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화
“슬슬 위험하네.”
나는 푹,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날이 오고야 말았다. 언젠가 이 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뼈아픈 일이다.
그렇다.
슬슬 스테이지의 빈틈을 찾기가 힘
들어지고 있다.
[모니터링팀의 보고가 올라왔습니 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순조롭게 공 략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다만 그 전에 죽은 숫자가 제법 되는 모양이 군요.]
“공략집 만드는 데 하루나 걸렸으 니까.”
내가 오류와 빈틈을 찾아내 이용하 면 할수록,그리고 종말프로젝트가 그것을 고치면 고칠수록 스테이지의 완성도가 올라간다.
플레이어를 조롱하는 듯 난잡하던 오브젝트들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총체적인 밸런스 역시 레벨에 맞게
안정된다.
만약 이게 놀려고 하는 게임이었으 면 게임사를 칭찬했을 것이다.
“여전히 레벨링이 문제인데.”
사실 이것조차 진짜 게임이라면 단 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받는 보상으로 자판기를 이용하면 레벨에 걸맞은 스펙을 갖 추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게임이 아니며.
역량은 그리 쉽게 늘어나지 않는 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완성자의 벽 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한계는 있다. 영약을 밥 먹듯이 먹 고 훌륭한 신공과 마법서가 주어진 다 해도 깨달음은 절대 쉽게 오지 않는 것!
역시 답은 장비뿐이다.
“역량 자체를 계속 올리는 게 불가 능하다면 장비를 업그레이드해야 해.”
수련하면 수련하는 대로. 시련을 겪으면 겪는 대로 강해지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고등학생하고 싸 워도 지는 예비역 남성이 K-1 소총 을 들면 호랑이도 쏴 죽일 수 있듯, 충분한 장비를 갖출 수 있다면 종말 프로젝트의 정신 나간 레벨 디자인
에도 적응할 수 있다. 우주전에도 활용되는 수(獸)급 기가스라면 충분 히 그만한 역할을 해줄 수 있겠지.
“진행 상황은 어때?”
[현재 완성된 인챈트 코인은 총 7 회 분량입니다.]
“작업 속도는?”
[계속 상승 중입니다. 현재는 40시 간마다 1개씩 완성되고 있습니다.]
“좋아.”
좌라랑!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바구니 중 하나를 들어 허공에 흩뿌리자 날카 로운 소리와 함께 1만 8천 개의 동
전이 거대한 구체를 만들며 회전한 다.
인챈트 코인(Enchant coin).
미리 공장에서 찍어낸 코인을 일종 의 하청이라 할 수 있는 마법사들에 게 넘겨 인챈트를 부여,돌려받은 그것은 각기 마법의 힘을 품은 마법 물품이다. 오직 하나의 글자,혹은 하나의 단어만 새겨져 있기에 하나 하나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 하지만 강대한 술식의 파편으로 기 능하는 물건들.
위이 잉!
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1만 8천 개 의 인챈트 코인은 천장과 바닥에서
가해지는 자성에 따라 정해진 순서 로 나열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에 매달려 있 던 미스릴 원통이 떨어져 내리고.
인첸트가 발동한다.
응!!!
동전에 새겨져 있던 1만 8천 개의 단어가 미스릴 원통의 표면에 날아 가 박히자 인챈트 코인은 비처럼 쏟 아져 바닥에 쌓이고 미스릴 원통만 이 허공에 둥둥 떴다.
기나긴 준비 시간이 허망할 정도로 깔끔한 성공이다.
[인첸트. 소울 엔진의 안착을 확인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야 마법사들이 다 했지.”
나는 10킬로그램 정도 되는 미스 릴 원통을 잡아들었다. 원통이라고 불렀지만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 간 그것은 기계장치의 부품보다는 묵직한 아령으로 보인다.
[수급 기가스. 붉은 곰-11 대기 중 입니다.]
“붉은 곰에 들어간 레어 메탈이 얼 마나 되지?”
[주 무기에 들어간 아다만티움과 소울 엔진에 들어간 미스릴까지 치 면 21.5킬로그램입니다.]
“그 정도면 초기형치고 양호하네.”
이미 열려 있던 붉은 곰의 가슴팍 에 소울 엔진을 삽입. 그대로 180도 회전시키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엔진이 고정되고 투입구가 드러난 다.
“연료는 마나석이지?”
[마나석 뿐이 아닙니다. 이 주문 은… 정말 놀랍군요. 영력과 영자력. 마력. 내공. 심지어 열에너지나 전기 에너지도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염(念)만 없다 면 뭐든 상관없다는 식입니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역시 마도황녀라는 건가.”
당연한 말이지만 마도황녀에 대해 조사했다. 굉장한 유명인이었기에 관련 자료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마법의 신의 제자. 인류 유일의 텐 클래스.
전쟁 영응. 무자비한 학살자. 항성 (恒星) 파괴자. 신살자(神殺者).
그리고.
그리고.
위대한 영웅의 동료.
나는 붉은 곰의 주입구를 잡고 정
령력을 내뿜었다. 에너지 잔량을 나 타내는 게이지가 차오르는 것을 확 인하고 이번에는 오오라를 내뿜어보 았다. 심지어,마지막에는 진동 에너 지까지 뿌렸는데 그럼에도 소울 엔 진은 별다른 문제없이 그 모든 것을 연료로 삼았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침묵하 고 있던 붉은 곰에 생기가 깃들기 시작한다.
기이잉! 철컹!
느슨하게 풀려 있던 붉은 곰의 외 부 장갑이 바짝 수축한다. 주입구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떼자 무릎을 꿇 고 있던 붉은 곰이 자리에서 일어선
다.
[관대하]
[9 레벨]
[붉은 곰]
레벨은 형편없다. 왜냐하면 붉은 곰은 자동 전투 능력을 배제하고 철 저한 탑승형 기가스로 제작했기 때 문이다.
지금의 레벨은 어디까지나 최소한 의 것. 숙련된 조종사가 탑승한다면 훨씬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 으리라.
“계속하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스러운 생각 을 떨쳐 버리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 작했다.
그 이후로는 반복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전 동안 드래곤 하트를 조각하다 점심을 먹고 특성 을 연구했다. 기가스 설계도를 살피 고 인첸트 코인을 전달받아 소울 엔 진을 완성,수급 기가스를 생산한다.
오후 3시부터는 그냥 놀았다. 게임 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그것도 아니 면 중앙 광장에서 사람들을 구경했 다.
1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고유세계에서의 삶에 완 전히 적응했다. 종말의 공포에 떨며 두려워하던 것은 그들에게 이미 옛 날의 일일 뿐이다.
2년이 지났다.
인첸터들의 경지와 숙련도가 올라 1년에 400기가 넘는 수급 기가스를 생산할 수 있었다. 새로이 인챈트에 입문하는 지원자들 역시 많아졌기에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 다.
3년이 지났다.
지니의 작전에 휘말린 사조직들이
일망타진되었다. 주동자는 죄다 감 옥행. 그들은 변호사를 선임하겠다 고 떠들고 심지어 사람들끼리 모여 시위까지 벌였지만 그야말로 머저리 같은 짓거리다. 고유세계에 법조인 출신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지구의 법 따위 이곳에서 아무 힘도 발휘하 지 못한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인가?
3년이 지났다.
고유세계의 10%가 개발 완료되었 다. 겨우 10%라고 생각할 수 있겠 지만 대한민국을 15개는 넣을 수 있는 크기가 되어버린 고유세계의 10%는 절대 작은 크기가 아니다. 심지어 고유세계의 건물들은 대부분
고층 빌딩이니 더욱 그러하겠지.
지니는 센터 시티의 반대쪽에 새로 운 도시를 만들고 함선 제작을 위한 거대 설비를 마련하겠다고 제안했 다. 당연히 승낙이다.
4년이 지났다.
조종법과 스타일에 따라 수급 기가 스의 분류를 새롭게 정립했다.
예를 들어 [색]은 전투 스타일이 다. 은신 위주의 검정,높은 복원 능력으로 정면에서 치고받는 빨강. 출력에 집중한 초록. 마력이나 기력 등을 보조하는 파랑.
동물로는 덩치나 외형. 그리고 조
종법을 구분했다. 예를 들어 범이나 곰 등은 덩치가 있는 탑승 형태고 쥐나 늑대 등은 비교적 작은 사이즈 에 헬멧으로 원격조종 하는 형태다.
5년이 지났다.
수많은 기가스가 완성되었다. 개중 가장 전투력이 좋은 것들은 검은 호 랑이,붉은 늑대,초록 악어와 파랑 뱀 등이다. 안타깝게도 가장 처음 만들었던 붉은 곰은 실패작이나 다 름없었다. 탑승형에 높은 복원 능력 을 줘봐야 조종사가 다쳐 버렸던 것 이다. 아직 아발론 시스템을 구현하 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무리를 조종하는 회색을 추
가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예를 들어 회색 쥐라고 한다면 기존에 만 들었던 고블린을 10〜20개 정도 지 휘하는 식이다.
6년이 지났다.
7년이 지났다.
외주를 맡은 인첸터들의 숙련도는 계속해서 높아졌다. 인천터가 고유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게럴트를 벌 수 있는 고소득 전문직이었기에 자연스 러운 흐름이다. 이미 인챈터로 활동 하고 있는 이들은 더욱더 효율을 높 이려 궁리했고 새롭게 마법에 입문 하는 사람 역시 많았다.
덕분에 소울 엔진의 생산량 역시
가파르게 늘어갔다. 이제는 1년에 1 천 기가 넘는 수급 기가스가 생산되 고 있는 상태.
합금 기술 역시 계속 개선되어 기 가스에 들어가는 레어 메탈의 비율 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8년이 지났다.
시위가 일어났다.
생산 시설에 대한 테러와 함께 통 신 시설을 향한 점거 시도,더불어 새롭게 건조하고 있는 함선. 에덴에 대한 탈취 시도가 있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아니,설마 이게 될 거라고 믿은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테러도 점거도 탈 취도 실패했다. 고유세계는 이미 지 니의 배 속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 기 때문이다.
지니가 고유세계에 자리 잡은 지 1, 2년도 아니고 수십만 년이 지났 다. 고유세계 안에 그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데 테러라니.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해 야 했소!”
“왜?”
반문하자 내 앞에 무릎 꿇려진 사
내가 소리쳤다. 실로 비장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태도는 누가 보면 독립 투사 같은 걸로 오해할 지경이다.
“자유! 자유를 찾아야 하니까! 이 곳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아무리 아 름답게 치장해 봐야 당신은,아니! 넌 그냥 독재자일 뿐이야!!”
“하. 이런 멍청한… 데려와,지니.”
소리 지르는 녀석에게 화내는 대신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그런 내 지 시에 따라 한쪽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끌려온다. 그들을 본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가주님? 마빈 님? 어째서 여기 에… 이놈! 왜 무고한 사람들을 끌
고 온 것이냐!! 날 협박하려는 건 가!”
“무고는 무슨. 저것들이 너를 암중 에서 조종하고 지원한 녀석들이라 데려온 거야. 이렇게 멍청하니 이용 이나 당하지.”
난 사고를 치면 당연히 일본인이나 중국인일 줄 알았는데 보니 죄다 서 양인들이다. 정확히는 [유럽 연합]과 [다시 위대한 미국]이다.
고유세계로 돌아온 이상 원래 나라 나 직위 따위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국가와 인종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 습들이다.
나는 혹시나 그들이 억울해하거나
순교자로 남지 않도록 그들이 작당 모의를 하거나 수작질을 하는 영상 들을 틀어주었다.
“가주님! 마빈 님! 어,어떻게 이 럴 수가!”
기가 막힌다는 사내의 외침에도 사 람들은 정작 당사자들은 다른 문제 로 경악하고 있다.
“이게 무슨! 개인적인 공간까지 모 두 감청에 녹화까지 했다는 말이 오?”
“이,이건 옳지 않은 일이오! 빅브 라더도 울고 가겠군! 우리는 애완동 물이 아니오! 이렇게 억누르고 억제 해 봐야……!”
“왜 자꾸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게다가 이것들은 다 들어올 때 미리 공지한 사항인데 모르는 척이라니. 모르쇠에 오리발은 청문회에서나 내 밀어 멍청이들아.”
농담이 아니라 고유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을 죄다 학살해도 문제가 없 다. 독재자에 빅브라더라니. 단지 살 고자 들어온 주제에 이제 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날,스테이지에서는 처음으로 사 형이 집행되었다.
그 대대적이고 단호한 대처에 고유 세계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로부터,다시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14레벨 중급 스테이지가 시작된 지 15년째에 들어섰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대대적인 처형 따위 다 잊었다는 듯 살았다. 자신 들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무감각해졌다. 지 니가 그들에게 개인 공간으로 지정 한 약간의 공간은 들여다보지도,엿 듣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 문일지도 모르지.
시간이 물 흐르듯 지난다.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다.
나는 14레벨뿐만 아니라 13레벨도 12레벨도 이렇게 해왔다. 그 이하의 레벨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항상 최대치까지 클리어해 왔기에 스테이 지에서 언제나 기나긴 시간을 보내 왔다.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수십만 년을 견딘 적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고작 15년 정도는 그리 길지도 않 은 시간.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달랐 던 모양이다.
이미 충분히 늙었던 인원이 하나둘 눈을 감는다.
고유세계 인원의 1/3을 차지하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성 인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났다.
다시 시간이 지나 14레벨 중급 스 테이지가 시작된 지 20년 차.
고유세계에 이곳저곳에서 안내음이 울려 퍼진다.
[고유세계 모든 인원들에게 알립니 다.]
[14레벨 중급 스테이지 종료까지 앞으로 20시간 남았습니다.]
[다시 한번 안내 드립니다. 중급 스테이지 종료까지 앞으로 20시간 남았습니다.]
고유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매체를 통해 울려 퍼지는 안내에 바쁘게, 혹은 느긋하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 던 사람들이 멈칫한다.
그중 젊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한 다.
“14레벨 중급? 이게 무슨 말이야? 스테이지 종료라니. 뭐 하던 거 있 었나?”
“14레벨급 고위 기가스를 개발했
다고 알려주는 건가?”
“아니, 그게 이렇게 전체 알림을 할 사안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던 사 람들은 입을 벌렸다.
“아,그렇구나. 그게 끝났어.”
“그래. 스테이지… 맞아. 그런 게 있었지. 허허. 그렇구나. 하하. 그래 우리는 종말을 피해 이곳으로 왔었 지.”
“잠깐. 그러면 혹시 지구로 나가볼 수도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립군… 허허. 분명 도망 왔었는데.”
“바다를 본 지가 벌써 20년이나 된 건가.”
14레벨 중급 스테이지가 끝나가는 어느 날.
어느 순간 강철계(鋼鐵界)라 불리 고 있는 세계의 구성원들이 술렁이 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