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화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있는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다. 이파리가 얼마나 무성한지 햇빛이 땅까지 와 닿지도 못할 정도.
결국,땅 위의 존재는 대낮에도 어 둠 속을 걸어야 한다.
“컨셉 꾸준하네. 기껏 실외인데 결 국 또 컴컴하다니.”
터벅터벅 숲을 가로지른다. 발밑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숲속 이지만 이미 수백 번을 가로지른 길 이라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크아아아!”
소리 소문 없이 모습을 드러낸 오 우거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내려찍 는다.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녀석 의 모습은 마치 눈앞으로 쏟아지는 산사태를 보는 것처럼 압도적이다.
경천칠색 (M 天七色).
녹機).
웅!
주먹과 주먹이 충돌하는 순간 녹색 의 파동이 흩뿌려진다.
오우거의 주먹에 실려 있던 물리력 이 진동으로 변해 왼팔로 흡수되는 걸 느끼며 정면으로 내디딘다.
쿵!
바닥이 울릴 정도로 묵직하게 대지 를 박차고 점프. 굽혀진 오우거의 무릎을 밟아 거세게 가속한다.
그리고 그대로.
경천칠색 (薦天七色).
주황(朱黃).
오우거의 무릎을 박차는 순간 오른 팔 전체가 주황색으로 빛난다. 그러 다 주먹이 허리를 지나갈 때는 팔꿈 치까지 빛났고,마침내 오우거의 눈 을 후려치는 순간에는 그 모든 빛이 주먹으로 집중된다.
“쿠웍!”
그러나 주먹이 안구를 때리려는 순 간 오우거가 고개를 숙인다. 주먹은 각막 대신 녀석의 눈썹을 때렸다.
텅!
“크어어어엉!!!”
고통의 괴성을 지르며 마구 휘두르 는 손을 피해 근처 나무로 올라선 다. 욕이 절로 나온다.
“또 실패야! 진짜 더럽게 안 맞네!”
둔해 보이는 덩치에 안 맞게 오우 거의 반사신경은 고양이를 넘어선 다. 배가 불룩 나온 주제에 공중제 비를 돌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하고 잡히면 나라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 의 괴력까지.
수십 수백 번을 싸웠음에도 도저히 한 방 컷을 낼 수가 없는 적이다.
“기습이 아니면 아무리 해도 한 방
에 해결할 수가 없네.”
오우거 녀석이 어찌나 예민한지 그 냥 몸을 숨기는 정도로는 감각을 속 일 수가 없다. 그나마 잠을 잘 때를 노리면 기습할 수 있지만,그렇게 되면 플레이 타임이 답도 없이 길어 진다.
지금은 8레벨 상급 난이도 2차 시 험.
이미 공략 영상은 1차 시험이 끝 나고 다 푼 상태이기 때문에 플레이 타임을 늘릴 이유가 없다.
“책.”
파라라락--!
말과 동시에 눈앞으로 한 권의 책 이 떠올라 자동으로 펼쳐진다. 표지 에는 아무런 글자도 없어 제목조차 알 수 없었지만,펼쳐진 페이지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소제목이 쓰여 있 다.
동시에 마력 수치가 200포인트에 서 200(+600)으로 변했다.
경천칠색 (篇天七色).
청 情).
오른팔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다. 주황과 똑같은 진동이지만 그 구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주황은 오우거 가 나를 때렸던 충격 에너지를 진동 으로 변환해 돌려준 것이지만,청색 은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영자력을 연료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600포인트의 영자력을 태 워 만들어낸 진동은 나 스스로의 생 체력에서 만들어내는 진동과 차원이 다르다.
우웅-!
푸른빛이 점차 밝아지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해진다. 스스로의 힘이 아 니었기에 주먹으로 진동을 집중시키 지도 못하고 진동을 만들어내는 데 수 초나 걸렸지만,나에게 머리를
맞아 정신 못 차리던 오우거는 제대 로 대처하지 못했다.
우르릉-!
오른손이 오우거의 관자놀이와 충 돌하는 순간 천둥소리가 난다. 마치 얻어맞은 종처럼 파르르 떨리는 머 리통은 그 안의 내용물이 어떻게 되 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쿵!
바닥에 쓰러지는 오우거를 피해 오 른팔을 가볍게 턴다. 완전히 해소되 지 않은 진동이 윙-하는 소리와 함 께 흩어진다.
[겨우 두 방 만에 오우거를 잡다
니. 그 투법도 꽤 익숙해졌는데?]
“나폴레옹의 영자력 덕분이지 뭐. 순수한 실력으로 싸웠으면 아직도 30분은 걸려.”
겸양의 말을 내뱉었지만,경천칠색 에 꽤나 숙련된 것도 사실이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녹색으로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축적된 진동을 찰나의 순간 주황으 로 뿜어낼 수도 있게 되었고 외부의 영력이라 할 수 있는 영자력을 한순 간에 끌어와 내 것처럼 휘두를 수도 있게 되었다.
특히나 영자력을 진동으로 바꾸는 청색은 처음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생체력 수준이 이제 전문가 정도 인데 오우거를 때려잡는다니…….]
“금수저의 특권이지.”
원래 경천칠색은 이런 투법이 아니 다. 육신의 힘을 진동으로 축적하는 적색과 외부 피해량을 진동으로 바 꾸는 녹색으로 마치 저금을 하듯 진 동을 축적하다 그렇게 모인 진동을 주황으로 내뿜어 적을 격살하는 것 이 정석.
‘비효율적이야.’
그러나 나는 그렇게 싸우지 않는 다. 당연하다. 그 방식은 시간도 많 이 들고 무엇보다 칼로리 소모가 심 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힘을 진동으로 축적하다니 왜 그런 뻘짓을 한단 말인가? 나에 게는 이미 거대한 영자력이 있는데.
[하지만 이게 맞는 걸까? 경천칠색 은 전신휘광과 완전히 다른 구조라 서 단언하기 힘들지만……. 지금 너 무 기형적으로 수련하고 있는 거 같 은데.]
아레스의 말대로 내 수련법은 정상 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어느 순간 부터 적색은 쓰지도 않고 있다. 원
래 경천칠색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천칠색의 첫째인 적색 임에도 배제해 버린 것.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적색을 쓰 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내가 적색을 쓰는 건 말하자면 수 백억 자산을 물려받은 재벌 2세가 자신만의 힘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 를 해 백만 원 남짓의 돈을 벌어 저축하는 것과 같다.
그건 생활력이 강한 게 아니다.
미련한 것이지.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 만……. 청색의 활용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5클래스 급 마법에 준하는 파괴력을 3초 안 에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이지요.]
“많이 썼으니까.”
정순한 영자력보다 칼로리가 더 귀 중한 스테이지에서 나는 청색을 적 극적으로 사용했고,그 결과 빠르고, 강력하고,적은 코스트로 청색을 발 동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너무 시끄러워.”
이 망할 놈의 식이 얼마나 요란스 러운지 제대로 쓰려면 은신 플레이 는 꿈도 못 꾼다. 소리만 해도 어마
어마한데 심지어 빛까지 나니 장님 에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내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역시나.
쿵!
하늘에서부터,정확히는 높은 나무 에서부터 거대한 덩치가 떨어져 내 린다. 다른 오우거들과 달리 날렵한 근육질 몸매를 가진 녀석이다.
[종말 프로젝트]
[9 레벨]
[날렵한 러네
“수련 겸 생체력만으로 싸우고 싶 긴 한데.”
파라라락!
내 옆에 떠 있는 책의 페이지가 바람에 나부끼듯 마구 넘어간다.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영자력을 담 아 어빌리티를 발동했다.
“죽지 않는 황제.”
내 주위로 실드가 생겨난다.
“크앙!”
잠시 나를 견제하던 러너가 즉시 달려든다.
“똑똑해. 이 경우에는 그 장점이
발목을 잡게 되지만.”
원래 러너의 전투 방식은 이렇지 않다. 이름 그대로 틈만 나면 뛰어 다니는 이 녀석은 날렵하게 내 공격 을 피하거나 주위를 돌면서 장기전 으로 전투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의미심장한 실드 가 생긴다면?
녀석은 불안감을 느끼고 그것을 깨 려고 한다. 이 보호막이 뭔지는 몰 라도 내가 원하는 걸 훼방 놓겠다는 심리다.
광! 광! 쾅!
주먹으로 후려치고,멀찍이 달려갔
다가 돌진해 발로 걷어차고. 심지어 바위를 들어 내려찍지만 어빌리티, [죽지 않는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 는다. 너무나 당연한 게 우주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실드가 저따위 공격에 어찌 뚫리겠는가? 이런 어빌 리티가 아니라 그냥 평상시 달고 다 니는 나폴레옹의 실드도 핵폭탄을 막는다.
‘물론 아이언 하트만 가지고 있는 나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가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 이언 하트인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다른 부품들도 중요하다. 실드 생성 기도,입자 방출기도 없는 상태에서
는 아이언 하트의 출력도 당연히 제 한된다. 그나마 관련 어빌리티가 있 으니 실드라도 치는 것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증폭 기술을 사용한다.
이후 과정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 다.
내 오른손이 청색으로 빛나고-콰르릉!!!!
“크… 어어.”
쿵!
쓰러지는 러너의 뒤로 텍스트가 떠 오른다.
-클리어!
-다음 전투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전투를 시작하지 않으면 스테이지는 종료됩니다.
“시작.”
-레벨 8. 상급(上級)이 설정되었습 니다.
-100시간 안에 해당 적(11개체)을 제거하십시오.
-10초 후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
-10. 9. 8. 7…….
-3. 2. 1. 전투를 시작합니다.
그 문장을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았 다.
시간제한 100시간.
날수로 치면 4일이 넘는 시간을 주는 만큼,8레벨 스테이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넓이를 가지고 있다.
나는 물었다.
“지금이 몇 번째지?”
지금껏 조용하던 지니가 대답한다.
[정확히 511회째입니다.]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었지?”
[4,595시간. 그러니까.]
다시금 숲을 가로지른다. 고개를 들어봐도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대략 190일 정도입니다.]
터벅터벅 걷는다. 계속 뛰어가던 루트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안 끝나네.]
“그러게. 안 끝나네.”
[굳이 네가 이렇게 계속 클리어할 필요가 있을까? 슬슬 재미도 없고.
이건 그냥 노가다잖아.]
아레스의 말대로 노가다다. 처음에 는 재미로 했지만,이제는 오우거 얼굴만 봐도 구토가 나올 정도로 지 겹다.
사실 세상 그 어떤 재미있는 게임 도 200일 동안 내리 하면 재미없을 것이다.
와삭!
이파리가 특이하게 생긴 나무를 타 고 올라가 열매를 따 먹는다. 열매 의 등장 위치는 랜덤인 데다 나뭇잎 에 가려져 있기에 잘 보이지 않지 만,이 망할 스테이지를 500번 넘게 클리어했더니 대충 봐도 위치 확인
이 끝난다.
“식량 사정은 어때?”
[육류는 이제 절반 정도 남았습니다.]
“스마트 팜은?”
[100% 가동 중입니다만…….]
“그래,그래. 내가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었지.”
[옥수수가 아닙니다. 빅 브래드는 레 온하르트 제국의 특수 작물인…….]
“그래,옥수수.”
대충 말하며 나무 위를 걷는다. 그 러면서 포인트를 모조리 훑어 식량 이 될 수 있는 모든 과일을 챙겨 먹었다.
“오우거 녀석만 먹을 수 있어도 식 량 걱정은 없을 텐데.”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어쩔 수 없 는 일이다. 오우거의 시체는 죽는 순간 삽시간에 썩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살점 하나 손에 넣을 수 없 다. 절대 스테이지에서 풍족하게 먹 고사는 꼴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악 의가 느껴진다.
괜히 스킬 중에 [광기의 식사] 따 위를 집어넣었겠는가?
“크워워워!!!!”
“그래,나도 반가워.”
오우거를 잡는다. 숲을 돌아다니며
열매들을 따 먹고 물을 마신다. 그 리고 또 오우거를 잡는다.
최적의 루트. 최적의 동작. 안전한 수면과 고유세계에서의 식사까지.
이제 나는 뛰지도 않는다. 원래도 속도보다 효율을 중시했었지만,이 제는 더욱 더 극단적으로 그것을 추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전투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다음 전투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다음 전투를…….
시간이 물 흐르듯 흐른다.
나는 오우거를 잡았다. 잡고,잡고, 또 잡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림이 울렸다.
-최후의 10인.
-현재 10명의 시험자가 시험을 진 행 중입니다.
“음?”
삽시간에 썩어 사라지는 오우거의 시체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난 그 느닷없는 알림에 놀라지도 못하
고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신음했다.
“•••겨우 10명이라니. 완벽 클리어 까지는 얼마나 남았는데?”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친절하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현재 남은 [사망 처리]의 숫자
-1 억 1,322만 5,531명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