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화
[그래서 교육 중에 있습니다.]
지니는 여상한 어투로 말을 이었 다. 아무래도 그녀는 방금 그 소리 를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
“교육이라고?”
책상으로 가 구슬을 잡아드는 내 물음에 지니가 답한다.
[네,함장님. 지원자에 한해 인챈트
학 관련 시물레이션과 교보재 등을 제공하고 있지요. 고작 60일밖에 지 나지 않아 평균 수준은 견습에 불과 하지만… 민경 양이 선별해 보낸 인 원들이 대체로 학력이 좋더군요. 자 질도 기질도 충분하니 시간만 있으 면 수준은 충분히 올라갈 것으로 예 상됩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구슬 을 계속 살폈다.
‘분명 신호를 줬어. 의식이 있는 건가?’
차분하게 구슬을 살펴보지만 역시 나 보고 또 봐도 그냥 구슬일 뿐이 다. 한 톨의 마나,먼지만 한 영력
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옥구슬. 알바트로스함에 있던 장비로 분석해 봐도 그저 평범한 옥으로밖에 인식 되지 않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칭호가 아니 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구슬 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 을 것이다.
‘분류나 해볼까.’
[함장님?]
“아,그래그래. 일단 그렇게 진행해 줘.”
지니의 물음을 대충 그렇게 넘긴 후 나는 구슬의 칭호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마족의 재앙이 보인다. 천족의 재 앙도. 인류의 재앙도 있다. 엘프의, 드워프의 재앙도 있었다.
“…칭호 살벌하구만.”
심지어 거기에서 끝도 아니다. 그 로테스크의 재앙. 공룡족의 재앙. 오 우거의 재앙. 오크의 재앙. 코볼트의 재앙. 재앙. 재앙. 재앙…….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칭호들의 나열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거기에 칭호 중에는 이런 것도 보인다.
리전 학살자.
“리전을 1만 개체나 죽였다고?”
어이가 없다. 세상에 리전이 이렇 게 많았다는 것도 실감이 안 되는데 심지어 그만큼을 죽였단 말인가?
거기에 노블레스인 드래곤을 1백 이상 죽여야 얻을 수 있는 드래곤 사냥꾼에 심지어 선인 사냥꾼도 보 인다.
거기에 언네임드 학살자까지,
“와……
줄줄이 떠오르는 칭호들은 그야말 로 살육의 역사나 다름없다. 그저 텍스트였을 뿐이지만 보는 것만으로 도 코끝에 피비린내가 와 닿는 것만 같다.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하와와의 약속과 별개로 봉인을 풀 자신이 없어진다. 멋대로 봉인을 풀 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래 봐야 언터쳐블보다 약 하겠지만……
나는 절대신인 정령신조차 마주했 던 존재다. 굳이 그가 아니라 하와 만 해도 상급 신위를 가진 존재였 지. 성계신 또한 언터쳐블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도황녀는 경
우가 다르다.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이런 저런 제약들을 가지고 있는 언터쳐 블과 다르게 마도황녀는 완전히 자 유로운 존재. 만일 풀려난 그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나로서는 저 항이 불가능하다.
성향조차 모를 존재를 함부로 풀어 놓는 건 위험한 일이다.
'내가 아레스에 타서 라를 쓰고 신 성을 풀 개방해도 안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구슬의 칭호 가 변한다.
[인챈트]
[16 레벨]
[소울 엔진. 기버전]
“…정말 의식이 있는 건가? 그러면 대화를 걸면 될 텐데.”
황당해하면서도 구슬의 칭호를 구 체화시킨다.
좌라라락! U!
어마어마한 규모의 문자들이 해일 처럼 몰아쳐 방을 채워 버린다. 나 는 전해지는 정보를 대략적으로 읽 어내고 지니에게 물었다.
“지니,7클래스의 인챈트 하나 새 기는 데 문장이 보통 몇 개 정도 들어가?”
[학파와 주문의 종류에 따라 다르 지만 룬 문자의 경우 18자에서 90 자 가량입니다.]
“룬 문자가 아니면?”
[마나어는 조금 더 짧고 용언은 좀 더 긴 편이지만 비슷합니다.]
직접 마법을 쓸 수는 없어도 관련 자료는 잔뜩 가지고 있는 지니의 답 변에 고개를 끄덕인다.
“수십 자 정도란 말이지.”
나는 구체화된 칭호에 표시된 문자
의 개수를 헤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건 아니고 인챈트 술식 하나를 얻었는데 문장은 한글이고 단어가 1 만 8천 개야. 글자 수로 치면 2만 자 정도.”
[…그게 무슨. 궁극 마법도 그렇게 는 안 들어갈 텐데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1만 8천 개의 단어를 살펴본다. 집중. 영혼. 전진. 소원. 응집. 저장 등등… 이제 보니 단어의 종류 자체는 그리 많지 않 다.
잠시 살펴보자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술식을 풀어놓았다.’
글자 하나를 수백 수천 개로 늘려 놓은 셈. 언뜻 보면 비효율적인 일 이지만 칭호를 분류하면 분류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결과물인 지 알 수 있다.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1만 8천 개의 단어가 모든 술식을 파츠화 해 서 흩어놓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단어 하나하나에 담기는 술 식의 제작 난이도가 미친 듯이 낮아
졌다. 1만 8천 개의 단어 중에서 1 클래스 마법사도 새길 수 있는 단어 가 1만 개. 2클래스 마법사도 새길 수 있는 단어가 5천 개. 3클래스 마 법사가 새길 수 있는 단어가 3천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이것은 1〜3클래스 마법사 수천 명 이 있다면 각자 분업해 만들어낼 수 있는 7클래스 인첸트 술식이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제국에서 도 들어본 적 없는 방식인데.]
내 설명을 들은 지니가 황당해한 다. 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응용 마법이라는 소리다. 얼마나 마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이런 일이 가능 하단 말인가?
“뭐,일단.”
나는 구체화한 칭호에 있는 단어를 타이핑했다. 말이 좋아 술식이지 [힘]을 담지 않은 단어는 그저 단어 일 뿐이기에 얼마든지 따라 칠 수 있다.
글자 수가 좀 많았지만 그래 봐야 단어 종류는 12종류뿐이었기에 복 사 붙여넣기를 적극 활용하니 금세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지니,디바이스에 알바 공고 내줘. 대금은 시간과 들어가는 노력을 감 안해서 책정하고.”
[네,함장님.]
그녀에게 작업을 맡긴 뒤 나는 다 시 기가스 제작을 시작했다. 흑호의 개량을 해보기도 하고,새로운 수급 기가스를 제작해 보기도 했다.
10 일.
30 일.
60 일.
나는 흑호와 더불어 흑웅과 흑랑을 만들었다.
아직 인챈트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100% 레어 메탈로 만든 물건들이 다.
“흑웅은 재석이. 흑호는 민경. 흑랑
은 경은하고 선애한테 주면 되겠다. 죄다 프로토 타입이라 성능이 애매 하지만… 뭐, 나중에 업그레이드해 주면 되겠지.”
새로이 만든 수급 기가스들은 원격 조종이 아니라 탑승용이다. 맞춤으 로 만들었으니 각자 잘 적응할 것이 다.
-모든 시험이 끝났습니다!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었습니다! 기 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순위는 공동 1위(66명)입 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완벽 클리어 는 실패다. 하기야 어떤 면에서는 공략이 불가능한 하급이 중급이나 상급보다 더 까다로우니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당신의 클리어 횟수는 1만 회입 니다.
-사망 취소 인원 1만 명을 표시합 니다.
-대상은 혈족. 지인. 거주 지역. 출신 지역 순입니다.
-변경을 원하는 인원을 선택해 주
십시오.
눈앞으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 오른다. 나는 굳이 건들지 않고 화 면을 넘겼다.
-사망 처리를 변경 없이 적용합니 다.
-남은 [사망 처리]의 숫자
-122만 6,228명.
-집행합니다.
학살이다. 아마 몇 달 전이었다면
이것만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지 고 세계경제에 대공황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 참… 백만 명이 죽었는데 제법 선방했다는 생각부터 들다니.”
기막힌 일이었지만 이게 나만의 생 각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이 정신 나간 업데이트 속도에 적응 한 결과가 아닌 온갖 보정을 더한, 거기에 인류의 절반이 전투를 피했 기에 낼 수 있었던 결과라는 게 아 까울 뿐이다.
“지니, 진행률은?”
[현재 68%입니다. 클래스도 클래 스지만 아직 인챈터들의 숙련도가 너무 떨어지는지라…….]
“쯧. 역시 딱 맞게 결과가 나오지 는 않네. 하긴 나왔다 하더라도 겨 우 1개뿐이었겠지만.”
투덜거리는 순간 배경이 변한다.
“끝! 끝이다! 살아 있어! 설마 완 벽 클리어인가요?!”
“완벽 클리어는 아닙니다. 백만 명 정도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백만……
“하,하하. 미치겠군요. 엄청난 숫 자인데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얼마 전만 해도 몇 억씩 죽어나갔 으니까요. 실제로 이 근처에 시체가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적은 사망자 이긴 합니다.”
완벽 클리어에 실패했기 때문인지 환호로 가득 차거나 하지는 않았지 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숨 돌리는 분 위기.
다만 사망자가 별로 안 보인다고 부상자까지 없는 건 아니다.
“여기! 여기 환자 있어요! 도와주 세요!”
“괜찮으세요? 일단 제가 응급치료 를 해드릴게요!”
“여기 치료사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뛰어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힐링 능력이 없는 이들 중에서도 의학 지식이 있 는 이들은 어떻게든 다친 사람들에 게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도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아요?”
“허억… 허억… 괜찮아요. 신경 쓰 지 말고 가세요.”
나는 가쁜 호흡을 내뱉는 선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궁녀복이 피 에 절어 있다. 스테이지의 적은 데 스 나이트였으니 적의 피는 아닐 것
이다.
“가라니요? 피가 이렇게 잔뜩 흘렀 는데?”
다가온 의사가 당황해 되묻자 선애 가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다 치료했어요. 후우… 후우… 제 가 재생 능력이 있거든요.”
“아 그래요? 생체력 수련자인 모양 인데 저기 아주머니들한테 가서 뭐 라도 좀 먹어요.”
자상한 말과 함께 떠나가는 의사. 나는 선애를 향해 물었다.
“너 변신했구나?”
“시,끄러워!”
캭. 하고 성질을 부리는 선애의 옆 에 앉았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참 특이 해.’
레벨을 확인하니 아직도 9레벨. 거 기에 녀석은 정의 무구도 없다.
‘그런데 데스 나이트를 잡았다니.’
잔뜩 다친 모양이지만 그것이야말 로 그녀가 자력으로 데스 나이트를 잡았다는 증거다. 만일 그녀가 데스 나이트에게 살해당했다면 부상 따위 는 없었을 테니까.
뿌득!
“응?”
느닷없는 뼈 소리에 나는 선애를 자세히 보았다.
그녀의 피부가 일렁이고 있다. 날 개 뼈가 피부를 찢어버릴 듯 솟구치 고 누가 바람을 불어넣기라도 하듯 그녀의 몸이 부풀기 시작한다.
“하,하악… 흐으윽!!! 아,안 돼!! 대하! 주변 사람들을 대피시켜!”
“왜? 폭발이라도 하나?”
“위험! 위험하다고는 이런 제길… 흐아악……!”
“이런?!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세 요?”
“어? 저 아가씨 무슨 일이야?”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순간.
나도 놀랐다.
“어?”
9였던 선애의 레벨이 10이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11이 되었다. 12. 13. 멈추지 않고 올라간다. 14. 15. 16. 17레벨!
“아니’ 이건 또 뭐야?”
뿌득! 뿌득! 뿌드득!!!!!
그녀의 등이 터져 나가면서 커다란 날개가 펼쳐진다.
선애가 비명을 질렀다.
“아,안 돼!!! 안 돼!!!!!”
고오오오오---!!!!
그녀로부터 강렬한 기세가 뿜어진 다. 광화문 광장에 있던 수많은 사 람들이 경악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광화문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능력자들이었던 만큼 실로 신속한 대피.
홀로 피하지 않은 나는 가만히 서 서 선애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 니 어느새 그녀의 얼굴조차 뒤바뀌 어 있다. 귀엽기는 해도 미녀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했던 그녀가 놀랄 정도로 빼어난 미녀로 변한 것이다.
등에 난 커다란 날개는 깃털이 달 려서 언뜻 보면 천사처럼 보이는 외 양.
그러나 변신을 마친 그녀는 전혀 천사 같지 않은 기세로 포효했다.
“캬아아아악!!!”
[원일고등학교]
[17 레벨]
[완성형 니케]
나는 경악하기보다 황당해서 그 모 습을 바라보았다.
“아니,이건 또 뭔데 17레벨이야?” 이 날개 달린 여자가 내 나폴레옹 보다 고레벨이라니 어이가 없다.
심지어 플레이어 레벨은 그보다도 높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다른 플레이어들이 기겁한다.
“으악!!! 19레벨!! 19레벨이야!!!”
“폭주다! 무슨 능력인 거야?!”
“모두 피하세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다가 아예 멀 찍이 달아나 버리는 사람들. 요즘 워낙 뒤숭숭한 시기라 그런지 다들 신속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 때.
“오? 아하하하핫!!! 인간 세계! 인 간 세계야!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시체 놈을 안 봐도 되는구나!!! 신 선한 피와 살점을 먹어 치울 수 있 겠어……!!”
요사스러운 목소리로 폭소하는 선 애의 모습에 지니가 물었다.
[함장님,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위험할 건 또 뭐야.”
나는 혀를 찼다. 볼 건 다 봤으니 되었다.
철컥!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털썩!
미친 듯 웃고 있던 날개 달린 미 녀가 쓰러진다.
“…뭐야? 지금 쓰러진 건가?”
“뭐지? 방금 누가 19레벨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와,저 날개 뭐지……
술렁거리는 사람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아니,뭐 이리 허술해? 17렙이면 쉐도우 스토커에도 한두 방 정도는 저항할 만한데.”
나는 만약을 위해 왼손에 꺼내 들 었던 궁니르를 다시 집어넣은 후 선 애를 안아 들었다.
일단 이 뜬금없는 변신이 뭘 뜻하 는지 알아보고. 그리고.
고유세계에 넣을 사람을 더 모집해 야겠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