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Prologue. 또 다른 씨앗
어두운 방 안에 중년의 여인이 누 워 있다. 젊었을 적에는 제법 미모 를 뽐냈을 것이라 짐작되는,그러나 이제는 같은 나잇대에서도 늙어 보 일 정도로 초췌한 인상의 여인.
여인은 죽어가고 있다.
약에 절을 대로 절은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다. 그녀의 가쁜 호흡은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가늘고 탁한 눈동자에는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
“후안.”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또? 아아… 그러니까,비가 폭포 수처럼 쏟아지던 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벌써 백 번도 넘게 한 이야기였다.
“뒤쪽 언덕에 올라갔었단다. 이 엿 같은 세상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정상에 있는 큰 나무 옆에 녀석이 쓰러져 있었 지.”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면 나갈수
록 넋이 나간 듯 허공만 바라보던 여인의 얼굴에 활기가 깃들기 시작 한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건장한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단다. 난 처 음에 마네킹인 줄 알았어. 양팔이 날아가고 내장이 드러날 정도로 전 신이 난도질당한 상태였는데 이상하 게 피가 흐르지 않았거든. 더 신기 한 건 한 이 주일 정도 보살폈더니 그 엉망인 상태에서 몸이 회복되더 라고. 심지어 잘려 나가고 없던 두 팔도 슬그머니 생겨 있더라니까.”
횡설수설하며 아무것도 없는 천장
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다. 그녀는 더 이상 현실 을 보고 있지 않다. 그 시선은 십수 년 전의 과거를 보고 있었으니까.
“약쟁이들을 매일 상대하면서 녀석 을 간호했지.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어. 어차피 고통밖에 없었는 데. 그날도 죽으려고 했던 건데도… 켁! 쿨럭! 쿨럭!”
거칠게 기침을 토해낸다. 기침에 따라 토해낸 각혈이 그녀의 몸을 덮 고 있는 이불에 튀었지만,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다. 어차피 피가 된 건지 안 튄 건 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천 쪼가리였다.
“즐거웠단다. 그래. 즐거웠어. 뭔가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녀석은 나를 아무런 편견 없는 눈으로 봐주었어. 녀석과 함께라면 이 지옥에서도 살 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그러나 어느 날,그는 마치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미 그녀가 후안을 밴 다음의 일 이다.
“낙태를 몇 번이나 하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는데 말이야.”
“어머니.”
“응. 후안,후안. 엄마 여기 있단 다.”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후안의 손을 잡는다. 후안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속삭였다.
“아버지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아,그것도 정말 특이했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가 웃었다.
“자기를 무명(Unnamed)이라 불러 달라고 하더라고. 나 참,이름을 알 리기 싫으면 알리기 싫다고 하면 될 텐데. 녀석의 이름이 뭐라고 해도… 녀석이 어떤 존재라 해도 나는 상관 없…었……
넋두리처럼 홀러나오던 말이 중간 에 끊기고 서서히 여인의 몸에서 힘 이 빠진다. 피를 피로 씻는 조직 간 의 항쟁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멕시 코에서 태어나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온 어느 매춘부의 쓸쓸한 죽음 이었다.
매춘부의 아들, 후안은 천천히 식 어가는 모친의 시체를 한참이나 내 려다보았다. 뜻밖에도,그의 시선에 는 고통도 슬픔도 없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러나 후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벌 써 10년도 넘게 듣고 있던 소리다.
“장례식은 굳이 치르지 않을게요.”
후안은 가만히 서서 모친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그녀의 삶은 틀림없이 비극이었으나 그 비극은 멕시코에서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종류의 것 이다. 그녀 같은 피해자는 너무도 흔해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까.
카르텔 간의 전쟁으로 한 해에만 1만 명이 넘게 나오는 피해자 중에 는 갱단이나 민간인은 물론 경찰도, 군인도 있다. 더군다나 죽이는 방법 도 매우 잔인해서 그냥 총살한 뒤 사막에 내버려 두거나,참수만 하면
양반이고,내장을 죄 파헤쳐 놓거나 생식기를 도려낸 다음 토막 살인도 하는데,병사라고 하면 나름대로 온 화한 죽음이라 할 수 있으니까.
악의德意)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렇게 한탄하는 후안조차도 선한 존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그에게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으니 까. 카르텔의 재산 중 일부라 할 수 있던 여인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그저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삶 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영혼 깊숙 한 곳에 잠들어 있는 거대하고도 거 대한 신성에 저항하던 생존 의지가
점점 희박해지는 걸 느꼈다. 이제는 그것에 저항할 마지막 이유마저 없 어지고 말았다.
“어차피 금방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까요.”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 진다. 엄청난 소음이었지만 주변 다 른 방들에서는 아무런 항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 소리는 오직 후 안의 머릿속에만 존재했으니까.
후안은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두 워지고 그의 눈앞에는 오직 문만이 존재한다. 하도 두들겨 대서인지 온 통 금 가고 일그러진. 그러나 후안
이 허용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열릴 수 없는 문.
후안은 문에 달린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단지 그 행동만으로도 가슴 속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 들어 왔지만,더는 자신의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그의 행동을 막 아서지 못했다.
“…이 타락한 세상을 교정한 후 에.”
그리고 그렇게.
문이 열렸다.
Chapter 6. 용을 잡아먹는 검의 귀신,그리고 그 동생 I
과거,나는 생각했었다.
이 세상은 가짜일 거라고.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해오던 의심 이었다.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생각이 아니라,공포와 두려움을 가 지고 주변의 사람, 역사와 전통,사 회의 시스템과 사건 사고, 마침내는 세상 전부를 의심해 온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어린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 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의 형태는 너무나 뻔하고 우스꽝스러워 서,나는 언제고 그것이 깨어질 날 이 올 것이라는 예상을 자연스레 하 게 된 것이다.
마치 모피어스를 만난 네오가 세계 의 진실을 깨닫듯,나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항상 상상하고,또 두려워해 왔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랑 하던 나는 일상이 파괴되는 것을 원 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어, 나는 마침내 세계의 진실을 깨달았다.
깨달았는데.
“게임이 아니었단 말이지. 가상현 실이 아니었다니……
내가 [외계인]을 만났을 때 놀라고 당황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칭호와 스탯이 존재하 는 이 세상은 당연히 가짜고,언젠 가 그 진실을 깨닫게 될 거라는 예 상과 전혀 다른 전개를 마주했기 때 문이다. 나는 수많은 미래를 예상했 지만,지구를 벗어나 대우주에서도 흔치 않은 우주 제국 소속으로 전쟁 을 치르고 마침내 황제가 되는 미래 따위는 비슷하게라도 예상할 수 없 었으니까.
“크, 크윽… 너,너 뭐냐. 대체 뭐 야?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들 려왔지만 나는 그것들을 무시한 채 눈앞에 떠오른 텍스트를 읽었다.
[미션 발생!]
[플레이어 킬레
[선별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동 지이자 라이벌입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의 [경쟁]은 대부분 피를 흩뿌리는 것으로 끝나곤 하지요. 하 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정당한 절차 위에서 행해져야 할 일입니다.
당신은 플레이어 킬러를 처리했습 니다!
그들은 시스템의 암적인 존재. 더 이상의 성장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플레이어 킬러들을 사냥하는 만큼 인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 입니다.
과연 당신은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 킬러들을 살해할 수 있을까요?]
[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현상금이라도 걸면 되지 - 마도황
녜
[성공 보상 - PK사냥꾼 1단계(반 영구 버프. 사냥 숫자에 따라 승단 가능)]
[실패 벌칙 - 없음]
[현재 (1,270)명 진행 중]
텍스트가 일렁인다.
[미션 클리어!]
[{《사냥꾼 1단계를 획득했습니다!]
[현재 전적 – 3킬]
‘뭐야,이게. 아무도 안 죽였는데 왜 죽였다는 것처럼 말하지? 게다가 킬은 또 애매하게 3킬이야?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들의 내공을 폐한 것을 죽은 것으로 판단한 것인 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녀석들 중 몇 명이 쇼크사라 도 한 건가 하고 고개를 돌려봤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없다. 나에게 [살 해]당한 녀석들은 멀쩡히 살아 주절 주절 입을 놀리고 있었으니까.
“내가,우리가, 지금 우리가 총을 맞고 쓰러진 건가? 고작 총알 따위 가 내 호신기를 뚫고 들어왔다고?”
“추워… 추워요,회주님……
“어째서,어째서 내공이 안 움직이 는 거야……
한 대씩 총을 맞은 흑월회의 무사 들이 부들부들 떨며 바닥을 기어 다 니고 있다. 그들은 주먹질 한 방에 바위를 부수고 창질 한 방에 특수합 금을 뚫어버리는 초인들이지만,그 래 봐야 소멸탄(消滅彈)을 맞은 이 상 무력화를 피할 길이 없었다.
‘좀 비겁하긴 하지만 지금 전력으
로는 별다른 수가 없네.’
캔딜러 성인들이 레온하르트 황제 에게 선물한 쉐도우 스토커는 그들 이 4문명의 정점에 도달한 자신들의 기술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초 과학의 산물이다. 격(格)을 넘어서 지 못해 초월병기의 수준에는 이르 지 못했지만,그 바로 아래 단계에 는 충분히 랭크될 수 있는 미래 병 기.
리볼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쉐도 우 스토커의 여섯 약실에 시(時), 공(空),무(無)의 효과가 2개씩 적용 되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약실에는 시간
정지와 시간 가속.
세 번째와 네 번째 약실에는 공간 생성과 공간 절단.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약실에는 창조와 소멸.
나는 굳이 탄환을 장전하거나 하는 과정 없이 그저 쉐도우 스토커의 공 이를 당기는 것만으로 준비된 탄환 에 필요한 효과를 적용시킬 수 있었 고,그중 여섯 번째 약실에 담긴 소 멸의 힘을 담아 발사했다.
소멸탄(婦滅彈)은 그저 명중해 몸 에 파고드는 것만으로 그들이 가진 모든 영력을 깡그리 소멸시켜 버렸 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몸에 박혔던 소멸탄은 어느 새 그들의 혈액 안으로 녹아들었다. 쉐도우 스토커 내에 존재하는 [군수 공장]에서 제작된 나노 로봇은 이미 그들의 모세혈관까지 흩어졌기 때문 에,현대의 수술 기술로는 도저히 배출해 낼 수 없다.
그들로서는 실로 끔찍한 일일 테지 만 알 바 아니다. 소멸 설정을 조금 만 틀어도 그들의 육신 자체가 소멸 했을 텐데 살려준 것만 해도 엄청난 자비다.
“이 아저씨들을 어떻게 해야 하려 나……
“너… 관대하? 지금 대체 무슨?”
우리 일행 중 유일하게 정신을 차 리고 있는 산검의 어안 벙벙한 표정 이 눈에 들어왔지만 무시하고 지니 에게 말을 걸었다.
'어쩔까?’
[현재 알바트로스함에는 남는 방이 수만 개가 넘습니다,함장님.]
‘흐음,굳이 거기에 태우고 싶지는 않아.’
뭐 예쁜 아저씨들이라고 우주로 올 려 보내준다는 말인가?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할 상 황이다.
“에이.”
결국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 다.
“산검.”
“앗,으,응?”
“저 갈게요.”
칠대 가문이고 뭐고.
이것들 보호는 그냥 안 받는 게 낫겠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