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방 안의 분위기는 음산하다. 한쪽 벽 가득히 튀어 있는 피. 바짝 말라 미라처럼 보이는 시처
그러나 이미 같은 광경을 셀 수 없이 보았던 철가면은 아무렇지 않 게 성큼 다가가 시체 머리에 눌려 있는 노트를 빼 들었다.
[일기장입니다. 시간 없으니 대충 내용을 간추리자면 이 저택의 주인
인 알렉 백작이 고아들을 모아 돌봐 왔는데 그중 한 아이인 안젤리나라 는 꼬마가 뭔가 좀 이상하다. 뭐 대 충 그런 내용입니다.]
파라락!
페이지를 대충 넘긴다.
[이 일기장을 보는 게 트리거입니 다. 이 일기장을 보면 일정 영역을 돌아다니던 시체 괴물 중 하나가 저 기 복도 끝에 소환되죠.]
일기장을 덮고 밖으로 나간다. 그 러며 설명한다.
[아,참고로 나타날 녀석은 토마스 라고 합니다. 이 일기장에 있는 ‘고
아 중 가장 덩치가 큰 토마스’라는 게 바로 그 단서지요. 또 내용을 꼼 꼼히 살펴보면 ‘토마스가 또 뛰어다 녀서 주의시켰다. 아무리 가르쳐도 이 녀석은 발아래를 살피지 못한다’ 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게 녀석의 약점이죠.]
“저건 맞아. 그러고 보니 덩치 녀 석 일단 뛰면 아래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물건들에 걸려 넘어지곤 했 지……. 하지만 그게 일반인도 활용 가능한 약점인가?”
화면을 보다가 무심코 중얼거리는 무인의 말에 대답하듯 철가면이 말 한다.
[즉,이 녀석은 하단을 노리는 함 정에 걸린다는 겁니다.]
철가면. 그러니까 화면 속의 나는 척척 스테이지를 진행했다.
플레이어를 노리는 함정을 역이용 해서 적을 처리한다. 시체 괴물의 동선은 함정을 피하도록 짜여 있지 만 [돌진]하는 적을 함정으로 끌어 들이는 건 가능하다.
중앙 홀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배회 중인 적을 상들리에를 떨어뜨 려 잡는다. 7미터 거리에서 손가락 3개 두께의 철사를 맞히면 된다.
숨겨져 있는 향수를 찾아내 몸의
냄새를 숨기고 은신한 적에게 다가 가 벌려진 녀석의 입안에 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한쪽 복도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전력 질주로 달려가 원거리에서 저 주를 거는 적의 코앞까지 접근. 캐 스팅이 끝나기 전에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와.”
불현듯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거 가능하겠는데?”
느닷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늘씬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가벼운 복
장에 긴 머리칼을 대충 올려 묶은 상태의 경은이다.
‘뭐야. 있는지도 몰랐네.’
평소 이가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어딜 가도 시선을 받던 그녀지만 오 늘만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식사 중 이었기에 몰랐다. 여전히 노출이 많 지만 평소에 비하면 훨씬 얌전한 복 장. 그녀 역시 스테이지 자체에 집 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아가씨.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저걸 일반인이 할 수 있다고요?”
“적어도 스펙상 불가능한 건 하나 도 없잖아?”
“하지만 일반인이 어떻게 어둠 속 을 기어서 괴물의 지척까지 접근하 겠어요? 일단 앞이 안 보일 텐데.”
반박이 나왔지만 그녀는 차분히 설 명했다. 눈이 반짝이고 있다.
“영상에서 공략이 나왔잖아. 오른 쪽. 왼쪽. 앞으로 갔다가 왼쪽,왼 쪽! 길을 외워 가면 되지!”
“아니,아무리 그래도……
“게다가 무서울 텐데.”
여기저기 응성거리며 담론을 나누 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튀김 덮밥을 받아 왔다.
“아,화면 가리지 마세요.”
“앗,죄송합니다.”
꾸벅 사과하고 자리에 앉는다. 퉁 명스러운 말투에도 별로 화는 나지 않는다.
“대단한데……. 그냥 클리어하기 급급했는데 한 번 깨고 말 스테이지 를 저렇게까지 연구할 수 있다니.”
“게다가 어지간한 무기만큼이나 비 싼 캠코더를 구매해서 말이야.”
사람들은 몰입해서 화면을 보고 있 다.
사실 이런 상황은 예상했다.
스테이지는 인류 전체가 당면한 절 망이다. 스테이지의 영향력은 너무
나도 커서,차라리 거대한 사회 현 상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
어떤 문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대상을 인류 전체로 두 면 어디까지나 국소적인 현상일 뿐 이다.
마이클 잭슨은,비틀즈는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러나 과연 그들을,그리고 그들 의 음악을 [모든] 인류가 알고 있다 고 장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이 사람 이름 인지,지명인지도 구분하지 못할지 도 모른다. 음악에 관심이 없다면,
오지에 살고 있다면,개인적인 환경 과 상황이 음악과 거리가 멀다면 얼 마든지 그럴 수 있는 문제니까.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이 전 세 계를 할퀴었다고 표현하지만,그조 차도 사실은 일부와 일부의 문제에 불과하다.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보 면,오히려 총성 한 발 못 들어본 이들이 더 많았겠지.
그러나 종말 프로젝트는 다르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문제.
단 한 명의 예외조차 없이 모두가 맞닥뜨리게 된 현실이다.
그리고 그 와중,그 문제를 해결할
[공략법]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많은 분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지 않고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 다.]
마지막 남은 방. 보스방을 향해 철 가면이 걷는다.
[정확히는 18억 4,855만 1,511명. 이해합니다. 공포 게임도 무서워서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키리리리릭!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하세요. 당 신들이 스스로를 구하지 않는다면.]
철컹!
거대한 철문이 열린다. 한 손에 권
총을 든 채 철가면이 말한다.
[언젠가 타인이 당신들을 구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뎅! 뎅! 뎅! 뎅!
거대한 종소리가 울린다. 커다란 의자가 자리하고 있는 접견실의 중 앙에 달린 시계가 12시를 가리킨다.
-보스(Boss). 등장.
-악에 물든 자. 안젤리나.
[키이〜]
괴성이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시계의 위에 앉아 있는 소녀 의 모습이 보인다.
“잠깐. 왜 보스는 공략이 없지?”
“그냥 이대로 싸우는 건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굳이 더 공략할 필요가 없다.
안젤리나는 보스답게 3레벨을 넘어 서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그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원래 스테이지가 정해놓은 공략은 따로 있습니다. 저 위에 있는 시계 가 1분마다 안젤리나에게 디버프를 걸어주니 시간을 끌면서 버티는 쪽
이지요. 다만,이렇게 하면 무조건 부상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안젤 리나는 코앞에서 쏘는 총알도 피할 정도의 인지능력에 살점을 우습게 발라 버릴 수 있는 손톱을 가졌으니 까요. 아마 피와 살점을 홀려가며 처절하게 싸워야 간신히 이길 수 있 겠지요.”
[캬캬!!]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안젤리나가 철가면의 앞에 뛰어내린다. 작은 체 구에 회색의 피부,그리고 어린아이 의 외향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뒤 틀린 미소.
그러나 철가면은 태연히 말한다.
[그런데 일기장을 잘 보면 안젤리 나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 젤리나는 뭐든 금세 흥미를 잃고 주 의가 산만하다’라는 이야기. 이건 소악마인 임프의 특성이기도 한데 요. 이걸 활용하면 이런 식의 간편 한 공략이 가능합니다.]
권총을 들어 올린다. 권총은 그녀 에게도 위험한 무기지만 안젤리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 녀의 인지능력은 인간을 초월한 수 준이기 때문에 눈앞에서 총을 쏴도 무리 없이 피할 수 있는 것.
물론 겨우 4레벨이 총알을 보고 피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저 총
을 쏘는 인간의 동작을 보고 피하는 것이지.
[답은 필살. [한눈팔기]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총을 든다. 안젤리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바 닥을 박차 렬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때.
[어?]
깜짝 놀란 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 며 왼쪽을 본다.
[캬?]
안젤리나의 고개가 철가면이 바라 본 방향으로 돌아간다.
탕!
[캬악?!]
어깨에 총을 맞은 안젤리나가 바닥 을 뒹군다.
[어깨를 맞혔습니다만,지금 눈알 을 맞혔다면 녀석은 죽었을 겁니다. 여태까지 제 플레이를 본 분들은 아 시겠지만,당연히 빗나간 건 아니고 빗나가도 괜찮다는 걸 보여 드리려 고 한 겁니다.]
[캬아아아!!!]
몸을 일으킨 후 분노하며 다시 달 려드는 안젤리나. 그리고.
[어?!]
[캬?]
필살 한눈팔기!!!
고개를 돌렸던 안젤리나가 다시 고 개를 돌리는 시점에 맞춰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맞힌다.
[캬아아아아!!]
[어?!?!]
[♦••캬?]
한 번 더 한눈팔기를 당한다. 완전 히 농락이다.
[레벨 3. 상급 공략은 여기에서 마 치겠습니다.]
철컥,하고 총을 재장전한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탕!
그•리고 영상이 끝난다.
“아니,이게 뭐야.”
“한눈팔기라니……”
“이런,미친……
충격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바라 보다 오징어 튀김을 집는다.
바삭!
너무 맛있다. 저 마족 아줌마가 좀 고깝긴 해도 요리 실력은 제법이란 말이야.
“와. 저거 대체 누구지?”
“한국말을 쓰는 거 보니 이가 출신 아니겠어?”
“지킴이일 수도 있지. 지킴이들도 인간인데 스테이지에 안 갈 이유는 없으니.”
“아니,사실 저 사람이 대단한 건 플레이 스타일이지 이능 수준이 아 니지 않아? 의외로 군인이나 무슨 프로게이머 같은 걸 수도 있지.”
여기저기에서 진지한 대화가 들린 다. 그런데 거기에서 신경 쓰이는 단어가 들린다.
“지킴이?”
그러고 보니 들어본 명칭이다. 내
재능을 읽어내기 위해 찾아왔던 선 별사 율(律)의 말에서.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은 고고한 마 력과 끝도 없는 지식,그리고 성계 신의 축복을 이용해 두 개의 율법 단체(律法團體)를 만들었지요.”
“맞습니다. 이면과 표면을 구분하 시려는 대마법사님의 뜻을 강제하는 [지킴이].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재능을 감지해 선별해 내는 저희 [선별사]. 이 두 세력은 이면 세계의 다른 세력과도 완전히 구분된 역할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대충 그런 말이었다.
‘하긴 좀 이상하긴 했지.’
이능력자가 천만 명이 넘게 존재하 는 34지구에서 이면 세계의 존재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이가 녀석들이 일성 그룹을 막 대하는 걸 보면 녀석들이 표면 세계에서 영향력을 전혀 행사 하지 못하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적어도 외부로 드러나지 못하게 강 제하는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이 [지킴이]인 모양이다.
‘녀석들이 제법 강하고,내 위쪽 등수에 다수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
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6,000 등인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공략도 좋지만,등수부터 더 을려 야지.’
식사를 마치고 시끌벅적한 경회루 를 빠져나온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 어둑하다. 시간은 9시.
2차 스테이지가 열리기까지 10시 간이 남았다.
'지니. 식량 비축 상황은 어때?’
[고유세계에 들이신 가축들을 일부 도축하고 일부는 축사를 만들어 사 육을 시작했습니다. 닭들도 순조로
이 알을 낳기 시작했고 스마트 팜 구성 역시 완료해 작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팜이라면 식물 공장인가 그거일 텐데. 고유세계에서 식물을 키운단 말이야?’
나라고 하는 [좌표]에 종속된 차원 이라 할 수 있는 고유세계는 행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오직 금속으로 이루어진 사철의 대 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긴 어렵지 않 아도 농사를 짓기는 어려운 환경이 다. 그곳은 어떤 생물도 자라기 어
려운 장소니까.
무엇보다 물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 다. 무생물을 생물체보다 진입시키 기 힘든 고유세계의 특성 때문에 마 실 물조차 한정된다. 고유세계에 다 량의 물을 넣느니 차라리 살아 있는 가축들을 넣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레온하르트 제국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입니다. 가 축들의 혈액도 있고 털과 깃털들도, 대변과 소변도 있으니까요.]
‘똥오줌 말이야? 흠,확실히 그것 들이라면 농사에 도움이 되긴 하겠 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지니가 자신만만
한 태도로 답한다.
[심지어 가축들이 삼킨 음식물들은 별문제 없이 고유세계로 진입되더군 요. 최대한 물을 먹인 뒤 진입시키 는 중입니다. 이상하게 음식물이 아 닌 물건들은 실패하고 있지만요.]
‘뭔가 동물 학대의 느낌이……. 어쨌 든 부탁해. 고기를 좋아하기는 해도 너무 고기만 먹으려니 고역이라서.’
그렇게 말하고 훈련장으로 향한다. 현실과 고유세계를 자유롭게 왕복할 수 있는 육체의 특성을 활용해 한쪽 은 잠을 자고 한쪽은 훈련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
-사망 처리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스테이지가 완벽하게 클리어되었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순위는 5,005위입니다.
레벨 3의 스테이지가 완벽 클리어 된다.
18억 4,855만 1,511명 포기자 중 추가 합격자는 7억 명.
전 지구적인 레벨링의 시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