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화
“초월자!”
비명과 같은 소리. 그러나 나는 그 녀를 더 상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형 때문에 조금 풀어지긴 했 지만,별 친분도 없는 남을 배려할 기분은 아니다.
“선배,죄송하지만.”
“죄송하지만?”
“나가주시죠. 형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민경이 혼란에 빠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당장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 자신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다. 물론 분위기에 말려서 그런 것 이겠지만.
때문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흠,그래요. 이 말이 듣고 싶으신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 초월자 아닙니다. 됐죠?”
민경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 실이 사실인데 어쩌란 말인가? 무투 계열 초월자인 하워드 공작을 쳐 죽 이고 행성 하나를 멸망시키고 우주 를 날아다니는 전함들을 박살 냈다 고 해도,내 순수한 역량과 경지는 극도로 낮다. 눈앞에 있는 민경보다 도 낮을 것이다.
“대하야,그래도 공주님인데.”
“됐어.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 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별다른 저항 없이 경은을 따라 이가에 들어온 것은 집도,아버지도, 그리고 형도 없어진 지구의 상황을
파악하고 내 한 몸도 추스르기 위함 이었지 이 나라에,그 안에서도 이 가에 소속감을 느껴서가 아니다.
“어쨌든 다시 말하지만 잠시 나가 주시겠어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서 회포를 좀 풀고 싶은데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요청이라고 생 각했다. 형 말대로 우리는 가족이 아닌가? 그러나 민경은 고개를 흔들 었다. 어쩐 일인지 나를 보는 그녀 의 시선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안 돼. 영민이는 지금 중요한 기 로에 서 있다. 집안일로 흐트러질 상황이 아니다.”
“집안일?”
멈칫한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과연 그녀는 알고 있을까? 우리 [집 안일]이 잘못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 는지?
지금 이가는 주가의 침략을 맞이해 자신들이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이고 대단한 착각이다. 이가의 진짜 위기는 내가 뭣도 모르는 붕대 삼인 방에게 공격당했을 때였으니까.
사실,그건 이가만의 위기조차 아 니었다.
그것은 인류 멸망의 대위기.
어쩌면 대마법사 제논 호 키프리오
스가 예지했다는 인류 멸망은 나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작 하급 초월자 [따위]가 나로 인한 미래를 예지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 만,나름대로 세력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인류가 뜬금없이 멸망할 다른 이유가 없으니까.
“후.”
얕게 한숨 쉬며 마음을 가라앉힌 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가 나가죠.”
“안 돼.”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이민경 양.”
자연히 가라앉는 목소리. 그리고 그때 였다.
“잠깐! 타임!!”
형이 나와 민경 사이에 끼어들었 다. 의아해하며 형을 바라보자 형이 깊게 심호흡하는 모습이 보인다.
“후,후우,하아……
그 난데없는 행동에 나는 물론이고 민경까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 고 그런 우리 둘의 시선을 받으며 심호흡하던 형은,마침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같이 들을게.”
“뭘?”
“네가 나에게 하려는 이야기 전 부 ”
“…뭐?”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같이 듣 다니. 너무나 경솔한 말이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같이 듣는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형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 가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 지금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거절의 말을 하려는 순간
형의 눈을 보고 멈칫한다. 뭔가 결 심을 한 듯 흔들림 없는 눈.
형이 말했다.
“역시 그렇구나. 역시 뭔가 엄청난 이야기가 있었어.”
“…형.”
그 순간,나는 형이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그녀를 남기겠 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솔직하고 싶은 것이다.
속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 와 표정,태도에서 진심이 묻어난다.
“미안. 하지만 맹세해. 너를 끌어들
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 아무것도 도와주지 마. 그냥 지켜만 봐도 상 관없어. 그저… 난 그저.”
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 다.
“난 그저 그녀에게 솔직하고 싶을 뿐이야.”
“ ,,
입을 뻥긋거린다. 어이가 없어 말 문이 막힌다.
“아니,그게. 아이고. 아이고,밥소 사.”
절로 나오는 한탄에 이마를 잡고 신음한다. 형이 이렇게까지 나온다
면,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다.
“뭐야.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 는 거냐?”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상 황 파악을 못 한 민경의 질문에 나 는 한숨 쉬며 답했다.
“아주 중대한 이야기. 당신이 이가, 아니,인류의 미래가 어찌 될지 모 를 무지막지한 기로(1按路)에 마주했 다는 말이지.”
“뭐? 인류?”
나름 친절한 설명에도 전혀 이해하 지 못한 표정. 다만 그녀와는 다르 게 내 말을 알아들은 형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 정도야?”
“그 정도야,형.”
“와,심상치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면 나부터 이야기해야 겠네.”
쓰게 웃은 형이 민경을 돌아보았 다.
“민경아,주변을 물려줘.”
“뭐? 지금도 충분히 멀리서.”
“해줘.”
“•••기다려 봐.”
형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민경이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 말 들려오지 않는 걸 봐서는 전음을 사용하는 모 양.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무사들이 뒤로 물러났습니다,함장님.]
‘뭐 사실 은페장을 펼치면 되니 상 관없지만.’
그러나 신경 써주는데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던 만큼 별말 없이 향원정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 고 그런 내 앞에 마주 앉은 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
“기억하지.”
아버지가 형을 입양한 건 내가 5 살 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 버지가 인형처럼 귀여운 아이를 안 고 들어왔던 날.
아버지는 형의 친어머니와 친아버 지가 형이 보는 눈앞에서 연쇄살인 마에게 살해당했다고 말씀해 주셨 다. 그 연쇄살인마는 그때 사회에서 도 크게 이슈가 되었던 녀석이었다 는데,녀석이 형의 친어머니와 아버 지를 죽이고 형까지 죽이려는 걸 아 버지가 구해줬다던가.
“맞아. 아버지의 말대로지. 하지만 아버지가 네게 말해주지 않은 게 있
어.”
“뭔데?”
“우리 친부모님을 죽인 살인마 집 단을 내가 다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 말이야.”
“흠.”
별로 놀라지 않았다. 꺼려하는 마 음은 당연히 없었다. 이제 와서 내 가 살인 하나에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친부 모를 다 죽여 버린 살인자들을 죽였 다니. 법과 정의는 몰라도,적어도 나는 그를 질책할 이유도 자격도 없 는 상황.
그리고 그런 내 태도는 형의 마음 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는지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타 고났어. 태생부터 죽음과 파멸을 부 르고 사람들을 살육해 나갈 운명이 지.”
[성운(星雲)의 단말을 타고났군요. 극히 희귀하게 존재하는 태생 능력 자입니다.]
“살인자들은 이면 세계의 존재들이 었어. 나를 데려다 살인 병기로 쓰 길 원했지. [진짜] 천살성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아버지가 나타난 것은 마침내 형이 모든 살인자들을 죽여 버렸을 때였 다고 한다. 무지막지한 살기의 폭주 에 마침내 형이 마(魔)로 화하려던 그 순간.
어떤 수를 쓴 것인지 아버지는 형 의 천살기를 완전히 붙잡아 정신 깊 숙한 곳에 봉인했다고 한다. 기연이 라면 기연이다. 아버지의 조치로 인 해 형은 하늘조차 죽일 살기를 갈무 리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영원한 봉인 은 불가능해. 천살성은 숙명의 별이 라서 억지로 피하면 억제력이 발동 되거든. 그래서 나는 매일 밤 [탑]
에 들어갔지.”
“탑?”
의문을 표하자 가만히 있던 민경이 말했다.
“이면 세계의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언네임드의 유해(遺!效다. 생 존율이 백 중 두셋밖에 되지 않는 위험 지대이고……
“민경이와 내가 만난 장소이기도 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민했 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매일 밤 연애질을 했다
는 거야?”
“그,그런……
어색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형이 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나는 그렇게 살았어. 낮에 는 따스하고 편안한 집에서 깨고 학 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밤에는 사람을 죽이고 시련을 통과했지. 많 은 위기를 겪었고,좋은 사람들도, 쓰레기 같은 악당들도,그리고 무지 막지한 괴물들도 만났지.”
형의 얼굴은 복잡하다. 짧게 설명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는 표정.
“언제까지 그 탑이란 곳을 다녔는 데? 앞으로도 가야 해?”
“그렇지는 않아. 요번에 아버지가 떠나고 집이 사라졌을 때 마침내 100층에 도달했고.”
우우——!
형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한순간 살벌한 기운이 깃들었다. 보는 순간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살기의 구현, 천살기 였다.
“이런 힘을 얻었거든.”
뭔가 소년 만화 같은 이야기였다. 특별한 운명을 타고나서. 특수한 공 간에서 싸우고. 사랑하고. 그리고 마
침내 스스로의 운명을 정복하는 그 런 이야기.
“너무 간추렸나?”
쓴웃음 짓는 형의 모습에 나 역시 웃었다.
“아니,충분해.”
그렇게 말하고 마음속으로 명령한 다.
‘지니,여기에서만 네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어?’
[은폐장을 조절해 한정적인 지역에 서 관측이 가능하게끔 조절할 수 있 습니다. 적어도 그 정자가 있는 섬 안에서는 함선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겠지요.]
‘부탁해.’
그렇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 다. 계단을 내려가 향원정을 그대로 벗어났다. 내 뜬금없는 움직임에 당 황하면서도 형과 민경이 주춤주춤 따라온다.
“뭐야? 어딜 가는 거야?”
“멀리 안 가.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되거든.”
향원지를 등지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을 돌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민경 과 긴장한 표정의 형의 모습이 보인
다.
“형도 그랬으니… 나도 간추려서 이야기할게.”
길게 이야기하면 책으로 네 권은 뽑아낼 수 있겠지만,간추리면 한 줄이면 해결될 이야기.
나는 말했다.
“지니,모습을 드러내.”
[명을 받듭니다,황제 폐하.]
지니의 모습이 내 옆에 떠오른다. 마지막 말 역시 모두가 들을 수 있 는 외부 음성. 그 난데없는 등장에 형과 민경이 홈칫한다.
“…이게 무슨. 기척이 전혀 없어.”
“아니,그보다 저 옷차림은 뭐야? 게다가 황제?”
당황하는 순간,하늘이 빛난다.
기이이이잉----!
하늘을 뒤덮어 버릴 듯 거대한 선 체(船體)가 모습을 드러낸다. 날개 를 펼친 거대한 새의 모양을 한,날 개 끝에서 끝까지 30킬로미터가 넘 을 정도로 거대한 전함이 하늘을 뒤 덮어 버릴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 내었다.
그것이야말로 레온하르트 제국에도
20대밖에 없는 테라(Tera)급 전함, 알바트로스.
“나는 지구를 떠나 거대 제국의 황 제가 되었고,그만뒀고,돌아왔어.”
그야말로 압도되어 입을 다물지 못 하는 둘을 보며 웃었다.
“너무 간추렸나?”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