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Chapter 9. 멸망 VS 멸망 VS 멸망
쿵.
전투라 부르기도 참혹한 학살이 끝 나고 광화문 앞에 내려선다.
‘나름 조심하긴 했지만,아직도 출 입 제한이 유지되고 있다니. 하급 초월자치고는 제법이야.’
이제는 완전히 박살 나 흔적도 찾
기 어려운 광화문의 터를 가로지른 다.
그곳에는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춰 나를 기다리고 있 다. 그들은 반듯이 서서 정면을 바 라보려 했던 모양이지만,그건 그저 그들의 바람일 뿐. 얼굴은 백지장처 럼 희고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 다.
이가의 남은 능력자 중 손에 꼽을 정도의 힘과 경지를 가진 그들이지 만 단지 서 있는 것조차 힘든 듯 불어오는 바람에 휘청거린다.
“흐 ”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다시 고민했다.
‘죽일까?’
원래대로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 이다. 원래 나는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몰살시킬 수 있 었으니까. 나는 그냥 그들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나한테 해 를 끼칠 것 같아서,필요에 의해서, 그것조차 아니면 그냥 다 그들을 몰 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살인이 꺼려져서 는 아니다.
우르르!
뭔가 무너지고 쏟아져 구르는 소리 가 들린다. 도시의 하수도를 통해 핏물이 콸괄 흐르고 있다.
주가군은 전멸했다.
현대전에서 흔히 말하는 전멸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주가는 피해는 고작 20〜30%의 그런 안이한 전력 손실이 아니다.
15만의 이능력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몰살(沒殺) 했다.
평상시 고요하던 광화문 광장은 15만 구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체로 발 디딜 곳조차 없다.
기 잉.
아레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머리를 열었다. 나는 녀석의 손 위로 올라갔다. 녀석은 나를 이가의 무리들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들을 바라 보았다.
나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움을 준 적 없다.”
모처럼 입을 연 황녀의 말을 잘라 낸다. 별로 녀석들과 대화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 면 내가 굳이 왜 아레스에서 내려서 그들의 앞에 내려왔는씨도 모르겠 다.
왜지? 웰까? 무엇이 내 마음에 걸 리는 것일까.
나는 이가의 능력자들을 바라보았 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공포와 재 앙을 마주한 것 같은 두려움이 보인 다.
그러나 오직 한 명.
가장 앞에 서 있는 황녀,민경만은 달랐다.
그녀는 오연히 서 있었지만,나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절규하고 있다. 슬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자신 을 수습해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다.
“아.”
그리고 그제야 나는 내가 왜 여기 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끝까지 제멋대로라 미안해,대하
야. 그래도.”
“그녀를 부탁해.”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형과 애틋한 시선을 나누었던 눈이다.
‘그렇군.’
나는 깨달았다.
신성을 타고난 인간 이상의 존재라 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관계에 묶여 있는 인 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
그 순간 [나]와 완전히 동화되었던
나의 의식이 깨어난다. 그리고 그러 자 자연스레 [나]는 지금까지와 다 른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그 사실을 [내]가 전 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그랬기에.
“너, 형의 연인이었지.”
학살의 와중에도 고민하던 나와 달 리 오만함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로 녀석은 말했다.
“수절 (守節)하라.”
“..r
난데없는 말에 민경이 눈을 부릅떴 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평생 인간 관영민을 그리 며 살아라.”
“..I"
지금껏 최대한 자신을 통제하던 민 경조차 이 순간 온몸을 파르르 떤 다. 그셔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어떻게!”
혹,하고 강렬한 열기가 뿜어진다. 그녀가 흥분하며 그녀의 초능력이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난,나는……!”
“거절인가?”
처절할 정도의 애틋함에도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나는 어 이가 없어서 내심 중얼거렸다.
‘미친놈아. 어떻게 거기에서 거절 이냐는 질문을 할 수가 있냐?’
신경 줄이 너무 굵어서 둔기로 써 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형에 대한 생각이라도 해주 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피식하고 웃는다.
“굳이 인류를 멸망시킬 필요는 없 겠지.”
!”
순간 민경이 온몸을 떨었다. 그녀 뿐이 아니라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 울이고 있던 천 명이 넘는 이가의 이능력자들도 격렬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그중 몇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뭐,뭐라고?”
“아니,이건 설마……
술렁인다. 하얗던 얼굴들이 숫제 퍼렇게 변한다. 그들 중 하나가 믿 을 수 없다는 듯 신음했다.
“멸망의 예언……
“뭐?”
“아,아냐!”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건 나에게 익숙한 이다. 민경의 동생이자 나의 클래스메이트. 경은.
그러나 나는 그녀를 한번 일별하였 을 뿐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지니.”
[대단위 리콜. 수행합니다.]
빛이 번쩍이고 알바트로스함의 함 교로 이동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 격했던 기가스들과 전투기들 모두 알바트로스함으로 귀환한 상태.
나는 함교에 서서 멀어져 가는 경 복궁의 모습을 보았다. 긴박한 상황
에 대기권까지 내려왔던 알바트로스 함이 부상하고 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느꼈다. 그것 의 마음은 복잡하다.
녀석은 슬퍼하고 있다. 시원해하고 있다. 짜증 내고 있다. 따분해하고 있다. 외로워하고 있다.
“그래.”
고요한 함교에서 녀석이 결심했다 는 듯 손뻑 친다.
“맞아.”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시원하기까 지 한 표정으로 녀석이 말했다.
“멸종시키자.”
‘아,진짜. 미친놈인가?’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올라온다. 조금 전에 멸망시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그새 왜 마음이 변해서 이딴 소리란 말인가? 이건 어린아이라 변 덕이 죽 끓는 것 같다는 그런 개념 을 넘어선다. 그냥 눈에 거슬리는 방해물을 치우는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진다.
혐오.
경멸.
생각해 보면 녀석에게는 그런 성향 이 원래부터 있었다. 그저 벌레처럼 여긴다기에는 과할 정도의 혐오감이
느껴진다.
‘이건 뭔가 달라. 이걸 정말 또 다 른 [나]라고 할 수 있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 토록 인간을 경멸했던가? 내가 인간 에 대해 이렇게나 뿌리 깊은 혐오감 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 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인간성 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 르지. 하지만 이렇게 거슬리기만 하 면 멸망시키고 싶어질 정도라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로 조 금 전 완전히 동화되어 있을 때는 형과 마음을 나누었던 민경의 모습
에 많은 감정을 느꼈었는데,동화가 풀리는 순간 그 모든 감정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죽여 치워야 할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만이 남 는다. 예전에도 이런 기미가 좀 있 던 건 사실이지만,어째서인지 지구 에 내려온 후 점점 더 강해지고 있 다.
“지니! 핵탄두가 몇 개나 있지?”
[영자력 주입이 완료된 핵탄두라면 준비된 물량이 없습니다만,작업용 핵탄두라면 1만 3,000발 이상 적재 되어 있습니다.]
아이언 하트의 등장 이후 대우주의 병기사는 완전히 새로 쓰였다. 최전
선에서 활용되던 첨단무기들이 순식 간에 시대에 뒤처진 고물이 되거나, 아니면 군용,혹은 전투용이라는 단 어를 머리에서 떼어야만 했던 것.
상황은 핵무기도 마찬가지여서 이 제 제국 클래스 이상의 세력에서는 핵무기를 병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직격하지 않는다면 기급 아이언 하 트를 장착한 전투기들조차 핵폭발에 파괴되지 않으니 더는 무기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
그러나 핵탄두는 여전히 작업용으 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고.
3문명에 들어서지 못한 지구는 그 [작업용]만으로도 멸망시키기 충분
한 상대다.
‘망할 놈이 슬퍼할 틈을 안 주는구 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자 자연스럽게,내 옆에 철로 만들어진 문의 형상이 나타난다. 문은 활짝 열려 있는 상황.
완전히 정신을 놔버리고 [나]와 동 화되었었지만,녀석이 주가의 인간 들을 학살하면서,또 형의 연인이었 던 민경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서 자 연스럽게 동화가 풀렸다.
즉,지금 나의 상태는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문을 닫은 상태의 나.
문을 연 상태의 나.
그리고 문을 없애 버리고 [동화] 상태에 들어간 나.
특이하게도 문을 연 나,그러니까 신성화(神聖化) 상태의 나는 동화 상태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것 같 다. 동화 상태와 아닐 때의 사고방 식이 전혀 다름에도,어쩐 일인지 조금의 이상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어려울 것 은 없다. 아니,오히려 내가 뭘 해 야 하는지 명확하게 감이 잡히는 느 낌이다. 이대로 문을 닫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신성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건 안 돼.”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비상! 비 상 상황! 관제 인격의 권한으로 제1 급 비상 상황을 선포합니다! 방위 시스템 완전 가동! 긴급 폐쇄 시작! 강제 추방을 시도합니다!]
위이잉——!
철컹! 철컥!
벼락같은 경고음과 함께 함교의 모 든 장비가 바닥으로 들어가고 몇 겹
이나 되는 문들이 폐쇄되기 시작한 다. 한순간에 행해진 신속한 대처. 그리고 이어지는 리콜 시도가 있었 지만.
“나도 보고 있으니 호들갑 떨지 말 고 마실 거나 좀 가져다줘.”
[나]는 손을 한번 떨쳐내는 것만으 로 그것들을 간단히 무산시켰다.
[•••함장님?]
“어서.”
[•••긴급 절차를 정지합니다.]
지니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모습을 드러낸 티 테이블에 가 앉는 다. 침입자는 별다른 말 없이 따라
와 마주 앉았다.
“안녕.”
“안녕……. 음,이건 우주선인가?”
그는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들을 대충 걸친 20대 초반의 사내였다. 동양인은 아니고 백인과 아랍계의 혼혈로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
첫인상만 보면 형편이 별로 안 좋 은 외국인 노동자 같은데 뜻밖에도 그를 본 [나]는 반색하며 활짝 웃었 다.
“응응! 근사하지? 대우주에서 흔치 않은 테라급 전합이야!”
“그럼 저 이상한 남자는?”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것은 어느 새 인간형으로 자신의 모습을 구현 한 아레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 음 지었다.
‘저게 보인다고?’
아레스의 인간형은 정말로 무슨 영 체 같은,실존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녀석의 [시 점] 자체를 상징화한 것에 불과하므 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레 스가 데이터를 직접 쏴주고 있는 마 도안경 우자트뿐이어야 한다.
“아! 내 친구 아레스야. 이런 거
처음 보지? 초월병기 중에서도 순위 권에 드는 넘버링이지! 신의 위상 (位相)을 가진 강철의 거인!”
웬일인지 [나]는 굉장히 들떠 있는 상태다. 자랑이라도 하는 그의 말투 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 다.
“확실히… 처음 본다. 세상에는 이 런 것도 있었군.”
[대하,저건 뭐냐?]
영문 모를 상황에 아레스가 황당해 한다.
“뭐냐니! 그야 당연히.”
거기까지 말한 [나]는 멈칫하더니
사내를 돌아본다.
“이름이 뭐야?”
“후안이다. 후안 언네임드 니에또.”
“후안이래.”
고스란히 따라 하는 성의 없는 대 답에 상관없이 나는 녀석의 머리 위 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에게 자 기소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 제였으니까.
[34 지귀
[??신 후안]
그런데 내 눈에 표시된 칭호는 너 무나 이상한 종류였다.
‘물음표?’
처음 접하는 케이스에 의문을 표할 때 사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친 다.
그리고 칭호가 변했다.
[이상한 눈이군.]
[보지 마라.]
*..!’
머릿속으로 번개가 친다. 처음 접
하는 케이스였던 물음표와 다르게 이건 한번 겪어본 적이 있는 상황이 다. 대우주에서 만났던 언터쳐블. 하 와가 스스로의 타이틀에 간섭한 적 이 있었던 것.
‘아니,설마.’
자연히 이어지는 결론에 어이가 없 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지구에 성계신 말고 다른 언터쳐 블이 있다고?’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