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화
한순간.
전쟁이 멈추었다.
적을 죽이려던 자들,이만 자리를 피하려 하던 자들,작전을 짜고 이 견을 조율하던 자들,상황을 지켜보 던 자들과 그저 혼란스러워하던 자 들까지 누가 강제로 고개를 꺾어버 리기라도 한 듯 한 장소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있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람이 있다 면,예를 들어 3미터가 넘는 신장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시 한가운데 수많은 인파 사이에 서 있다 하더라 도 단박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게 될 것이다. 그가 뭐 하는 사람인 지 알지 못해도,그의 이름은 무엇 인지,그의 성격과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상관없다. 그저 그 덩 치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연스럽 게 그를 주시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신장이 3미터가 아니라 면 어떨까?
10미터라면?
20미터라면?
만약,만약에. 100미터,200미터라 면?
설사 그가 그냥 서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사람들은 그 엄청난 덩치 의 거인(巨人)에게서 눈을 뗄 수 없 을 것이다.
“뭐야. 방금 뭐였지?”
“목소리? 지금 말을 한 건가?”
시선이 집중된다. 치열하다면 치열 한 전쟁터였음에도,그들은 나에게 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냐하면,내가 너무나 크기 때문 이다.
왜냐하면,그들이 너무나 작기 때 문이다.
쩡!
순간 망치로 철판을 내려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어느새 내 앞 에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벽이 만들 어져 있었고,그 벽 한가운데에는 선명한 주먹 자국이 새겨 있다.
“흡!”
기습을 날렸던 인간,권황은 공격 이 실패했음에도 마치 그럴 줄 알았 다는 듯 벽을 선회해 돌진했다. 그 의 발은 바닥을 단 한 번 디뎠을 뿐이지만,수십 미터의 거리는 단박
에 1미터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쏘아진 권격!
쩡!
그러나 또다시 그의 정면에 가로세 로 2미터쯤 되는 금속 벽이 생겨나 그의 권격을 막아버린다.
“저,저게 뭐야?!”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비들이 ..r
내 주변에 일어선 금속 벽들의 정 체는 전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던 온갖 무기들과 갑옷들이었다. 정확 히는 그것 중에서도 금속으로 만들 어져 있는 부위의 집합. 마치 액체
처럼 녹아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 린 장비들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권 황의 앞을 막아섰다.
“이깟 벽!”
이를 악물고 있는 권황의 온몸에 웅혼한 기공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다. 그는 돌바닥에 깊이 자국이 남 을 정도의 진각을 밟았고,온몸에 휘돌던 기는 이내 무지막지한 경력 이 되어 금속 벽을 후려쳤다.
웅!
그러나 이번에는 나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그대로 손을 뻗어 금속 벽 위에 손바닥을 올린 것이다.
퍽.
그리고 그 결과,금속 벽에서는 아 까와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망치 로 철판이 아니라 찰흙 덩어리를 때 린 것 같은 소리. 그 어떤 반작용 없이 사라진 경력에 당황한 권황이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인다.
나는 여전히 금속 벽에 손을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녹색의 힘이군. 외부에 너지를 진동에너지로 변환하는.”
두 눈을 감는다. 육체 안에 있는 특수한 생체 기관이 박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양
팔에,양다리에,그리고 두 폐 사이 에 자리하고 있다.
웅-!
진동이 느껴진다. 어느새 금속의 벽에,그리고 무엇보다 내 몸 전체 에 녹색의 파동이 퍼져 나가고 있 다. 광학적 현상이 아니었기에 카메 라로 찍으면 찍히지 않겠지만,생명 을 가진 존재라면 어린아이라도 볼 수 있는 싱그러운 녹색.
나는 의식을 집중해 생체 기관들에 새로운 신호를 보냈다. 그것 역시 진동이었지만 아까의 진동과는 성질 이 다르다.
그것은 진동을 축적하는 적색.
녹색으로 빛나던 몸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육체 안에 존재하는 생체 기관에 한차례 빨려들어 갔다가 다 시 온몸을 휘돌아 오른팔로 빠져나 간다.
녹색으로 빛나던 벽이 일순간 새빨 갛게 물들었다. 권황이 깜짝 놀라 금속 벽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늦 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금속 벽 이 그의 주먹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웅!
진동이 퍼져 나간다. 권황이 뿜어 낸 경력은 진동이 되었고,그 진동
은 초월의 경지를 넘어선 거대한 영 력에 의해 무지막지한 규모로 증폭 된다.
새빨갛게 변했던 빛이,또다시 변 했다.
“경천칠색(篇天七色). 주황(朱黃).”
쾅!
귀 옆에 대고 대포를 쏜다면 이러 할까. 그 엄청난 폭음에 모두가 비 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저 울 려 퍼지는 것만으로 지진이 일어나 고 건물이 쓰러지는 엄청난 진동.
“궈,권황님!!!”
주변에 있던 주가 무사 하나가 비
명을 질렀다.
“파,팔이!!”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금속 벽 을 후려쳤던 권황의 오른팔은 세상 에 없다. 강대한 진동의 힘이 그의 오른팔을 어깨 바로 아래까지 박살 내버렸다.
“감히!!! 네 이놈!!”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주가에 충성하는 무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쇄도해 들어왔다. 기다란 장검 을 든 검사가 벼락처럼 검을 내리꽂 았다.
그러나 검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 했다. 바닥에서 솟구친 창 한 자루 가 그의 턱을 꿰뚫고 올라가 뇌를 박살 냈다.
“죽어라!”
꿰뚫려 매달리는 시체 아래로 쑥 하고 그림자가 튀어나온다. 착시가 아니라 정말로 그림자 안에 들어갔 다가 튀어나왔다. 자신의 육신조차 초월할 정도로 속성을 깊이 깨달은 이로는 보이지 않으니 특수한 초능 력을 가지고 태어난 돌연변이라는 뜻.
녀석은 그림자에서 완전히 튀어나 와 튕기듯 솟구쳤다. 검을 내뻗으며
온몸을 내던지는 기세는 제법 결연 하다. 방어도 반격도 염두에 두지 않는 그 일격은 스스로의 목숨을 초 개와 같이 던지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결연한 결심을 가진 것은 그뿐. 그의 손에 들린 병기에는 그 와 같은 결연함이 없다.
출렁.
내 영역(領域)에 들어서는 순간 수 십,수백 번 이상 담금질되었던 소 검이 액체로 변해 버린다. 강대한 금속의 속성력이 한 줌의 열기 없이 도 금속을 분자구조부터 뒤틀어 버 리는 것이다.
“뭐,뭣?!”
믿을 수 없다는 경악성이 그의 마 지막 유언. 그는 송곳으로 변해 버 린 자신의 검에 목을 꿰뚫려 바닥을 굴렀다.
“아,내 팔.”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곤 죽이 되어버린 오른팔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지닌 강대한 영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육신이 한순간 뿜어진 진동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된 것. 이미 경천칠색의 식(式) 대로 진화하기 시작한 육신이었지만 그래 봐야 한계는 명확하다.
철컥.
그러나 그저 짜증 날 뿐 그리 심 각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쉐도우 스토커를 꺼내 팔에 겨 눈다.
탕!
쏘아진 탄환. 회귀탄(回歸彈)이 팔 에 명중한다. 한정된 영역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고 곤죽이 되었던 팔 은 멀쩡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그리 고 그 순간.
퍽!
이번에는 강렬한 충격이 이마를 때 려 머리가 확 뒤로 젖혀진다. 젖혀
진 머리에 박혀 있는 것은 온갖 술 식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철갑탄. 당연히 쉐도우 스토커의 총알이 아 닌,멀리서 날 노리던 저격수의 탄 환이다.
“아,예지가 안 되니 짜증 나네.”
인상이 절로 찡그려진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장님이 된 것이나 다 름없다. 금속에 대한 제어 능력으로 탄속을 확 줄였으니 망정이지,아니 면 탄환이 두개골을 관통해도 이상 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탄환 이 금속이 아니라 나무나 돌이었다 면,이걸로 육신이 죽을 수도 있었 다.
“으아앗!!!”
고함을 지르며 덤벼드는 권사의 주 먹을 잡아챈다. 녹색으로 물리력을 흡수하기도 귀찮았다.
윙!!
뿜어지는 진동과 함께 녀석이 전신 으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다. 그리고 그즈음이다.
“뭘 보고 있나?! 그를 지원해!”
기다란 환도를 들고 있던 대한제국 의 황녀,민경이 고함을 터뜨렸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내가 혼자 싸우는 모습에 정신을 차린 모양.
그러나 당연하지만 그들의 도움 따 위는 필요 없다.
때문에 말했다.
[가만히 대기하라.]
“……"”
‘‘.?!,,
병기를 들고 뛰쳐나오려던 전사들 이,활을 들던 궁수들이,주문을 외 우려던 술사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 췄다. 그러나 멈춘 것은 이가의 존 재들뿐 주가의 인간들은 오히려 그 것을 기회로 여긴 모양이다.
“죽여!”
몸을 돌렸던 나를 향해 대여섯 명 의 창술사들이 돌진한다. 화살처럼 쏘아지는 벼락같은 찌르기였으나 그 래 봐야 그들이 들고 있는 창은 모 두 금속이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군.”
거대한 속성력이 휘몰아쳐 장인이 긴 시간을 들여 정련해 낸 창을 액 체로 만들어 버린다. 그 난데없는 변화에 적들이 경악하는 순간,쇳물 들은 수십 개의 송곳으로 변해 사방 으로 쏘아졌다. 덤벼들었던 적들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변해 바닥에 쓰 러 진다.
“그래. 벌레. 벌레들아……. 너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기분이 풀리지?
몸을 돌려 광화문을 향해 걷기 시 작했다.
그리고 나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었 다.
쩌정! 깡! 좌르륵!!
수많은 무사가 죽으며 떨군 온갖 병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하 늘로 솟구쳤다. 탄환처럼 쏘아지고, 부메랑처럼 회전했으며,마치 누군 가 들고 있는 것처럼 적의 공격을 쳐내고 약점을 노렸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걸어가는 보 보(步步)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한 다.
“이,이게 뭐야?!”
“피해!!!”
바닥에 떨어져 있던,시체에 박혀 있던,심지어 적들이 들고 있던 병 기마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제비 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주가의 이능력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 만,하늘을 날아드는 병기들에 실린 힘은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다.
“이럴 수가! 설마 이기어검(以氣御 劍)이란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기어검은 역사책에나 나올 기술이야!”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덤벼든다. 그 러나 그들 중 누구도 내 주변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멀리서 쏘아지던 저격들 역시 더는 먹히지 않았다. 내 주위를 휘도는 병기들이 모든 원 거리 공격을 원천 차단 하고 있었 다.
“속성력!! 속성력이다! 저 자식! 정 령술을 쓰고 있어!”
“제길! 차라리 이기어검이 낫지 이 런 미친 규모의 속성력 행사가 말이 돼?! 마탑의 주인들도 감히 이런 힘 을 휘두를 수는 없어! 설마 전설의
정령왕과 계약하기라도 했단 말인 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을 찢어지는 비명들이 덮어버린다. 비 처럼 쏟아지는 병기의 비와 바닥에 서 솟구치는 쇠꼬챙이들은 살을 가 르고 뼈를 부쉈으며 자신을 보호하 려는 시도들을 모조리 박살 내버렸 다.
달려들던 무사가 자신의 검에 찔려 죽는다.
저주(I祖I況)를 쏘아내던 주술사가 역류한 저주에 피를 토하며 죽는다.
주문을 외우던 마법사가 방어 마법 을 관통해 들어온 단검에 목을 찔려
죽는다.
죽고,죽고 죽는다. 내가 속성력을 다루는 데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사망 자의 숫자가 두 자릿수에서 세 자릿 수가 되는데 걸린 시간보다 세 자릿 수에서 네 자릿수가 되는 데까지 걸 리는 시간이 더 짧을 지경이었다.
하물며 죽어 나가는 이들이 보통 이들인가?
그들은 강제로 모집해 총 한 자루 들러서 전쟁터로 내보낸 징집병도, 그냥 월급이나 받으며 기본적인 훈 련이나 반복하는 군인들도 아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최소 10년에서
수십 년의 수련을 거쳐 이능을 연마 해 온 투사급 달인들.
그러나 그런 그들이 햇불에 달려드 는 나방처럼 허무하게 스러지고 있 다.
너무나 압도적인.
“더럽게 느리네. 아직도 3천이 안 돼.”
기계적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세 의 학살(虐殺)이었다.
“이래서야 다 죽이는 것도 한세월 이겠다.”
그 따분한 목소리에,마침내 이성 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비명이 들린다. 뭔가 부서지는 소 리도,터지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활짝 열린 문 옆에 앉아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나 동시에.
왜?
의문이 들었다. 왜 문을 닫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필사적으로 자신을 통제하 려 노력해야 할까? 이 벌레들의 하 잖은 목숨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것을 지키는 이가라는 단
체 때문에?
웃기는 소리다.
내가 정말 그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면 맨 처음부터 온갖 방식으로 간섭 하였을 것이다. 방법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가늠하기가 힘들 정도다. 궤 도 폭격 한 번이면 국가 갈등이건 뭐건 모조리 해결되었을 테니까.
결국, 내가 굳이 이가로 들어왔던 이유는 형이었고.
지금 그 이유는 사라졌다.
‘하.’
한숨 쉬며 문에 고개를 기댔다.
그저.
그냥 그렇게 있을 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