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 2부-74화 (191/249)

74화

“아니.”

이쪽을 향해 웃고 있는 녀석을 보 고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나는 그 저 녀석의 레벨만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녀석의 외양을 보 고 놀랐다.

‘이건 어른이 된 정도가 아냐.’

민경이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면

재석은 그 이상으로 보였다. 삼십 대 후반. 아니,어쩌면 사십 대로도 보인다.

녀석이 늙어 보인다는 말은 아니 다. 전신을 뒤덮은 강철 같은 근육. 팽팽한 피부는 노화와 거리가 먼 종 류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눈매,입매. 피부에 서 숨길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진다.

‘노인이다.’

만일 재석이 다른 영능을 익힌 수 행자라면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냈 다고 예상했을 것이다. 한 20~30년 정도의 시간을 스테이지에서 보냈을 것이라고,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러나 아니다. 녀석이 어떤 영능 을 익혔던가?

녀석은 생체력 수련자다.

“대체 거기에서 얼마나 있었던 거 야?”

만일 생체력 수련자가 간절하게 자 신의 팔이 네 개이기를 바라며 수련 을 이어나간다면 그 육신은 팔이 네 개가 되기 위해 가장 근본적인 방향 에서부터 육신을 개변시킨다. 팔이 네 개가 될 수 있는 어깨의 형태. 추가된 팔에 적합한 신경계의 구조. 추가적인 근육 등등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생체력은 수련자가 간절히 염 원하는 방향으로 신체를 [진화]시킨 다.

그런데 지금 재석을 보라. 명백하 게 [나이를 먹은]모습. 하지만 세상 에 나이 먹고 싶어 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자신의 노화를 [염원]하는 존재가 과연 존재할까?

결국 지금 그의 모습은…….

녀석이 정말로. 정말로 긴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60년은 넘 었던 것 같은데.”

“뭐?”

나보다 옆에 있던 민경이 더 놀란 다. 아니,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다.

“60년? 60년이라고? 지금 60년이 라고 했어!”

“그 미친 공간에서 60년을 있었다 고?”

“한 번 클리어하고 PTSD를 앓는 사람도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동시에,60년이라는 세월에 납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과연 그렇군. 그 미친 공간 에서 60년… 그래서 가눙했구나.”

“대단해.”

“그야말로 불굴의 정신이야.”

“과연 17레벨인가.”

그들의 말에 나는 재석을 다시 보 았다. 내가 보는 칭호가 아니라 남 들도 볼 수 있는 레벨을.

[17 레벨]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데 혹시 저 이상의 레벨이 있 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저 이상이 아니라 지금 알려진 최 고 렙이 13레벨 아냐?”

“설마… 저 사람이 현 인류 최강이 라고?”

경복궁에 놀러 온 것으로 보이는 5레벨 플레이어의 말에 누군가 반론 했다.

“철가면이 있잖아.”

“철가면 공략이 쩔긴 하는데 레벨 은 도통 올리지 않아서 구분이 안 가. 올리는 공략 대상도 8레벨이 최 고고.”

“들은 소문으로는 0.0.5레벨이라던 데.”

“0.0.5레벨이 뭐야?”

“너 공략 동영상 제대로 안 봐?

직업이 세 개라잖아. 드문 일이긴 하지만 원래부터 관련 재능을 가지 고 있으면 직업을 여러 개 가질 수 있거든.”

“저 사람처럼?”

“그래. 저 사람처럼… 어? 어라?”

불현듯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인다. 아마도 내 머리 위에 떠 있 는 숫자를 봤기 때문이리라.

직업이 여러 개인 사람이 나뿐인 건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괜찮았지 만… 17렙으로 보이는 재석이 찾아 온 사람이 0.0.5레벨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 힘들 것이다.

“누님.”

“…그래. 장소를 옮기지.”

민경은 재석의 '누님’이라는 단어 에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털고 손 뻑을 쳤다.

짝!

주변에 잔뜩 몰려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 사라졌다가,다시 특이한 복 색의 사람들로 변한다. 표면세계에 서 거품세계를 거쳐 이면세계로 진 입한 것이다.

“대하야!”

“어,그래그래.”

“어,그래그래가 뭐냐! 이 정 없는

자식!”

재석이 삽시간에 접근하더니 내 몸 을 와락 껴안았다. 접근하는 자세가 워낙 낮아서 태클이라도 거는 줄 알 았다.

“진짜 보고 싶었어. 큭큭큭. 나 참 웃기지도 않지. 스테이지 진행하면 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얼굴 2위가 너더라고. 정작 가족 친지들은 얼굴 도 가물가물한데.”

“경천칠색이 쓸 만해서 그런가 보 네.”

“뭐 그렇기도 해. 네 가르침을 수 십 년 동안 곱씹다 보니 얼굴을 잊 을 수가 없더라. 아! 물론 진짜 네

가 보고 싶어진 건 갑옷이 박살 난 다음이지만.”

재석의 말에 물었다.

“갑옷 박살 나다니? 복구 기능 꽤 세게 넣었는데.”

“아끼고 아꼈는데도 계속 박살 나 니 못 버티더라고. 9년 차에 철 쪼 가리가 돼서 눈물을 머금고 맨몸 진 행을 했지. 진짜 팔 찔리고 다리 깨 물리면서 갑옷을 얼마나 그리워했는 지. 아,그나저나 너지?”

“뭐가?”

내 반문에 재석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최후의 1인 말이야.”

녀석의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딱히 숨길 이유가 없다. 특히나 ‘최후의 2인’일지도 모르는 녀석 앞에서는 말이다.

“따로 또 누가 있겠어.”

“큭큭. 역시. 완전 미친놈이네.”

“뭐래 미친놈이.”

재석은 한참 곡곡거리며 웃었지만 이내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메탈 에일리언을 보는 순간 우리 스숭님이 최후의 1인이 될 거 라고 예상했지. 심지어 너는 금속 계열 정령사에 금속성 오오라 사용

자이기까지 하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완벽 클리어는 어떻게 한 거 야? 1억이 넘게 남아 있었는데.”

쉴 새 없이 떠벌떠벌 떠들어대는 재석. 나는 녀석의 몸을 가만히 살 펴보았다.

“몸 비쩍 곯은 거 봐. 뼈만 남았 네.”

“네? 뼈만 남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우리의 해후 를 지켜보고 있던 민경이 말을 더듬 었지만 무시하고 고유세계의 물건을 꺼냈다.

팟!

“일단 이거라도 먹어.”

꺼낸 것은 샌드위치다. 빵보다 고 기가 훨씬 많이 들어가고, 특제 소 스가 들어가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 달한 칼로리 폭탄!

“앵? 먹어? 빵?”

그런데 샌드위치를 본 재석의 반응 이 기묘하다.

재석은 나에게 샌드위치를 받아 든 후 멍청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 기만 했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무 언가를 본 것처럼. 잘 모르는 무언 가를 본 것처럼 애매한 표정.

“엥은 무슨 엥이야? 생체력 수련자

면 칼로리 섭취 제대로 해야지. 아 니 완성자도 넘은 거 같은데 몸 상 태가 이 지경이라니.”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그렇지 생 체력 수련자가 피부가 거칠거칠한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샌드위치를 녀석에게 들이밀었다. 안쓰러워서 더는 못 보겠다.

“얼타지 말고 일단 먹어. 먹고 이 야기하지.”

“아,그래. 음식. 먹어야지.”

재석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샌드위치를 잡아 한 입 베어 물었 다.

그리고 굳어버린다.

«..I?”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에 잠시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복궁 안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던 이가 사 람들 중 몇몇이 서서 우리 모습을 살펴보았지만,우리 옆에 서 있는 민경과 뒤늦게 따라온 호위들의 모 습에 함부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아.”

재석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입 크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더니 아 무 말 없이 씹어 삼키고 또 한 입

베어 먹었다.

샌드위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네.”

재석은 멍한 표정으로 너무나 당연 한 이야기를 했다.

“그야 당연히 맛있지. 생체력 유저 들 최고 인기 레시피 중 하나라던 데.”

“아아. 그런가. 인기 제품일 것 같 긴 해. 육즙도 팡팡 터지고. 달달하 고… 그리고.”

홀린 듯 중얼거리던 재석의 말이 멈춘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이,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이런 주책이… 하하… 윽. 끄 윽.../

신음과 함께 녀석의 어깨가 들썩인 다.

“흐 音으 O O O ... 言으..........f”

—I • - ' I • 'I - 메 - ■—I •

“재석아?”

당황해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 만 녀석은 멈추지 못했다.

“끄윽… 크흑… 흐윽...........!”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토록 쾌활해 보이던 녀석의 표정은 완전 히 무너져 있는 상태. 나는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그저 녀석의 등을 두 들겨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쉬웠을 리가 없나.’

경천칠색 수련자는 초진동 블레이 드를 주 무기로 하는 메탈 에일리언 의 천적이다. 거기에 내가 만들었던 공략법도 있으니 녀석은 능력 이상 으로 손쉽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메탈 에일 리언은 완성자급에 맞먹는 강적이 다.

초진동 블레이드를 무용지물로 만 든다 해도 메탈 에일리언에게 물어 뜯기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공략에 실수가 있거나 재수가 없으 면 둘 이상의 적을 상대해야 할 수

도 있다.

거기에 스테이지에서 보낸 시간.

‘60년이라니.’

정말 미친 소리다. 나도 몇십 년이 라는 시간을 겪었지만 우리가 겪은 시간의 질은 전혀 다르다. 그저 기 나긴 휴식을 취하고 온 나와 다르게 그는 매일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투쟁했으리라.

‘하지만 왜?’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대체 무엇 이 녀석을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아무리 현실의 시 간이 멈춰 있다 하더라도 60년은

보통의 시간이 아니다. 영능으로 장 수하게 된 능력자라 하더라도 [수 명]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인 것이 다.

‘그토록 고통스럽다면 그냥 스테이 지를 종료하고 나왔으면 됐는데 어 째서?’

그런데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 었다.

“왜 이런 데에서 징징 짜고 있어?”

눈물을 쏟아내고 있던 재석의 몸이 멈칫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 의 주인을 보았다.

[심판일맥]

[11 레벨]

[심판자 이경은]

언제나 그랬듯 화려한 복장을 걸친 늘씬한 미녀가 그곳에 서 있다. 역 시나 나이를 먹은 모습으로,민경이 그랬듯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외 모.

‘다들 꽤 버렸군.’

벌써 10레벨 스테이지에 이르렀지 만 지금까지 스테이지를 많이 진행 해서 늙거나 성장한 사람은 거의 없

는데 이 잠깐 사이에 그런 사람을 몇 명이나 본다.

‘명예의 보좌 덕분이지.’

스테이지 레벨을 압도적으로 뛰어 넘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이상,스 테이지는 장시간 버티기에 적당한 환경이 아니다. 편한 수면은 꿈도 못 꾸는 잠자리. 한정된 식량과 식 수는 플레이어를 끊임없이 한계에 몰아넣으니까.

그러나 명예의 보좌가 생기며 상황 은 달라졌다.

앉는 대상의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 키며 심지어 바라면 음식까지 보급 해 주고 부상마저 치료하는 밸런스

브레이커. 명예의 보좌.

‘후안,이 망할 놈. 이런 게 1레벨 스테이지 때부터 있었으면 많은 사 람들이 시간을 가지고 역량을 키울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3신기가 생겨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지만 그런 생 각을 안 할 수가 없다. 1레벨 스테 이지를 처음 깨고 영능을 얻은 플레 이어들이 비교적 약한 다수의 적을 상대로 수련을 할 수 있었다면,지 금보다 훨씬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레벨에 맞는 수준까지 역량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하야.”

그런데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내 상념을 지운다.

“음?”

고개를 돌려보자 옷깃으로 눈물을 숙슥 홈친 재석이 내 귀에 대고 속 삭였다.

“점심. 아니,1시. 아니,2시… 아 니야. 3시에 보자.”

“얼씨구? 너 설마 가장 많이 떠오 르는 얼굴 1위라는 게……

“고마워.”

내 손을 잡더니 제 맘대로 흔들어 댄 재석이 몸을 돌려 경은을 향해 다가갔다. 경은은 도발적인 표정으

로 재석을 마주보았다.

“뭐야 너,엄청 늙었네. 많이 굴렀 나 봐?”

묘하게 공격적인 어투. 그러나 재 석은 아무 답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 다.

“뭐야? 지금 내 말 씹어? 이젠 레 벨 오를 만큼 올랐다 이거야?”

이제는 숫제 시비를 거는 느낌이었 지만 재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더 바짝 다가갔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재석과 경은이 마주 섰다. 모델 수준의 신장을 가진 경 은이었지만 이제는 2미터가 넘는 재

석과 마주하니 작고 연약하게만 보 인다.

“뭐,뭐야. 맨날 눈도 못 마주치더 니 이제 와서……

경은의 뾰족한 목소리에 재석이 말 했다.

“미안해.”

“뭐? 미안? 뭐가?”

“이제야 결심해서 미안해. 명확하 게 갖춰지지 않으면 결심하지 못하 는 바보라서 미안해.”

“너! 무슨 개소.”

그러나 그 순간 재석이 그녀를 껴 안았다. 나를 껴안은 것보다 훨씬

깊은 밀착. 재석의 품속으로 경은이 쏙 하고 들어간다.

“이거 놔.”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 리는 목소리.

“놓으라니까! 내 말이 우스워?!”

마치 발작하듯 발버둥 치는 경은이 었지만 그럼에도 재석은 꿈쩍도 않 는다. 그저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 는 모습은 마치 석상처럼 보인다.

“뭐야! 너 뭐냐고!! 지금 뭐 하자 는 거야!”

뻑! 뻐억! 쾅!

그녀의 주먹이 보는 사람이 다 움

찔거릴 정도로 매섭게 재석의 옆구 리를 후려친다. 농담이 아니라 강철 판도 우그러뜨려 박살 낼 정도로 파 괴적인 공격.

그러나 경천칠색이 진동 다음으로 강한 게 바로 물리적 충격이다.

그리고 그렇게 몇 번 더 후려치던 경은의 손이 늘어뜨려진다.

“뭐 하는 거냐고……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

이내 들리는 울음소리.

나는 신음했다.

“아…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 습니다.”

이미 옛날 옛적에 연애 세포가 사 멸한 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 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민경이 있다.

“할 말 있다고 했지? 나가서 하 자.”

“예?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저거 더 구경하려 고?”

“…아닙니다.”

나와 민경은 다시 이면세계에서 표 면세계로 이동했다. 아까처럼 사람 이 모일까 두려워한 것인지 마법 도

구를 꺼낸 민경이 사람들의 인식능 력을 왜곡시키는 결계를 펼치는 모 습이 보인다.

그런데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그나저나 재석이 녀석,음식 문제 는 어떻게 해결한 거지?’

먹는 문제로 엄청 고생하긴 한 모 양인데 고생을 어떻게 해야 60년을 버틸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좌가 있긴 할 테지만 기껏해야 아이언일 텐데… 아닌가? 무기들 나 눠주고 일반인들 키워주며 꽤 유명 해졌으니 브론즈 정도는 되려나?’

그러나 말이 안 된다. 고작 브론즈

랭크 정도로는 칼로리를 어마어마하 게 소모하는 경천칠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

‘3시에 만나면 물어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민경을 따라갔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