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화
“그러니까……
스테이지에서 나온 난 민경의 설명 을 듣고 물었다.
“신도라고?”
“그렇습니다. 이미 삼신을 믿는 자 들이 많은 상태지만 조금 더 본격적 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군 요. 사제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민경이 그렇게 말하고 기도하듯 두 손을 합장했다.
웅!
한순간 그녀의 레벨이 1 상승한다. 자세히 보니 은은한 기운이 그녀의 주위를 휘돌고 있다.
“삼신에게 신앙을 바친 거야?”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저는 삼신 중 누구도 숭배하지 않으니까요. 저 스스로의 정의를 믿고,진실하려 노 력한다 생각했을 뿐인데 자격이 된 것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민경은 새로운 힘, [삼원(근元)의 맹세]에 대해 설명했
다.
“이번 스테이지를 시작할 때 삼원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 이 처음으로 인류에게 접촉했을 때 와 같은 방법이었지요.”
그러나 그전과 달리 그것은 전 인 류에게 전해진 목소리가 아니었다.
일종의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자격?”
“정의,진실,명예 모두가 브론즈 랭크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쉽지 않은 조건이네.”
정의롭게 살았다고 꼭 존경받는 건 아니다.
진실하게 살았다고 꼭 정의로운 것 도 아니다.
크나큰 명예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정의롭지도 않고 거짓말쟁이 인 인간쓰레기가 더 많았다.
대기업 회장,대통령,심지어 독재 자조차도 바로 그 명예를 가진 존재 가 아니던가?
그러나 민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드물지도 않습니다. 정의 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실할 가능성이 높고,정의롭고 진 실한 사람은 명예를 가지고 있을 가 능성 또한 높으니까요. 무엇보다…
‘외부적인 수단’으로 정의를 충당한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진실함과 명예만 있어 도 맹세를 할 수 있지요.”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
“뭐,극단적인 경우일 뿐 상위 사 제들은 대체로 정의롭고,진실한 사 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세상이 니 명예야 정의롭고 진실한 것만으 로 얻을 수 있는 상황이고요.”
'고유세계에는 그 사제라는 존재가 거의 없겠군.’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런 이들, 그러니까 정의의 요람에 들어갈 수 없고,그래서 스테이지 진행이 불가
능한 이들을 중심으로 뽑았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 결과 고유세계에 온 인 간들은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 불 리는 것들이다.
‘태반이 잡것들이지.’
내심 혀를 찬다. 농담이 아니라 이 잡것들의 욕망과 야망,그리고 수작 질은 정말 보통 수준이 아니다. 지 니가 완벽하게 관리해 스무스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지 그녀의 도움 없이 고유세계에 그들이 알아서 살 게 했다면 정말 오만 가지 방법으로 내 골치를 썩게 했을 것이다. 실제 로 지니가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도
몇 번이나 그러지 않았던가?
농담이 아니라 지니가 없었다면 그 들 중 태반이 내 손에 죽어나갔을 것이다.
‘그나마 극악인을 걸렀는데도 그렇 단 말이지.’
현재의 지구는.
악인들의 지옥이다.
어느 선을 넘는 악업을 가진 이들은 설사 대단한 권력자나 재벌이라 하더 라도 그 목숨을 지키기가 어렵다.
상대가 극악인(極惡人)이라면,그 한 명만 죽여도 정의 무구를 얻어낼 수 있다.
혹 그렇지 않더라도 그를 살해해 자신의 악업을 지울 선업을 쌓을 수 도 있겠지.
숨어도 소용없다. 정의 무구를 가 진 존재는 악업을 가진 존재를 감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력 좋은 경 호원으로 인의 장막을 쳐봐야 소용 없다. 바로 그 경호원이 그를 살해 할 테니까.
법치가 무너진 세상. 악인을 살해 한 이는 오히려 정의 포인트를 쌓을 뿐 어디에서도,그 누구에게도 처벌 받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인 살인범. 장난삼아 불을 지른 방화범. 쾌락을
위해 아랫도리를 휘두른 강간범. 수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한 사기 꾼.
금력으로,권력으로,인맥으로 죗값 을 치르지 않던 악인들 모두가 결국 죽고 말았다. 대기업 회장도,언론사 대표도,정치인도 죽음을 피하지 못 했다.
지금 지구에 살아 있는 ‘공식적인 악인’은 정말 한 줌의 한 줌에 불과 하다.
“그래서 그 삼원의 맹세라는 게 정 확히 뭐지?”
“일종의 제약(制約)과 금제(禁制) 를 통한 파워 업입니다. 정의,진실,
명예의 카테고리 안에서 스스로 정 한 주제로 맹세를 하는 것이지요. 다만 중요한 건… 아무 맹세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예컨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라 는 맹세를 하려면 앞으로도 하지 않 는 건 물론이고… 지금까지 살아오 면서도 한 적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민경이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남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거짓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여유가 되는 대로 선행을 행하겠 습니다.
웅!
말과 동시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힘이 아주 미묘하게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다시 일어난 민경이 말한다.
“•••이런 식입니다.”
“어기면 어떻게 되지?”
“기도로 쌓은 힘이 깎이고 징벌을 받게 됩니다.”
“스테이지 진행하면서 맹세를 어길 일은 없을 테니 없는 거나 다름없는 페널티네.”
결국 그런 말끼다.
종말 프로젝트는 공략이 불가능한 직관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만들었지 만.
그 상태에서 인류 전체의 전투력이 높아져 버리자 오히려 쉽사리 뚫려 버렸다는 것.
“그럼 내 위에 있는 게 바로 그 사 제들이라는 말이군?”
“스테이지 최후 인원들이 누구인진 알 수 없지요. 다만 상위 사제들의 정체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쪽지를 받아 든다. 그 곳에는 수십 개의 이름이 쓰여 있 다.
“인권운동가,세계적인 배우,교황, 정치인. 오,한국 사람도 한 명 있 네.”
심지어 구면이다.
“네,명월 스님입니다. 들리는 말이 지만 7절 맹세를 했다고 하더군요. 1절 맹세를 만들 문장도 찾기가 보 통 힘든 게 아닌데 어떤 삶을 살아
온 것인지……
“맹세의 종류와 숫자에 따라 기하 급수적으로 강해지는 모양이네.”
나는 14레벨 상급 난이도를 5천 회 넘게 클리어했다. 이는 절대 적 은 숫자가 아니다. 아니,오히려 위 업이라 할 수 있는 숫자.
그런데 그 위업을 한 명도 두 명 도 아닌 6명이 뛰어넘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1등은 기 가스 파일럿 아니겠습니까?”
“설마 위로하는 거야? 뭐,기쁜 일 이긴 하지.”
그렇다. 결국 기여도 1순위를 차지
한 것은 클리어 횟수 1만 회에 빛 나는 천재 파일럿,소향. 현재 그녀 는 이가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민경 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겨우 1년 만에 끝나 버린 14레벨 상급 스테이지에서 1만 회를 다 채 우다니 클리어 속도가 대체 얼마나 빨랐다는 말인가?
“뭐,곧 확인하게 되겠지.”
“오랜만의 휴식이지만… 역시 그렇 게 되겠지요.”
그 말과 동시에.
배경이 변한다.
-스테이지 (Stage)가 오픈됩니다!
-레벨 14. 최상급(最上級)이 설정 되었습니다.
-제한 없음. 데스나이트와 데스나 이트 킹 부대를 전멸시키시오.
-10초 후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10. 9. 8. 7…….
“내 이럴 줄 알았다. 거 휴일 하나 있던 걸 뺏네.”
지금껏 스테이지는 1주일에 2개씩 진행되고 하루를 쉬었다. 초반 레벨
을 예로 들자면 일요일 저녁 7시에 1레벨 하급,월요일에 중급,화요일 에 상급. 수요일에 2레벨 하급,목요 일에 중급,금요일에 상급을 하고 토 요일 하루는 스테이지가 없었던 것.
정말 드물게 쉬는 날인데 기어코 최상 난이도를 욱여넣었다.
“그나마 13레벨 키메라랑 악령 없 이 데스나이트만 있는 걸 다행이라 고 해야겠네.”
아무래도 갑자기 추가한 긴급 패치 라 적용이 안 된 모양이다.
“여,여긴 어디야?”
“최상급 난이도다! 제길,진짜 하
다니!”
“세상에 엄청 넓어!”
지금까지의 스테이지와 달리 주변 에는 온갖 사람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대부분 눈에 익은 얼굴들이 다.
“같이 왔군요.”
일단 내 앞에는 방금 대화를 나누 던 민경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경은아! 휴, 다행이다 함께… 어? 대하도 있잖아? 엥? 김실장님?”
재석이도,경은아도,그리고 조금만 기억을 되새기면 알 법한 사람들로 주변이 가득하다. 물론 모두가 그렇
다는 건 아니고 주변에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 중 일부가 그렇다는 말 이다.
-8분 뒤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1 시간 간격으로 반복됩니다. 리젠 횟 수는 할당된 데스나이트가 모두 소 진될 때까지입니다.
-인원 분류는 인연 레벨 기준입니 다.
-리젠되는 적의 숫자는 모여 있는 플레이어 숫자에 비례합니다.
“역시,이런 식이군.”
“아,맙소사. 여기 사람이 백만은 되어 보이는데. 그럼 데스나이트가 백만 마리씩 온다는 말이야?”
“일단 모여봐!!! 진형! 진형을 짜야 합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없어?”
“동쪽으로 10킬로미터 밖에 역시 나 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보입니 다! 서쪽으로도,남쪽으로도 북쪽으 로도 보여요!”
“제길,바둑판 모양인 건가!”
“그나저나 저렇게 먼데 보면 알아 요? 심지어 명수까지?”
“저 17레벨 추적자거든요? 척 보
면 입•니다! 정확히 백만이에요!”
곧 혼란이 가라앉고 각자 뭔가를 시 작한다. 뭐 이리 빨리 적응하냐고 물 을 수 있겠지만 이게 당연한 일이다.
스테이지 어디 하루 이틀 하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가 최소 두 달,최대 수십 년을 스테이 지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이다.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묶여 왔다는 것도 상당한 메리트였다. 사람을 찾 느라 소란을 피우는 과정이 사라졌 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 긴장 풀고 진형을 짜주
십시오!! 당황할 것도,겁먹을 것도 없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이곳에 한국인들만 있습니다! 지금 확인했 는데 동서남북 있는 무리 모두 한국 인들입니다!”
능력을 써서 외치는 듯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외침에 여기저기에서 반론이 터져 나온다.
“아니,기운 내는 건 좋은데 한국 인이 무슨 상관이에요?”
“너무 긴장 푸는 소리 하지 마 요!!! 벌써 전투 시간 5분밖에 안 남았어요!”
“아,이 사람들 참! 눈치 없기는! 여기 한국 사람만 있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까? 한국 사람들 이 모여 있다는 건 여기,적어도 이 주변에 그가 있다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자자,다들 차분하게! 겁먹지 말 고 차분하게 합시다!”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에 눈을 가늘게 뜬다.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큭콕큭. 그러게. 다들 그걸 잊으면 안 되지.”
재석이가 턱 하고 어깨동무를 한 다. 어느새 녀석의 옆에는 흑색의
거인이 서 있다.
“우린 철가면 보유국이니까.”
번쩍!
시동이 걸리자 두 눈을 번뜩이는 수급 기가스,현무.
나는 그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맞는 말이네.”
나는 14레벨 상급 스테이지를 클 리어한 이후에도 고유세계로 추가적 인 이주민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수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에덴에 탑 승시켜 우주로 날려 보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다르게.
기가스를 풀지는 않았다.
이번 스테이지에서 보낸 시간이 1 년으로 짧았기 때문이 아니다. 고유 세계의 생산력은 어느 선을 넘어서 1년 동안 만든 기가스만 해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기가스를 풀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쓰기 위해서이다.
“지니,외출 준비.”
[외출 준비 시작하겠습니다. 제군 들,준비 완료되었습니까?]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중앙 광장에 사열하고 있던 수많은 조종사들이 우렁차게 외친다. 당연 하지만,그들 모두가 이미 기가스에 탑승한 상태.
고유세계의 나는 그들 중 맨 앞에 있는 녀석들에게 다가가 장갑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그리고 스테이지 안으로 집어 던졌 다.
“출격해!”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