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화
내가 [나]의 안에서 경악하고 있다 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레스는 어 이 없어한다.
[아니,깬 건지 안 깬 건지 모르겠 군. 왜 왔다 갔다 해? 학살을 벌일 까 걱정했는데 그거 이상으로 상황 이 이상한데?]
'아,맞아. 학살.”
어느새 지니가 가져다준 음료를 마 시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인간들을 죽이지 마라. 그……
“관대하.”
“그래,관대하. 인간들을 죽이지 말 아다오.”
‘뭐지,이놈은?’
빙빙 돌리는 것 없이 직설적인 부 탁에 나는 문을 닫는 것도 잊고 혼 란에 빠졌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해 할 수 없는 존재다. 언터쳐를씩이나 되는 존재가 저런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이곳에 방문한 것도 그렇지만, 와서 하는 부탁이 인간을 죽이지 말
라는 것이라니?
나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이 성계신이 와서 [나]를 진 정시켰을 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하지만 꼴 보기 싫은걸. 눈에 거슬려. 치우고 싶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 고 그들이 무가치하게 학살당해야 할 존재는 아니야.”
인류애가 넘치는 발언이었지만 정 작 그 발언을 하는 사내의 얼굴에는
조금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남의 말을 전하는 것처럼. 책 에 쓰인 글귀를 읽는 것처럼 무덤덤 한 목소리.
그러나 그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나]는 인상을 찡그릴 뿐이 다.
“인간은 벌레야.”
“아니. 나는 인류야말로 희망을 품 을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다. 너무나 태연해 사실은 인류의 존립 에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일 지경.
“아오……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이 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분위 기.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금세 태도를 회복해 묻는다.
“그런데 내가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직 아 무것도 한 게 없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인류 문명을 박살 낼 정도로 거대한 [흐름]이 느껴졌기에 찾아왔을 뿐이 야.”
‘흐름? 단순한 예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괴상한 형태인데.’
게다가 문을 연,그러니까 신성을 각성한 [나]는 운명의 흐름을 초월 한 존재다. 행위의 결과물인 인류의 멸망을 예지하는 거야 충분히 가능 하겠지만 그 원인을 단박에 인식하 고 찾아올 수 있다니.
하지만 역시나 [나]는 그런 것들에 그 어떤 위기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관심 사항이 아 니다.
“역시 이해가 안 돼. 왜 인간에 그 렇게 신경을 써?”
“다시 말하지만,나는 인류가 희망 을 품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저 약간의 문제로 엇나가고 있을
뿐이지.”
“약간의 문제?”
“그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을 이끌어주고 훈육(訓W)해 줄 절대자가 없다는 문제.”
“흠•…"
[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싫은데.”
“끝까지 어쩔 수 없다면.”
사내가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고 [나]를 응시한다.
“나는 막을 수밖에 없다.”
“•••칫.”
[나]는 투정을 부리듯 입을 삐쭉거 렸다.
끔찍한 광경이다.
‘아니,이거 태도가 왜 이래? 왜 애처럼 굴지? 퇴행(退行)이라도 하 나?’
제국에 있을 때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 의 변화다. 전지의 권능을 잃어버렸 기 때문일까? 성계신한테 고백했던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 다.
“좋아. 알았어.”
“고맙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팟!
사라진다. 이제 이곳에 그의 흔적 은 없다.
“아,뭐야! 제 할 말만 하고!”
남은 [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을 보며 다시 문을 이미지했다. 마 음속에 커다란 철문이 그려지고.
철컥!
그것을 단박에 닫아버린다.
까닥.
새끼손가락을 움직인다. 손가락 한 마디를 굽혔다가 이내 검지,중지, 약지 순으로 진행해 마침내 주먹을 쥐었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육체의 통제가 완전 히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육체의 제어권을 되찾는 건 처음이라 상당 히 낯선 감각.
[대하?]
[함장님?]
두 관제 인격이 나를 부른다. 육성 이 아님에도 그들의 감정이 느껴진
다. 당혹스러움과 걱정,그리고 불안 까지.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 는 대신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인 간도 신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 있는 상태에 관해 설명할 기분이 아니다.
분노하느라,또 그런 상황을 수습 하느라 내팽개쳤던 내 감정부터 추 스르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만 같 다.
“나중에.”
[•••고유세계로 가 있지.]
[필요하실 때 불러주십시오. 함장 님.]
함교가 침묵에 잠든다. 나는 천천 히 걸어 함교의 한쪽에 있는 스크린 으로 다가갔다. 가볍게 의식을 집중 하는 것만으로 스크린에 지구의 모 습이 떠오른다.
끼릭!
한 칸밖에 남지 않은 커터 날을 뽑아내 허공에 휘휘 저어본다.
“나는… 그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쁜 아이……• 난 나빠.”
세상 모든 비극과 슬픔을 다 짊어
진 것 같았던 꼬마의 모습이 떠오른 다. 사실 뭐 그때는 나도 꼬마였지 만,그런 내 눈으로 봐도 너무나 작 고 왜소해 보이던 소년.
“맛,있어.”
“으,으응,재미있다.”
“고마워.”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맨살에 와닿는다. 그 러고 보니 상의가 다 찢어졌는데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끼릭끼릭. 끼릭.
칼날 밀대를 밀었다 당겼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을 만들어내며 그저 멍하니 있는다. 불같이 분노하고 학 살을 벌이고도 마음속에는 공허함만 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부탁해.”
몸을 응크려 무릎에 머리를 묻는 다.
끼릭끼릭.
지구 밖 거대 전함의 함교 안.
무의미하고 허무한 쇳소리만이 나 직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전함이 대기권을 벗어나 위 성 궤도로 올라선다. 지구상에 존재 하는 그 어떤 관측 장비에도 탐지되 지 않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테라급 전함. 알바트로스.
과거 만 단위의 승무원까지 탑승시 켜 대우주를 탐험하는 탐사대로,연 구 도시로,무장 전함으로 활약하던 알바트로스함은 이제는 단 하나의 고귀한 존재만을 위해 기동하고 있 다.
그는 레온하르트 제국이 간절히 바 라왔던 [두 번째 황제].
비록 그 스스로가 그 영광된 자리 를 박차고 나왔지만,그렇다 하더라 도 그 상징성은 감히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제국 클래스의 세력에게도 절대 낮지 않은 가치를 지닌 테라급 함선이 개인에게 증여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닭 잡는 소 칼이 되 어서 낭비되고 있지만 알바트로스는 4문명의 정점에 달한 초과학의 결과 물이자 궁극 마법이 덕지덕지 발려 있는 마도 문명의 총아인 초월병기 인 것이다.
“진짜 진정되었네. 이걸 운이 좋다 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알바트로스함에 침입자 가 있었다. 불과 수십 분 전에도 정 체 모를 사내가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치욕적이 기까지 한 일.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알바 트로스함에 침입한 것은 중학생 정 도의 외모로 보이는 작달막한 신장 의 소녀.
34지구의 관리자이자 창조신의 위 계를 가진 성계신이었으니까.
“당장 멸망은 아니어도 1억 이상의
희생자가 생길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울고 있는 대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하와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 였지만,그 누구도, 심지어 모든 환 영에 면역이었던 대하조차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하의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포토샵으 로 그녀라는 존재를 이 장소에 가져 다 붙인 듯 이질적이다.
“완전히 예측 불허의 상황이 되어 버렸어.”
운명의 틀을 벗어난 존재를 예지하 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예지 자체 도 어려울뿐더러 수많은 대가를 치
르고 행한 예지가 틀려 버리는 경우 가 부지기수니까.
그러나 꼭 예지 능력이 있어야만 미래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오 랜 시간을 살아온 성계신은 [애송이 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관대하는 결국 신성에 잡아먹힐 것 이다.
인간들은 결국 그를 도발하고 자극 할 것이며.
그리하여 인류는 멸망. 그게 아니 더라도 멸망에 준하는 상황에 부닥 치고 말 것이다.
신성을 추출해 외부에 봉인한다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유예시켰 다지만 결국 한계는 올 수밖에 없 다. 그가 이어받은 것은 [인간에게 실망]하고 [인간만을 위한 신]에게 반기를 든 존재의 신성이었기 때문 이다.
그야말로 불을 보듯 뻔한 미래.
후안은 또 어떤가?
관대하가 결국 신성에 잡아먹힐 예 정이라면 그는 이미 잡아먹혔다.
그는 무의미한 망집(妄執)에 빠졌 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기에 관념 에 사로잡혔으며,초월한 존재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인간에 집착하고 있다.
심지어,그래도 정통 신이었던 디 카르마의 신성을 이은 대하와 다르 게 그는 이름 지어지지 못한 존재. 언네임드의 신성을 이은 자.
그는 인류 문명을 제멋대로 주무를 것이다. 스스로는 인간을 선(善)으 로 이끈다고 생각하겠지만 제멋대로 휘두르다 제멋대로 실망하고 결국 모든 걸 파멸로 몰아가겠지.
“게다가 진짜 재앙까지.”
저 둘조차도 인간에게는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이건만.
심지어 그 둘은 대마법사,제논 호 키프리오스 (Zenon ho Kyprios) 가 예지한 [멸망의 예언]과 무관한 존 재이다.
멸망의 씨앗은 지구 깊은 곳에서 거대한 악의를 가지고 발아하고 있 다.
“하하! 진짜 개판이다. 하하하하!”
기가 막힌다는 듯 성계신이 깔깔대 며 웃었다. 어쩌다 자신이 관리하는 문명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죄다 후드려 패고 봉인시켜 버리고 싶을 정도지만,사명(使命)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 보
면 허망한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뭐.”
그녀는 문득 웃음을 멈추고 무릎에 얼굴을 박은 채 울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리고 어린 소년.
그녀가 사랑하는 사내의 양자.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는 대하의 앞에 쭈그려 앉았 다.
“오히려 이런 개판이라 멸망을 막 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지구에 대하 혼자 있었다면,결국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결국,대하
는 인간을 향한 혐오를 견디지 못하 고 구제(驅除)를 시작했을 테니까.
지구에 후안 혼자 있었다면,역시 나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후안은 멋대로 인류에게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하고,멋대로 징벌을 내렸을 테 니까.
지구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래도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대전쟁 때 지구의 내핵에 스며들었 던 거대한 혼돈(混池)이 마침내 발 아해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고 모든 영혼을 집어삼켰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멸망과 멸망,그리고 멸망이 한자 리에 모였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상급 신으로서 거대한 권 능을 가지고 있는 그녀도,지구에서 오랫동안 계획을 준비하고 있는 인 중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휴,우리 꼬맹이들.”
혀를 차며 일어난다. 여전히 머리 를 박고 있는 대하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앞에서 떠 들었다 한들,그 말이 전해지길 원 치 않았기에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많이 시달리겠구먼.”
범인(凡人)이 새로운 세상을 만난 다면 그는 그 세상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영웅(英雄)이 새로운 세상을 만난 다면 그는 그 세상을 변혁시키고 이 끌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 신이라면.
그렇다면…….
“세상이,그들에게 적응해야 하겠 지.”
쓰게 웃은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이어 그 모습이 허깨비처럼 사라지
고,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은 함교에 는 무릎에 머리를 묻은 대하 혼자만 이 남아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