스테이지에서 10년이 넘게 싸웠는 데 그래 봐야 한계라는 게 있다는 거지.”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위풍당당
하게 서 있는 수많은 기가스들을 보 았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지만… 저들 중 자력으로 19레벨 스테이지를 쩔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 까?
그나마 철가면이라는 신화적인 영 응이 있어 그의 분신(놀랍게도 그의 조종술까지 재현한!)에 기대 스테이 지를 클리어하고 있고,사실 분신의 힘에 기대도 클리어할 수 있는 인원 은 극히 한정적이다.
분신이 강하다 해도 그건 [기술]과 [기교]로서의 강함이기 때문에 한 방에 적을 물리쳐 주지는 못한다.
장기전은 필연인데 스테이지 주인이 최소한 버티기라도 할 수 있는 역량 이 없으면 클리어는 불가능하다는 뜻.
몬스터가 분신을 무시하고 스테이 지 주인을 죽여 버리면 분신이 아직 멀쩡하더라도 스테이지는 닫혀 버리 고 만다.
“아,시간이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어둠은 점점 깊어진다. 온도도 점점 떨어져 싸늘한 공기가 주위를 맴돈 다.
어느새 오후 7시에 가까워진 시간.
이제는 인류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게 된 그 시간에 플레이 어들이 기가스에 탑승하고 들고 있 던 무기를 더욱 힘주어 잡는다.
6시 59분 50초,51초,52초… 그 리고 마침내 7시.
“…응?”
“어?”
“뭐지?”
일순간 완전한 침묵에 잠겼던 광화 문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수많 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게 사람들 이 스테이지로 끌려가지 않았기 때 문이다.
“…이게 무슨.”
근정전 조정에서 지구 전체에 30 대도 안 되는 인급 기가스. [세종대 왕]에 탑승해 있던 민경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녀 주위를 포진해 있던 플레이어 들 역시 당황하고 있다.
“여황님,스테이지가.”
“알고 있다.”
민경은 세종대왕의 디바이스를 확 인했다. 7시 00분 13초.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 스테이지가 시작되지 않는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
그러나 당연히 스테이지가 이대로 끝난다거나 하는 꿈같은 일은 벌어 지지 않는다.
그저 장소만 바뀌지 않은 채.
스테이지가 시작된다.
-스테이지 (Stage)가 오픈됩니다!
-레벨 19. 상급(上級)이 설정되었 습니다.
-100시간 안에 불안정한 우주 괴 수 20기를 제거하십시오.
-10초 후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10. 9. 8. 7……•
플레이어들의 앞에 땅에 박혀 있는 성검이 생겨난다. 그 익숙한 광경에 플레이어들이 기겁한다.
“아니,저게 왜 여기 생겨나?!”
팅! 팅! 팅! 팅!
성검이 제멋대로 뽑힌다.
“심지어 자기 맘대로 뽑힌다고?!”
“아니,이게 무슨 양아치 같……!”
-시스템이 일부 업데이트됩니다.
-스테이지 포기 행위를 삭제합니 다. 스테이지에 참여하지 않아도
[사망 처리]되지 않습니다.
-스테이지가 외계(外界)와 통합됨 니다!
-모든 타임라인을 통합합니다!
구구구!!!
쿠구구구!!!!
“맙소사.”
민경의 몸이. 그리고 그녀가 틸•승 한 세종대왕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다.
인급 기가스는 수급 기가스와 출력 과 무장 자체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어빌리티를 1개씩 보유
하고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물론 아이언 하트를 장착한 기가스 라면 기급부터 가지고 있을 기능이 지만… 그 1개의 어빌리티가 해당 [인물]의 유니크 어빌리티라는 것은 엄청난 강점.
민경은 어빌리티,〈훈민정음>을 발 동했다.
“[우리는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겠다!!]”
정언력과 어빌리티가 더해진 힘이 일행을 뒤덮는다. 그리고 어둑어둑 한 하늘에 수천수만의 균열이 얼렁 인다.
[고오오오!]
[고옹!]
[고오옹!!]
갈라진 틈새에서 고래와 닮은 추악 한 괴수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다. 그 숫자가 가늠이 안 될 정도인 데 하나하나의 덩치가 20미터가 넘 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괴수로 가득 찬 것만 같다.
심지어.
[고오옹-----!]
[고오오----!!]
그 수많은 괴물들의 입에 질척질척 하게 느껴지는 회색의 빛이 어리기
시작한다. 민경은 그들이 19레벨 스 테이지의 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렸 다.
그리고 그 말은.
그들 하나하나가 그 강력하던 망령 룡 레플리와 동급이라는 뜻이었다.
“…안 돼.”
신음하는 순간.
수백수천,아니,수백만 수천만 이 상의 괴물들이 파멸의 숨결을 뿜었
숨결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땅이 열리며 수천 개의 거대한 철벽들이 솟구쳐 올라 방패처럼 온 도시를 뒤 덮는다.
지구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규모다. 사철로만 이루어진 고유세 계에서만 가능한 금속 낭비!
쏟아져 내린 회색의 빛이 그 위를 후려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과드드드득!!!
끼긱! 끼기긱!
“으악?! 이게 뭐야? 피해!!”
“지,지하! 지하 쉘터가 있어요!
그리로!!”
“지,지하 쉘터요? 그런 게 어디 박혀 있… 으아악!!!”
핵폭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려 도 견딜 수 있는 방호력을 가진 철 벽들이 고작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그 1분의 시간 동안 안전한 장소로 피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니는 종종 비상시 이용할 수 있는 쉘터의 위치를 안내했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것은 대하가 항거할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상대를 고유세 계로 끌어와 상대하기 위한,그야말
로 만약의 만약을 대비한 것이라 고 유세계 전체에 제대로 안내된 사항 이 아니었다.
때문에 태반의 인원들은 그저 익숙 한 장소. 그러니까 쇼핑센터나 식당. 혹은 자신의 집으로 도망쳤고 상당 수는 그저 어쩔 줄 모르고 부서져 가는 천장의 벽을 멍하니 바라보기 만 했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과드드드득!!!
철벽을 뚫고 들어온 회색의 빛이 사람들을 후려친다. 회색의 빛은 마 치 질척이는 액체처럼 사람들의 몸 에 달라붙어 온몸을 불태워 버렸다.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당장 대우주에 나가더라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인재들이 허 망하게 죽는다. 고위 기가스를 타고 있었거나,스스로의 역량이 어떤 선 을 넘어섰거나,상황 파악이 빠르고 행운이 따랐던 이들을 제외한 모두 가 죽어나가고 있다.
[구웨에에엑!!]
[궤엑!!]
하늘을 가득히 메운 우주 괴수들이 그 좋아하는 지성체를 잡아먹으려 덤비지도 않고 작정한 듯 하늘에서 브레스만을 뿜어낸다. 생명체가 아
니라 잘 훈련된 군인이나 생체 병기 같은 태도!
만약 이대로 상황이 이어진다면 5 분 안에 인류의 90%가 죽고,10분 안에 35억 인류가 멸종할 상황!
그러나 종말 프로젝트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34지구에는 다른 문명들과 다른 세 가지 변수가 있었다.
“아 진!!〜!〜! 짜!! 죽여 버리고 싶 다! 선이라는 걸 몰라 애송이 새끼 가!!!”
먼저,34지구에는 이면세계라는 성 계신이 간섭할 수 있을 법한 [환경]
이 있었고.
“감히!! 감히 인류를!!”
원전이 남긴 [사명]에 반쯤 미쳐 있는 언터쳐블급 언네임드가 있었 고.
그리고 무엇보다.
“와라!!!!!!”
스테이지에서보다 현실에서 수십 수백 배 강해지는 초월적인 영웅이 존재했다.
“와라 아레스!!!!”
잠시 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 장소 모두에 공격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성급 기 가스,워 로드를 타고 있던 현실의 몸 위로도. 그리고 고유세계에서 노 닥거리던 육신에도 공평하게 브레스 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아주 잠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 누가 안 그럴 수 있겠는가? 내 고향이라 할 수 있는 34지구와, 내 소유나 다름없는 고유세계 둘 다 가볍게 내다 버리기에는 너무도 중
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깐. 나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지니니 워 로드를 조종해서 저 고 래 놈들을 공격해!”
[하지만 제 능력으로는 저놈들 중 하나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여기 있는 포대 전부 현실로 꺼낼 테니까 모든 출력을 써서 최대한 견 제만 해!”
그렇게 말한 후 작업실에 있던 포 대를 터치,전부 현실로 보내 버리 고 센터 시티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 장 튼튼한 빌딩,강철의 성을 뛰쳐
나간다.
철컥!
빌딩에서 추락하며 쉐도우 스토커 를 권총 형태로 변경,하늘을 겨누 며 외쳤다.
“제일 센 걸로 6발!!”
-극대소멸탄(極大婦滅彈) 장전… 완료.
광! 쾅! 쾅! 광! 광! 쾅!
망설일 것 없이 방아쇠를 당기자 쏘아진 광구의 궤적 안에 있던 공기 가 소멸하면서 바람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렇게 날아간 적색의 광구
가 목표에 명중!
쿠아아!!!!
적색의 광구에 얻어맞은 괴물 고래 가 구겨진 종이처럼 한 점으로 말려 든다. 녀석뿐이 아니다. 빽빽하게 모 여 있던 탓에 녀석의 주변에 있던 십여 마리의 고래들 역시 일그러지 는 공간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빵!
그리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난 다. 극대소멸탄이 주변의 모든 물질 을 빨아들여 그대로 소멸시켜 버린 것!
같은 광경이 여섯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쿨다운 시작. 37분 44초… 극대 소멸탄 생산 시작. 한 발 제작에 31 일 22시간 30분… 잔탄 12발…….
약 40분 간격으로 극대소멸탄을 6 발씩 2번 더 쏠 수 있다는 걸 기억 한 뒤 시계 형태로 되돌린다.
그리고 소리친다.
“와라! 아레스!!”
중앙 광장에서 하늘을 향해 포격을 쏘아내고 있던 아레스가 한달음에 날아온다. 녀석은 빌딩 꼭대기에서 추락하고 있던 나를 덥석 잡은 뒤 머리를 열어 마치 잡아먹듯 조종석
으로 날 던져 넣었다.
녀석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식한 다.
[와! 내가 종말 프로젝트를 잘 아 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막 나갈 줄 은 몰랐다. 이쯤이면 그냥 설정 꺼 지라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수준 아니냐?]
녀석의 말을 들으며 센터 시티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죽고 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다가 뭔지도 모를 존재에게 지옥 같은 장소로 끌 려갔어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던 사
람들이 벌레처럼 죽어나가고 있다.
내가 만든 기가스에 인챈트를 부여 하던 사람들도. 귀찮을 정도로 모여 들어 나를 찬양하던 사람들도. 기가 스 조종사를 꿈꾸며 매일 조종술을 연마하던 사람들도 죽어나가고 있 다.
고유세계 안의 온라인 게임에서 만 나 같이 놀았던 사람들도. 랭킹의 내 점수를 보고 버그 플레이어 아니 냐고 신고를 넣던 사람들도. 스테이 지 안에서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보 겠다고 아득바득 이를 갈던 사람들 도 공평하게 죽어나간다.
“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 부글부 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화가 난다.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다고, 소중하 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내가 그 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천만 명 이상 사람을 죽였던 과거를 이기지 못하고 진작 미쳐 버렸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기이이잉---!!!
아레스의 아이언 하트가 미친 듯 돌아가는 게 느껴진다. 너무도 짙어
마치 액체처럼 질척거리는 영기가 아레스 전체를 뒤덮는다.
“다.”
나는 모든 어빌리티와 초월기를 작 동시 켰다.
“죽여.”
거대한 덩치의 아레스가 고래 떼 사이로 날아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