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화
현실과의 통신이 연결되었다.
장장 20년 만의 일이다. 현실에도, 고유세계에도 존재하는 내 몸을 중 계기 삼아 언제든 지구의 인터넷과 연결되는 시스템을 만들어두었지만 스테이지가 진행되는 동안은 현실의 시간이 멈추어 버리기에 무의미하던 연결이 마침내 재개된 것이다.
20만 명이 넘는 고유세계의 사람
들은 연결과 동시에 인터넷의 바다 로 뛰어 들어갔다.
=강철게!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 다!
=20년 동안 강철계에서 벌어진 사 건 사고.
=비행형 기가스 푸른 매를 타고 강 철계 상공을 날아다녀 보았습니다.
=초거대 거주지 아사달의 모습.
=안녕하세요! 가수 겸 프로게이머 겸 파일럿 유아입니다!
마이튜브에 동영상이 쏟아지기 시
작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마이튜 브에서만 활동했다는 것은 아니다.
고유세계에서 접속한 사람들은 자 신이 기억하던,혹은 말로만 들어보 았던 각종 커뮤니티로 찾아 들어갔 다. 20년 동안 업데이트가 멈춰 있 던 지인들과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문자를 보냈다.
“으아. 으아아아… 완벽 클리어 성 공해서 진짜 다행이에요. 기억이 없 는 걸 보니 죽은 모양인데,하. 진 짜 어쩌다 죽었지.”
“혹 어떻게 죽는지 알고 싶으면 주 변 분들한테 부탁하세요. 저도 정의
의 요람에 계시는 분께서 촬영해 주 셨어요.”
“그러고 보니 아무도 안 봐서 생각 못 했는데 촬영이 가능하겠네요… 아 맞아! 그나저나 그 소식 들었어 요?”
“무슨 소식이요?”
“철가면이 지배한다는 다른 차원이 요. 강철계라고 하던가?”
온갖 방식으로 고유세계 내부의 정 보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 나는 그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강철계로 이주하길 원하는 신청자
명단입니다.”
나는 민경이 내미는 명단의 수치를 보며 물었다.
“하루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10만이라고 알려줬는데도 900만이 나 신청했다고?”
“추가로 선별한 인원도 150만 정 도 됩니다. 미리 말씀하셨던 스테이 지 진행이 불가능한 어린아이들입니 다.”
한국은 비교적 스테이지를 잘 이겨 낸 편이지만 모든 국가가 그러지는 못했다. 특히나 인터넷 인프라가 제 대로 깔려 있지 않은 국가들은 대부 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면치 못했
다.
기본적으로 종말 프로젝트는 동 레 벨의 역량을 가져도 클리어하기 어 려을 정도로 악독하게 설계된다. 한 순간의 방심을 죽음,혹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갈음해야 하는 음험한 함 정.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정신이 피로해지는 환경. 마주하는 것만으 로 멘탈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끔찍 한 적까지.
지금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역량보 다 훨씬 높은 레벨의 스테이지를 어 떻게든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어디까 지나 공략을 외워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지 절대 스테이지의 난이도가
낮아서가 아니다.
“뭐,참고하지. 선별 인원은 문자로 보내줄 테니 오후 6시까지 지정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고유세계에 들어오길 희망하는 사 람들이 다 한국으로 오지는 않는다. 만약 일 처리를 그렇게 했다면 한국 행 항공편이 죄다 미어터지고 공항 이 마비되었겠지.
10분이면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는 알바트로스가 있는데 그리 답답한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물자 상태는 어때?”
“풍족한 편입니다. 몇몇 국가의 경 우에는… 지나치게 풍족하지요.”
생산량이 폭증해 여유가 생긴 것은 아니다. 소비자가 다 죽고 사라져 물자가 굴러다닌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지.
물론 물자라는 게,특히나 식량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상하거나 썩어 못 쓰게 되는 법이지만 조금만 생각 해 봐도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테이지 를 시작한지 이제 고작 2달이 지났 을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대로 사람이 죽기 시작한 것은 한 달이 채 안 될 정도이니…
신선식품이 아닌 이상 온전히 남아 있는 게 당연하다.
“좋아. 가능한 한 자리를 마련하겠 다고 전해. 물론 그렇다고 다 고유 세계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당 연히 아니야. 몇몇 조건이 합격선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우주에 올려 보낼 수 있을 뿐이니까.”
“모함(母艦),에덴(Eden)이군요.”
그것은 고유세계에서 엄청난 인력 과 자재. 그리고 시간을 들여 만들 어낸 거대 함선의 이름이다. 물론 나에게는 충분한 적재 능력을 가지 고 있는 알바트로스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알바트로스함의 정원은
15만 명에 불과하다. 무기고와 연구 소,생산 라인 등등을 다 활용하면 천만 명도 더 태우겠지만 그런 식으 로 무리하게 욱여넣었다간 반드시 문제가 터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니의 조언을 받아 새로 운 함선을 만든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에덴을 함 선이라 부르기 어렵긴 하지.’
에덴은 항성 간 이동이 불가능하 다. 정확하게 말하면 행성 간 이동 도 불가능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위성,그러니까 지구에서 달까지 가 는 데에도 일주일은 걸릴 정도로 느 리다.
애초에 기가스도 찍어내기 바쁜 고 유세계의 인프라로 고작 20년 만에 우주 함선을 뽑아내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에덴은 그저 아주 거 대한,그래서 수많은 사람을 수용 가능한 거주 시설일 뿐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어떻게 에덴에 사람 들을 태워 우주로 나갈 거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사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다.
‘그냥 알바트로스함이 들고 날아가 면 되니까r
에덴에 항해 기능을 넣으려고 머리 깨지게 고민한 게 허망할 정도로 완
벽한 결론이다.
“소식들이 빠르네”
“고유세계는 세계 최대의 관심사니 까요. 마이튜브에 영상이 올라오기 도 했고.”
나는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에 함께 일어난 민경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익힌 이능 때문인지 아니면 스테이지 공략 횟수를 적절히 조절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20대 후반
즈음의 외모로 고정된 모습의 그녀 는 많이 피곤한 듯 안색이 창백하고 머릿결 또한 푸석푸석하다.
화장으로 덮어도 가릴 수 없는 거 뭇한 다크서클과 거친 피부로 인해 연예인급 미소녀였던 트윈로즈의 이 름이 무색한 수준.
그러나 그럼에도.
‘빛나는군.’
그렇다. 그녀는 마치 타오르듯 빛 나고 있다.
피곤한 기색의 그녀지만 마주한 사 람들이 그녀를 안쓰러워하거나 무시 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
의 형형히 빛나는 눈은 어떠한 목표 를 향한 광기와도 같은 집념을 드러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에 정중히 묻는 민경.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그녀를 보았다.
형이 사랑하던 여자.
내가 인류와의 소통 창구를 굳이 그녀로 지정하고,또 암중으로 돕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만약 아니었다면…….
어쩌면 질투심에 그녀를 죽여 버렸 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리고 말했다.
“•••받아.”
쿵!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4.5미터짜 리 기가스를 꺼내 내려놓는다. 그러 자 나와 민경을 둘러싸고 있던 인식 결계가 단박에 깨져 나가며 주변에 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깍?! 뭐,뭐야 갑자기?”
“기가스다!”
“엄청 크다! 아바타 시리즈는 아닌 것 같은데 기종이 뭐지? 저렇게 화
려한 종류도 있었나?”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지만 신경 쓰 지 않는다. 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 랗게 뜨고 있는 민경을 바라보며 말 했다.
“너.”
“•••앗,예,예.”
“죽지 마라.”
팟!
동시에 리콜을 작동. 알바트로스함 으로 돌아왔다.
[역시 황금 용은 황녀용이었군요.]
뭐야 그 기묘한 말장난은.
“뭐,죽어도 찜낍하니까.”
똑같은 등급의 기가스라 해도 특별 히 강한 개체는 당연히 존재한다. 고가의 재료,특수한 부품,첨단기술 을 적용하면 등급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더라도 더 강력한 성능을 가지 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급 기가스는 그것을 특별 한 동물의 명칭을 붙임으로써 구분 한다.
용,불사조,유니콘 등등. 분명 짐 승이지만 강력한 환상종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했다.
“황금 용은 선배한테 줬고. 현무는 재석이한테 주면 되는데,주작,백 호,청룡은 누굴 주지……
20년 내내 생산만 했더니 물건은 쌓였는데 정작 줄 사람이 없다. 사 실 사신수나 황금 용 같은 특수품 말고 양산품이 진짜 문제지.
“지니,제작된 수급 기가스가 몇 기지?”
[현 시간 총 5,400대입니다. 다만 8년 전부터는 자재가 부족해 속도를 조절하고,남는 인력을 에덴 제작에 쏟아부었습니다.]
“뭐,5,400대만 해도 충분히 많지.”
사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숫자다. 기급 바로 위의 기체라 낮 아 보일 수 있지만 제3문명의 전쟁 에서도 활약하는 주력 병기가 바로 수급 기가스인 것이다.
레온하르트 제국이 보유한 수급 기 가스가 기껏해야 십만 대가 안 될 텐데 나 같은 개인이 하루 만에(물론 실질적인 시간은 20년이지만) 5,000 대를 생산했으니 다른 세력이 알았 다면 그야말로 기함할 일이었겠지.
“기가스 네트워크를 이용해 공지 해. 대전쟁 10만 점을 기준으로 수 급 기가스를 대여해 주겠다고. 단 대전쟁 점수가 100만이 넘으면 무
료. 20만 점이 떨어질 때마다 20% 씩 할인을 줄여. 80만 이상이면 80%. 60만점 이상이면 60%, 뭐 그 런 식으로. 20만점 이하는 그냥 제 값 다 받고.”
[지불 방식은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현물거래지. 레어 메탈이 랑 마나석. 딱 원재료의 150%만 받 아.”
기체가 남아도는 만큼 적당히 뿌리 는 것도 가능하지만 다른 장비도 아 니고 기가스라면 당연히 조종술에 익숙한 사람이 다뤄야 높은 효율이 나올 것이다.
재료를 수급하는 건 겸사겸사에 불
과하니 상황을 봐서 가능성이 보이 는 사람이 있다면 할인을 하든 할부 를 하든 하면 된다.
“이렇게 조건을 걸면 대충 몇 대 정도의 기가스가 나갈 것 같아?”
[현재 업데이트된 대전쟁 랭킹을 기준으로 하자면… 대략 2,000명 정 도가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것밖에 안 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이 남는데.”
[대신 다른 쪽 지원자도 준비되어 있지요.]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자리에 앉
는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고유세 계 쪽으로 이동시켰다.
고유세계의 몸이 있던 장소는 이제 집처럼 익숙해져 버린 작업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복도를 가로질렀다.
덜컹!
문을 열고 나서자 낮은 웅성거림이 단숨에 사라졌다.
파파팟!
거대한 홀에 자리하고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춘다.
어느새 메탈 바디를 이끌고 나타난
지니가 내 옆에 서서 말한다.
[외출 준비 희망자 5,822명.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지구와 고유세계의 통신이 연결되 자 고유세계에 대한 지구의 관심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유세계 역시 마찬 가지였다.
지구와 고유세계의 통신이 연결되 자 수많은 사람들이 고유세계 안으 로 들어오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고유세계도 마찬가지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