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화
종말 프로젝트의 스테이지가 처음 열렸을 때.
1레벨 하급의 시체 괴물은 1의 포 인트를 주었다. 중급은 그 다섯 배 인 5의 포인트를,상급은 하급의 10 배인 10포인트를 주었다.
그리고 2레벨 하급의 시체 괴물은 5의 포인트를 주었다. 중급은 전과 마찬가지로 다섯 배인 25포인트를,
상급은 10배인 50포인트.
스테이지가 점점 진행될 때에도, 보상 포인트는 이 비율을 정확하게 지켰다.
난이도가 1단계 올라가면 5배.
중급과 상급의 보상은 하급의 5배 와 10배.
돌아보면 종말 프로젝트의 클리어 보상은 꽤 후한 편이다. 직업이 하 나라면 스테이지를 딱 1회씩만 클리 어해도 경험치 포션으로 해당 레벨 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 물론 영 약을 산다거나,마법무구를 구매한 다거나 하려면 추가적인 클리어가 필요하겠지만 이면 세계에서 마족들
을 잡아 레벨을 올리려면 그야말로 수천수만의 마족들을 죽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후한 보상 인지 알 수 있으리라.
‘후한 대신 도전자를 다 죽여 버릴 난이도를 줘서 문제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스테이지가 제법 후한 포인트를 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한 포인트를.
‘나는 죄다 철광석 사는 데 썼지.’
나는 매 스테이지를 적게는 수십 수백 번,많게는 천 번 이상 클리어 했다.
특히나 1회 클리어 보상이 234만
3750포인트인 9레벨 상급 스테이지 를 1000번 클리어하자 단지 그것만 으로도 234만 3750톤의 철광석을 얻을 수 있었다. 고유세계의 크기가 커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철광석은 꽤 저렴한 편이니까.’
자판기가 판매하는 [재료] 칸에서 기본 자원은 네 가지다.
나무,돌,철,그리고 마나석.
다른 플레이어나 국가,그리고 기 업들은 그중 마나석에 온 정신을 팔 았지만 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철.
정확히는 철광석뿐.
자판기에서 영약도,장비도 살 필 요가 없는 나였기에 총 400만 톤 이상의 철광석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국가 규모의 어마어마한 자원량!
그런데.
그런데…….
[함장님.]
지니가 날 깨워 말했다.
[철광석이 떨어져 갑니다.]
“•"뭐??”
어이없어하는 순간 눈앞으로 텍스 트가 떠오른다.
-최후의 1인.
-현재 1명의 시험자가 시험을 진 행 중입니다.
최후의 1인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럭 빌드를 완성하 는 순간부터 최후의 1인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다음으로 뜨는 텍스트에도 차분할 수는 없었다.
-현재 남은 [사망 처리]의 숫자
-1 억 1,112만 6,777명입니다.
“아니,최후의 1인에 철광석이 부 족할 정도로 오래 플레이했는데 사 망 숫자가 이렇게까지 남았다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후안이 만들어낸 3신이 정의의 병기,진실 의 언어,명예의 보좌라는 힘을 줬 는데 9레벨 때보다 클리어율이 더 떨어지다니.
[스테이지의 난이도가 완성자의 벽 을 넘어섰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더불어……. 3신의 선별에 오히려
피해를 보는 이들이 존재할 겁니다.]
“아.”
부정의한 자들은 크게 상관없을 것 이다. 피부에 문신이 생긴다고 스테 이지를 진행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코가 긴 것은 어떨까? 1미 터쯤 길다면? 냉장고에 숨으면 문을 닫을 수가 없고 골목에 숨었을 때 코가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앉는 자리마다 가시가 돋아난다면 어떨까? 스테이지의 규모가 너무도 커져 무조건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앉거나 눕기만 하면 날카 로운 가시가 피부를 찌른다면?
“상위 멤버 중에 악인이 많은가 보 네. 하긴 이면 세계 굴러가는 꼬락 서니를 보니 고위 능력자가 착하게 살 일이 없어 보이긴 해. 다 제멋대 로 살겠지.”
한두 번 클리어하는 건 상관없겠지 만 클리어에 지대한 문제가 생기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스테이지가 클리어되어 다른 사람 을 살려야 할 때……. 인간이라면 당연히 악인보다는 선인을 살리길 원할 거야. 선인을 살리지 않고 악 인을 살리면 자신에게 악업이 가중 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테지. 후안
이 녀석……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모든 인류를 구할 생각이 없군.’
생각해 보면 후안은 종말 프로젝트 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권능 을 휘두를 수 있었다. 아직 지구의 상황에 여유가 있었을 때 3신을 강 림시켜 정의와 진실,명예의 법칙에 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줬다면 인류 는 훨씬 쉽게 스테이지를 진행했을 것이다.
즈
‘녀석은 인간을 좀 줄여놓을 생각 이야.’
정확히는 현 인류 중에서 악인을 좀 쳐내길 원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책상을 정리할 때 필요한 것들은 필 요한 대로 모으고 먼지와 쓰레기는 쓰레기통으로 털어내는 것과 같다.
“뭐,당장 중요한 건 아니군.”
나는 아직도 깨야 할 스테이지가 한창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내 상태 를 확인했다.
-당신은 그랜드 마스터 (Grand ma ster) 랭크입니다.
-현재 힘의 소모로 다이아몬드 (Diamond) 랭크로 다운되어 있습니
다.
그랜드 마스터 랭크가 마스터 랭크 를 거쳐 다이아 랭크까지 떨어져 있 다. 배럭 유지에 소모되는 영력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빠르다고 생각했는 데,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지니,클리어를 몇 번이나 했지? 시간은 얼마나 지났고?”
[클리어 횟수는 4511만 3322회입 니다. 그•리고 시간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니가 말했다.
[대략 26만 년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물론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훨씬 느린 클리어 타임을 가진 아바타를 찍어낸 것이 바로 이 엄청난 시간을 패스하기 위 함이었으니까.
[오! 너 일어났구나? 이 장난감에 깃든 특성 좀 어떻게 해봐! 내구가 너무 딸려서 부무장을 달 수가 없 어!]
“앵?”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저 너머에서 은빛의 거인이 성큼 다가 온다. 당연한 말이지만 녀석은 신급 기가스인 아레스.
그런데 녀석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 언뜻 보니 아바타로 짐작되는 데 10층 건물만 한 덩치를 가진 아 레스의 손에 잡혀 있으니 무슨 피규 어처럼 보인다.
[관대하]
[9 레벨]
[아바타-1761]
“와. 1761이라니.”
모델명 뒤에 붙은 숫자는 해당 모 델을 크게 개량해 전과 다른 기종일 때마다 붙이고 있다. 내가 아바타
-11 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건 아바 타 10까지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 기에 충분한 성능을 가지지 못한, 일종의 테스트 기체였기 때문이고 그 뒤로는 고작 아바타-12를 만들 었을 뿐.
그런데 1761이라니? 모델명을 변 경할 정도의 유의미한 업그레이드가 천 번 이상 있었다는 건가?
심지어 레벨은 더 무시무시하다.
9레벨.
이런 스펙의 아바타가 내 공략법을 가지고 플레이하면 웬만한 마스터를 넘어서는 속도로 스테이지를 공략할 것이다.
“아니,내가 정지되어 있어서 특성 레벨을 못 올리는데 어떻게 레벨을 이렇게까지 올렸지? 재료도 거의 강 철뿐인데.”
[꼭 영능만이 기체의 성능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힘 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맞아,맞아. 쓰레기 같은 장난감이 지만 개량하다 보니까 재미있더라 고!]
그렇게 말하며 아레스가 자신의 손 에 들려 있던 피규어. 아니,아바타 -1761 를 내려놓았다.
“어?”
그런데 그 크기가.
크다.
“이게 뭐야? 2.5미터는 되겠는데?”
아바타 시리즈는 1.5미터로 비교적 작게 만들었다. 목적은 스피드 런이 아니라 안정적인 클리어이기에 극단 적인 성능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적은 철광석으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이니 은밀성과 탐색 능력에 집중했다.
어차피 공격은 아바타 시리즈 자체 의 능력이 아니라 스테이지 곳곳에 숨어 있는 병기와 구조물을 이용해 서 해야 했으니까.
[아,맞아. 차례대로 보여줘야겠네.]
“차례대로?”
내 의문에 지니가 답한다.
[네,함장님. 현재 완성품이라 할 만한 기체는 세 종류입니다.]
“세 종류라. 스타일이 다르다는 말 이네.”
[그렇습니다.]
지니가 그렇게 말하자 아레스가 한 쪽으로 손을 뻗어 새로운 아바타 시 리즈를 가지고 온다.
[관대하]
[4 레벨]
[아바타-421]
그것은 처음에 아레스가 가져온 아 바타 시리즈와 다르게 극도로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다. 옆에 서 보니 녀석의 머리가 내 골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에 레벨은 내가 만들었던 아바타-11보다 낮은 수준.
아레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아바타-421. 네가 만들었던 아바 타 시리즈의 극한을 찍은 녀석이지. 신장은 88센티미터,중량은 18킬로 그램이야. 스테이지 클리어 타임은
최단 54시간에 최장 77시간. 좀 더 중량을 줄여서 422버전도 만들었는 데 마지막 전투에서 오히려 당하는 바람에 스테이지가 닫힐 뻔하고는 폐기했지.]
“이 작은 녀석이 스테이지를 클리 어할 수 있다니.”
나는 아바타-421을 잡아 들었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쌀 포대보다도 가벼운 녀석은 마치 작은 꼬마를 보 는 것 같다.
[대단하지? 아바타-421은…….]
“너무 길다. 이 녀석은……. 그래. 고블린이라고 하자.”
[아바타 타입,고블린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아레스의 모 습에 내심 놀란다.
‘이 녀석.’
이 작은 로봇을 보는 아레스의 모 습에서 애착이 느껴진다. 자아도 없 는 로봇과 갑자기 우정을 나눌 리는 없으니,아마도 아바타를 개량해 나 가며 생긴 감정이리라.
‘이렇게까지 해줄 줄이야.’
내 시간을 정지한 후 지니와 아레 스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스테이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야기 를 끝냈었다. 아레스와 지니 모두
자신의 의식을 대기 상태로 전환한 후 기본적인 프로그램만 돌리게 했 던 것.
그저 종종 깨어나 상태나 확인해 주길 바랐는데,지금 분위기를 보니 20만 년은 아니어도 꽤 장시간 깨 어서 아바타 시리즈를 개량해 온 것 으로 보인다.
[다음은 아바타-888입니다.]
[이거야.]
다시 아레스의 손이 내 앞에 쿵, 하고 아바타 시리즈를 내려놓는다.
[관대하]
[6 레벨]
[아바타-88別
[아바타-888. 함장님의 6레벨 원 거리 공략법을 참고로 만들어진 기 종입니다. 신장은 130센티미터,중 량은 30킬로그램입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타임은 최단 37시간에 최장 44시간으로 단축되었지요.]
아바타-888은 비대하게 확장된 양 팔이 인상적인 기체다. 양팔에는 접 이식 쇠뇌가 설치되어 있다.
“최장이 44시간이면 엄청 빠른 데?”
[더불어 극도로 안정적이라는 장점 도 있습니다. 맵 구성을 모두 꿰뚫 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하지만요. 다음 스테이지의 형태가 개방형으로 바뀌면 더욱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아바타 -888을 자세히 살폈다. 늘어트리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기다란 팔. 특 수 처리되어 어마어마한 장력을 발 휘할 수 있는 강철 활대와 활줄까 지.
“이 녀석은 헌터로 하지. 마지막은 당연히……
[그래,이 녀석이다. 아바타-1761.
주어진 한도 내에서 혁신적인 성능 을 낼 수 있도록 아예 처음부터 새 로 만든 물건이야!]
나는 맨 처음 아레스가 내려놓은 기체를 바라보았다. 전체적인 형태 나 관절의 모양,덩치 등등 앞의 두 기종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결과물.
바로 앞 기종,그러니까 헌터가 888번인데 이건 1761번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녀석에게 지니와 아레 스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 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너무 큰 거 아냐?”
아바타-1761이 자재를 낭비한 것 은 아니다. 외부 장갑 없이,마치
스켈레톤처럼 골격만으로 유지되는 몸체에 달린 보조 무장 하나 없었으 니까. 최대한 철을 덜 쓰기 위한 고 민이 엿보이는 결과물.
그러나 아무리 아낀다 해도 덩치 자체가 코스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
2.5미터나 되는 덩치를 가진 아바 타-1761은 아무리 봐도 100킬로그 램이 넘어 보였다.
[아바타-1761. 255센티미터,중량 94킬로그램입니다.]
“생각보다는 가볍지만……. 그래도 고블린을 다섯 기는 만들 수 있을 정도잖아?”
어차피 한 번 클리어하면 끝이고 스테이지 특성상 재활용도 불가능한 데 아무 특징도 없는 인간형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함장님.]
의문을 표하는 내 모습에도 지니는 차분하게 답한다.
[아바타-1761의 스테이지 클리어 타임은.]
묘하게 그 목소리에 뿌듯함이 담겨 있다.
[최단 4시간. 최장 9시간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