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허억……!”
내 앞에 앉아 있던 재석이 불현듯 깊은 신음을 토해낸다. 불과 1초 전 만 해도 말끔했었을 녀석의 전신이 피범벅. 그러나 특별한 일도 아니었 기에 호들갑 떨지 않고 묻는다.
“클리어 몇 번?”
재석은 헐떡이는 와중에도 대답한
다.
“허억… 흐아... 37번!”
“시간은?”
“모르겠어. 대략… 40시간? 아니, 잠을 두 번 잤으니 50시간쯤인가. 제길,서서 잤더니 피로가 하나도 안 풀려.”
“제법인데.”
웃으며 녀석의 갑옷을 벗겨준다. 재석이 벌벌 떨면서 시트 한쪽에 있 는 버튼을 눌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기다렸다는 듯 우리가 타고 있던
대형 밴의 문이 열리고 양복의 사내 들이 들어온다. 당연하지만,차는 공 간 확장이 되어 있는 물건이었기에 한편에 준비된 침상에 재석을 눕히 고는 상처 위에 소독약을 뿌리고 그 위에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지속하는 간결 치유!”
백색의 빛이 뿜어져 재석의 상처를 감싼 붕대에 스며든다.
“기원하나니. 여기에 원기의 보옥 을 내리소서.”
머리를 박박 민 양복 사내의 을조 림과 함께 허공에 녹색의 구슬이 만 들어진다. 헐떡이던 재석의 호흡이 점차 가라앉는다.
“후우… 고마워. 다들 바쁜 몸인 데.”
“천만의 말씀입니다,도련님. 저희 야말로 도련님 덕택에 훨씬 좋은 성 적을 거둘 수 있었지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경호원들의 허 리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곤봉이,등 에는 기다란 전투 망치가 걸려 있 다. 재석이 나에게 사들인 스테이지 용 장비들이다.
“다들 별문제는 없지?”
“전원 3까지 레벨을 올렸고 영능 사용에도 익숙해졌습니다. 요번 스 테이지에서는 변경점이 많아 메모해
온 상태고요.”
“그래,그랬지.”
재석이 만든 팀은 전원 일반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는 ‘일반인이 었던’ 능력자들.
그들은 굴지의 대기업인 일성의 경 호원으로 발탁될 정도로 빼어난 지 성과 육신을 갖추고 있지만,안타깝 게도 영적 재능이 부족해 이면 세계 의 능력자들에게는 대항조차 할 수 없던 사람들이다.
인류 전체를 몰살시킬지도 모를 재 앙인 [종말 프로젝트]는 그들에게 있어서 한계를 깨부술 사다리이기도 했다.
“지도 작성은 어떻게 되었지?”
“팀에 모인 정보를 취득하고 이가 의 능력자들에게 모인 정보 역시 교 섭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도는 다 만들었어.”
“그리고,예?”
재석에게 보고하던 사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춘다. 나는 고유세계에서 USB를 꺼내 재석에게 던졌다. 지니가 편집을 마친 영상과 각종 데이터가 담겨 있는 물건이다.
“이게 뭐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재석의 말에 답 했다.
“플레이 영상이랑 지도랑 공략본. 가져다 참고하고… 너 마이튜브 계 정 있지?”
“그야 있지.”
“거기에다 올려.”
“뭔 소리야? 지금 막 스테이지가 끝났는데 지도랑 공략본이 완성되어 있다고? 게다가 그걸 마이튜브에 올 려?”
“일단 그건 체험판 같은 거니까 참 고만 하든가. 다음 시험부터 더 본 격적으로 할 거야.”
“..2,,
혼란에 빠진 재석을 놔두고 차량을
나선다. 차가 서 있던 곳은 정부서 울청사의 주차장이다. 시국이 시국 이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가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기에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다.
“…보통 난리가 아니네.”
주차장을 가로질러 큰길로 나오니 광화문 광장의 모습이 보인다.
시간은 저녁. 7시 5분.
광화문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가를 공격해 왔던 주가군이 그렇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절대로 뒤지 지 않는 규모.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관광
이나 시위 같은 이유로 모인 이들이 아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하하하! 살았어! 살았다고!”
“지연아?! 정신 차려! 괜찮아?”
“도와주세요! 여기 부상자가 있어 요!”
불어오는 바람에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 평소 연인과 가족들이 앉아 볕을 쪼이던 잔디밭에는 기쁨에,또 는 슬픔에 울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하다.
차량이 통제된 도로에는 수십 개의 긴급의료센터가 세워져 있고 그 안
에서 의료인들이,또는 치료 능력을 갖춘 영능력자들이 사람들을 치료하 고 있다.
다행히 스테이지의 특성상 중상자 는 그리 많지 않다. 재석이처럼 무 리하지 않는 이상 가벼운 외상만을 입는 게 보통으로,그 이상의 상처 를 입는 경우는 대부분 죽게 되어 오히려 상처가 없다.
“정말 애매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 데.”
오후 7시.
그리고 오전 7시.
실제로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지금
광경을 보니 어쩌면 꽤 적당한 시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쨌든 일과 시간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의 직장인들은 아침 7시에 스 테이지를 마치고,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오후 7시의 스테이지를 진 행한다고 하더군요.]
“이 와중에 출퇴근하고 있다니… 어른들은 대단하구먼.”
이것이 가장의 책임감인지 뭔지 모 르겠지만 어쨌든 무시무시한 일이 다.
그나마 지금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도 그 무시무시한 사회인들이 있 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는 자정과 정오랬지?”
[네,함장님. 키리티마티섬의 시간 을 기준으로 스테이지가 열리고 있 습니다.]
대한민국은 협정 세계시. 즉 UTC 보다 9시간 빠른 나라다. 국제표준 시의 기준인 영국보다 더 동쪽에 있 어 일찍 하루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테이지는 그런 한국의 시 간보다도 5시간이나 빠르게 시작한 다.
스테이지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태양이 뜨는 장소, 키리티마티섬 (UTC+14:00)을 기준으로 삼기 때
문이다.
“듣도 보도 못한 장소가 전 세계 기준이라니.”
즉 세계는 키리티마티섬의 시간이 자정일 때 1차 시험을,정오의 때 2 차 시험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그 쪽보다 시간이 5시간 느려서 전일 오후 7시에 시작하는 것이고.
‘어쨌든 서두르자. 준비도 하고 레 벨을 올려놔야지.’
물론 스테이지에서 포인트로 경험 치를 살 수 있지만,한정적인 포인 트로 경험치를 사는 것보다는 여유 시간에 마족들을 사냥하는 게 나을 것이다.
“궁으로 가는 거야?”
들려오는 말에 뒤를 돌아본다. 학 교도 안 가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선애의 모습이 보인다.
“시험은 잘 봤어?”
“뭐 적당히.”
대충 대답하는 녀석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녀석의 레벨이 3에서 4로 올라 있다. 아마 종말 프로젝트를 겪으면서 성장했거나 자판기를 이용 해 스스로를 강화한 모양이다.
‘게다가 변신하면 무슨 합성마수인 가 하는 게 될 수 있으니 더 과감 하게 움직일 수 있겠네.’
어쩌면 그녀 역시 내 위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 중 하나일지 모른 다.
“그러고 보니 재석이한테 말했던 가축들 처리를 너한테 맡겼다고 하 던데.”
“아,그거. 이가에 자리를 빌려서 받아놨어. 안내할게.”
선애는 굳이 많은 질문을 하지 않 았다. 무슨 일로 그렇게 많은 가축 을 받은 것이냐? 왜 그렇게 많은 가축을 받으면서 왜 사료는 닭 사료 뿐이냐? 보관은 어떻게 할 것이냐 등등.
종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녀 는 자잘한 일에 흥미와 관심을 잃은 듯 보였다. 그저 돈을 받으니 할 일 을 한다는 태도다.
팟!
건널목을 지나 경복궁으로 들어선 후 바로 이면 세계로 진입한다. 원 래 이런저런 과정이 거쳐야 하지만 황녀,어쩌면 여황이나 다름없는 무 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민경의 명에 의해 언제든 자유롭게 들어설 수 있다.
“여기야.”
국립고궁박물관의 반대쪽. 현실에
서는 주차장에 해당하는 장소로 이 동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 차 는 없고,대신 수십 개의 깃발이 꽂 혀 있다.
어느새 궁녀복으로 환복(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다)한 선애가 그중 한 깃발로 다가가 뽑는다.
팟!
한순간 배경이 변한다. 그곳은 거 대한 초원이었다.
“음머〜”
“꼬끼오--!”
“꾸익!”
소가 운다. 닭이 울고 돼지가 울었
다. 선애가 설명한다.
“소가 50마리,돼지가 300마리,닭 이 700마리야. 참고로 닭은 요청대 로 대부분 암탉이고.”
“어디 보자… 다 들어가려나?”
굳이 망설일 것 없이 녀석들에게 다가간다. 죄다 자리에 묶여 있거나 우리에 들어 있었기에 달아나는 일 따위는 없다.
팟!
소 한 마리가 사라진다. 내 머릿속 에 녀석의 ‘질량’이 느껴진다.
‘대략 600킬로그램… 아니,이 정 도면 거의 700킬로그램이군.’
돼지 한 마리가 사라진다.
‘10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정도 다.’
닭도 한 마리 사라졌다.
‘1킬로그램 정도.’
닭은 호수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는 녀석들은 대체 로 비슷한 크기다.
“좋아. 되겠군.”
계산이 끝났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팟팟팟팟!!
가축들을 터치하며 지나간다. 내
손에 닿은 가축들은 감쪽같이 사라 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없어진 건 아니고 고유세계로 이동된 것이다.
고유세계가 성장하면서 내가 그 안 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질량이 엄청 나게 증가했다. 고작 하루에 수 킬 로그램의 질량을 옮길 수 있을 뿐이 어서 지니의 메탈 바디도 부품 단위 로 옮겨 조립해야 했던 과거와 달 리,지금은 흙이라든가 물같이 가치 와 비해 무거운 물질조차 고유세계 안으로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
“꼬꼭!”
나는 마지막 남은 닭을 애매한 시 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종은 모르겠 지만 뭔가 새하얀 색깔의 닭. 특별 한 닭이어서 본 건 아니다. 그저 마 지막 닭인 녀석이 고유세계로 들어 가지 않았기에 본 것. 다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계산에 실패했나 보다.
‘지니,내가 지금 받아들인 총 무 게가 어떻게 되지?’
[62,954킬로그램. 그러니까 63톤가 량입니다.]
‘C랭크 고유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명체의 질량이 대충 그 정도 라는 말이네.’
그리고 고유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생명체의 질량이 무생물의 스무 배 에서 서른 배 정도 가능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고유세계로 들여보낼 수 있는 무생물의 질량은 대략 2〜3 톤이라는 말이다.
[여전히 아이언 하트를 들여보내기 는 어려운 수준이군요.]
‘그래. 가장 가벼운 아이언 하트도 5톤은 넘으니.’
마치 갑옷처럼 입는 소형 기가스의 아이언 하트의 무게조차도 그 정도 다.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기가스 의 아이언 하트는 수십 수백 톤이 넘으니 고유세계에서 기가스를 조립
하는 건 아주 나중의 일이겠지.
“이건 너 가져.”
“엑?”
품에 닭을 안겨주자 선애의 눈이 동그래진다.
“꼬꼬!”
자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질 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 그란 눈으로 선애를 올려다보는 닭. 관심이 없어 무슨 종인지는 모르겠 지만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녀석이 다.
“에엥?”
“부탁해.”
그렇게 대충 닭을 넘기고 깃발이 만든 차원에서 빠져나온다.
‘지니,도축.’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나는 3레벨 중급 시험에서 버그를 발견했다.
물론 이게 정말 게임인 것은 아니 니 이걸 버그라 말하는 건 웃기는 일이겠지만,적어도 스테이지를 만 들어낸 시스템이 유도하지 않은 맹 점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스킬. [두 번 먹는 입]이다.
두 번 먹는 입의 효과는 ‘식량 취 식 시 2배의 효과. 쉽게 피로해져
잦은 수면이 필요함’이다. 스테이지 를 진행하다가 확률적으로 발견하는 음식을 먹을 때 그 효과가 증가하지 만,대신 자주 자야 해서 플레이 타 임이 늘어나거나 혹은 위기에 빠질 수 있는 페널티를 가진 스킬.
그런데 그 스킬을 장착하고 나자 그 전의 스테이지에서와 다르게 나 는 배고픔에서 거의 완벽하게 해방 되었다.
‘고유세계가 이런 변수를 만들어내 게 될 줄이야.’
고유세계에서 발동한 스킬이 스테 이지에 반영되고 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스탯 제한 역시 스 테이지 안에서만이 아니라 고유세계 에 적용되지 않았던가?
고유세계의 내 육신이 식사하자, 두 번 먹는 입이 가진 ‘1배’의 증가 분이 음식을 먹지 않은 스테이지의 육신에도 적용되었다. 쉽게 말해 고 유세계 안에서 음식을 먹으면 스테 이지의 육신 역시 음식을 먹은 효과 를 가지는 것.
그리고 생체력 수련자인 난 음식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장기전을 이어갈 수 있 다.
“물론 고유세계에 비축할 수 있는
식량이 무한한 건 아니라 한계가 있 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한 메리트다. 이게 일반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영 구 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하지만.
-사망 처리가 모두 취소되었습니 다!
-축하합니다! 스테이지가 완벽하게 클리어되었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순위는 8,891위입니다.
등수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아직은 스피드 런이 트랜드니 뭐.”
투덜거리며 문득 생각한다.
이 위에 있는 수천 명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일까?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