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화
창조신은 세상을 단번에 만들지 않 았다.
그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 고 수없이 실패했다. 많은 [설정]이 만들어지고 버려졌으며 많은 [캐릭 테들이 만들어지고 버려졌다.
지나치게 강해서 너무나 이질적이 어서. 작위적이기 때문에. 세계의 법 칙을 뒤틀기 때문에. 위험해서. 너무
커서. 너무 작아서. 아름다워서. 번 식이 너무나 빨라서. 미완성(未完 成)이기 때문에.
온갖 이유로 버려진 그것들은 이름 조차 지어지지 못한 채 심연(深潤) 이나 혼돈의 영역에 처박혔다.
언네 임 드(Unnamed).
창조신에게조차 규정받지 못한 그 들은 세상 그 어떤 존재들도,심지 어 신들조차도 감히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 유폐되어 그 어떤 방법으로 도 물질계에 나오는 게 불가능한 존 재들이었다. 간혹 그들 중 일부가 외신(外神)과 혼동되어 승배받기도 하였지만,그 어떤 신성과 업을 쌓
아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약 400년 전.
세계를 리셋하려던 대우주의 관리 자,아수라가 격퇴되고 창조신이 대 우주의 관리에서 손을 놔 버림으로 써 그들을 억누르던 창조신의,그리 고 아수라의 제약이 완전히 벗겨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질 계로 뛰쳐나왔으니,그것이 바로 대 우주 전체를 전화(戰火)의 불길에 던져 넣은 대전쟁의 시작.
규정되지 않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언네임드는 각각 [키워드]로 설정되
어 있고 그중 상당수가 별다른 지성 을 가지지 못했다. 미완성의 존재들 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창조신의 [아이디에에 불과한 존재들까지 있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중에는 [종말 프로젝 트]라는 아이디어가 존재했다.
그것은 대우주의 방향성이 창조신 의 뜻과 어긋났을 때를 위한 구상이 었지만 쓸데없이 자극적이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판단으로 폐 기되었던 언네임드였다.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던 [종말 프 로젝트]는 [투쟁]이라 불리는 언네 임드에 의해 물질계로 풀려났으며
언네임드들의 병기로써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멸망한 행성의 숫자만 수 백 수천!
그러나 온 우주를 공포에 떨게 하 며 위세를 떨치던 그것도 결국은 파 괴되고 말았다. 종말 프로젝트의 위 험도를 높게 평가한 마법의 신,염 룡(炎龍) 카인이 강림한 것이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난 지금.
파괴되었던 [종말 프로젝트]가 부 활했다.
-부활이 완료되었습니다. 소요 시 간 311년 8개월 17일 14시간 38분 17초.
-기존 프로젝트가 미실행된 상태 임을 확인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재기동합니다.
-종말 프로젝트.
-콘셉트(Concept). 호러 (Horror).
“기어코 시작이로군. 이러기 전에 일을 끝내고 싶었는데.”
학교 옥상에 앉아 있던 사내,관일 한은 교문 앞에 서 있는 아들의 모 습을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
었다.
“자식 농사가 제일 어렵다더니. 정 말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예전 성계신은 대하에게 깨달음을 얻어 초월지경에 도달한다면 신성을 컨트롤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지금 대하가 관심조차 없던 이능을 수련하고 있는 게 바로 그녀의 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망할 녀석. 지 일 아니라고 아무 말 대잔치를 하다니.”
그러나 사실 대하가 붙잡고 있는 성계신의 말은 그저 대충 내뱉은 아 무 말에 불과하다. 그 말이 거짓이 라는 게 아니라,말 그대로 그냥 말
일 뿐이라는 것이다.
초월지경이라니?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대하가 보통 의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 실이다. 이미 신성을 타고난 그는 초월자들이 인생 전체를 던져 쌓아 야 하는 업(業)을 이미 넘치도록 가 지고 있으니,그는 그저 자신을 단 련해 깨달음을 얻기만 해도 초월지 경에 오를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가진 게 너무 많아.”
편한 길이 있으면 그곳으로 걷고 마는 것이 인간이다.
가진 무기가 있어 휘두르게 되는 것은 비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말 초월지경에 이르길 원한다 면……
그는 삶의 주제(主題)를 정의(定 義)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초월(超越)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념 (意念)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지구 문명 전체를 다 지워 버릴 수 있는 거대 함선이, 대우주에서도 흔치 않은 신화적인 무구,초월병기가 그를 따르고 있다. 아니,사실 그 무엇보다 그의 신성 자체가 문제다. 들끓는 신성의 격이 너무나 높아서 이미 완성(完成)된 것이나 다름없는 대하의 자아로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는 지경에 이 른 것이다.
“사실 시간만 많으면 되는데 그 시 간이 없다니.”
지구 깊숙한 곳. 지각 맨틀 외핵을 지나 내핵 깊숙이 잠들어 있던 대전 쟁 최흉(最凶)의 병기가 가동되었
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파직!
스파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진다. 미립자보다도 작은 균열과 함께 일 정량의 마력이 머나먼 차원을 관통 해 그의 앞에 도달한다.
펑!
극한으로 압축되어 있던 마력이 가 벼운 소음과 함께 주르륵 텍스트를 뱉어낸다.
[종말병기가 작동된 걸 확인했어. 때마침 네가 있는 행성이야.]
[하던 일을 마치고 그리로 갈게.]
[제니카 건도 되도록 빨리 부탁해. 혹시 양자가 각성하지 못했거나 협 조해 주지 않아?]
[PS. 왜 갱신을 하지 않는 거야?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 사정이 있 다면 말해줘.]
[PS. 답장 꼭 부탁해.]
“그래. 결국,오게 되는군.”
일한은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흩 어져 사라지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옮조렸다.
“녀석이 와.”
대우주의 멸망을 막은 위대한 영 웅.
인류의 대표자.
만능의 달인.
수많은 문명과 사람들을 구해 온 정의의 사도.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서도 승리하고 마는 전략의 귀재. 신의 사도. 불세출의 전쟁 영웅. 불 굴의 투사…….
올 마스터 (All master).
온 우주를 누비는 그 위대하고도 위대한 영웅이 이곳 34지구로 올 것이다.
“•••서둘러야 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학교 위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 다.
“홋! 하아… 하옷!”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사무실.
뉴욕시에 있는 한 마천루(摩天樓) 의 최고층.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 려다보이는 그곳에서 질척이는 신음 이 흘러 다닌다.
쭉쭉 뻗은 팔다리에 풍만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가진 여인은 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에 엎 어진 채로 거짓 섞인 교성을 내지르 고 있다. 그녀의 뒤에서 비싼 양복 을 풀어 헤친 채 그녀를 탐하고 있 는 것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진 백인 사내다.
“조반니 브라운.”
“누,누구냐!”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란 사내가 자신의 앞에 엎어져 있던 여인을 밀 어버리며 몸을 돌린다. 그의 앞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20대 초반 의 사내가 서 있었다.
선천적으로 신성을 타고나 자신의 의지로 그 신성을 받아들인 자.
후안이 다.
“거짓말쟁이.”
“뭐냐! 누구냐! 여긴 어떻게 들어 왔지?”
조반니 브라운은 성공한 변호사이 다.
미남이라고 부르기 어렵지만 친숙 하게 둥글둥글한 몸매와 그 몸매에 잘 어울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외모 를 가진 그는 뛰어난 지능과 말이 안 되는 궤변조차도 그럴듯하게 들 리게 만드는 달변의 소유자이다.
그는 여태껏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수없이 많은 극악 범죄자들을 성공 적으로 변호해 냈다. 그 놀라운 성 과의 결과로 무지막지한 액수의 달 러를 챙긴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흐 름이었고 말이다.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
그것이 그가 얻은 별명이다.
••너는 거짓으로 수많은 이들에게 절망을 주었지.”
그리고 그런 그야말로,후안에는 더없이 합당한 제물이다.
“미친놈이로군!”
탕!
어느새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찾아 꺼낸 조반니가 방아쇠를 당겼다. 평 소라면 이렇게까지 경솔하게 행동하 지 않았겠지만,후안에게서 흐르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그의 이성을 잃 게 했다.
“뭐? 뭐,뭐야??”
당연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조반니는 허공에 더 있는 총알을 보며 신음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 화란 말인가?
그러나 후안은 그의 리액션에 아무 런 관심도 없다.
뿌득!
후안은 자신의 입안에 손을 넣어 어금니 중 하나를 그대로 뽑아버렸 다. 실로 살벌한 모습이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다.
웅!
뽑힌 이빨이 눈부신 빛과 함께 새 로운 형태로 변했다. 백색으로 작열 하는 그것은 검의 형상을 하고 있 다.
“이것은 진실의 검이니,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거짓을 베어 없앨 것이 다.”
“너,아니,당신 뭡니까? 왜 갑자 기 나타나서……
푹!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빛의 검을 조반니의 가슴에 박는다. 입을 떡 벌릴 뿐 경악성조차 토하지 못하는 조반니.
이어 빛의 검이 손잡이까지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번쩍!
빛으로 변한 조반니의 육신이 승화 (昇華)하기 시작한다. 등이 터져 나 가며 인간의 것이 아닌 새로운 기관 이 만들어지고 그 외모도,신장도 모조리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끝에.
-나는 진실의 수호자요,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거짓을 베어 없앨 자이 니.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천 사가 이글이글 불타는 검을 들고 선 언한다.
-나의 이름은 [진실]이다.
만일 지금 이 광경을 대우주의 누 군가가 보았다면 설사 그가 신위를 가진 존재라 해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진실]에게 깃든 초월의 힘.
그것이 중급 초월자,[황제] 클래 스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니까.
심지어 대상은 그 하나뿐이 아니 다.
후안은 아프리카의 한 독재자를 찾 아냈다. 그는 불의(不義)한 자. 그는 그에게 차갑게 얼어붙은 저울을 박 아 넣었다.
-나는 정의의 수호자요,세상에 존 재하는 모든 불의를 판단할 자이니.
안대로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든 아 름다운 여인이 선언한다.
-나의 이름은 [정의]로다.
후안은 미국의 한 여기자를 찾아냈 다. 거대한 테러 현장에 끼어들어 피해자인 척 스스로를 꾸며 일약 스
타가 되었던 이. 그러나 시간이 지 나 그 모든 것이 사기였다는 게 밝 혀져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던 불
명예(不名春)한 자.
후안은 그에게 거대한 비석을 박아 넣었다.
-나는 명예의 수호자요,세상 모두 가 우러를 이름을 기록하는 자이니.
까맣게 빛나는 거대한 석판을 든 노인이 선언한다.
-나의 이름은 [명예]이니라.
황제 클래스는커녕 초월자 하나 없 던 지구에 중급 초월자가 셋이나 탄 생한다. 그들은 온갖 사명을 덕지덕 지 붙여 만들어낸 도구로서의 신.
후안은 그들을 이용해 인류를 교정 하고 훈육하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를 좀 더 나은 영역으로 나아가 게 할지도 모를 행위이다. 이 세 신 은 틀림없이 인간을 더욱더 진실하 게 하고,정의롭게 하며,명예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강제(强制) 에 불과하다. 강제된 진실. 강제된 정의. 강제된 명예.
인간은 어떻게든 거짓을 꾸며낼 방 법을 찾을 것이며,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 정의롭지 않을 짓을 벌일 것 이다. 명예라는 단어를 곡해하고 명 예로 인한 이득을 공유하려 할 것이
다.
그리고.
신(神)은 실망했을 것이다.
인간의 습성을 이해하고 규칙을 조 정하는 대신 더욱 가혹한 규칙을 들 이밀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인정하기보 다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자 폭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부활이 완료되었습니다. 소요 시 간 311년 8개월 17일 14시간 38분 17초.
-기존 프로젝트가 미실행된 상태 임을 확인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재기동합니다.
-종말 프로젝트.
-콘셉트(Concept). 호러 (Horror).
…종말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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