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화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함장 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지니의 목 소리를 들으며 한탄한다.
‘나 감정 조절이 안 돼.’
[•••그건]
대번에 지니의 목소리가 심각해졌 다.
[위험하군요.]
레온하르트 제국 소속의 함선인 지 니는 내가 하워드 공작를 멸망시킨 대부분의 과정을 알고 있다. 애초에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나 는 그 모든 과정을 공개적으로 진행 했으니까.
‘그런 무자비한 학살을 하고도 정 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니.’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지구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대우주시대에서는 오히 려 개인의 힘과 능력에 더 관대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지구보다 훨 씬 더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강대한 초월자들과 재앙,그리고 신 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야만적인 폭 력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
그리고 그 야만 문명의 정점에 위 치한 미래 병기,아레스가 흥미진진 하다는 목소리로 답한다.
[와,이 별도 박살 나는 거야?]
너무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눈살을 찌푸린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못 할 건 뭐야. 내가 날린 행성 몇 개고 멸망시킨 문명이 몇 개인 데.]
‘뭐라고? 야.’
[놀리는 거 아니라.]
날카롭게 반응하자 내 앞에 떠 있 던 아레스가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묵직한 목소 리로 입을 연다.
[나는 그냥… 너무 부담을 갖지 말 라고 말하는 거다. 스스로를 통제하 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당연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힘에 공 포를 느껴서는 아무것도 안 돼. 중 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너 자신 도,그리고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도 모두 날아가게 될 테니. 그 리고 기억해라. 관대하.]
아레스가 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너는 이딴 행성 수십 수백 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그의 말에 등,하고 얇은 천을 몸 에 두른 폭발적인 몸매의 여인이 모 습을 드러낸다. 알바트로스함의 관 제 인격인 지니였다.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함장님께서는 위대한 황제이시니까 요.]
나는 잠시 두 관제 인격을 바라보 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닌 존
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표정과 말투에 서 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호의와 믿음이 내 가슴 한편을 간지럽게 한다.
-과앙!!
그런데 그때 굉음과 함께 땅이 울 렸다. 흥례문 안쪽에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진 것 같은 소리였다.
“뭐,뭐야? 무슨 일이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어?”
“훙례문은 몰라도 근정문은 통제되
고 있어서 모르겠는데. 대륙 녀석들 이 뭔가 한 건가?”
난데없이 땅이 울리자 주변이 소란 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별로 관심 없 는 문제였던 만큼 무시하고 내 문제 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내 성격이 너무 다혈질이 돼서 큰일이야. 옛날에는 안 이랬는 데.]
그렇다. 예전에는 안 이랬다. 아닌 게 아니라 난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 로 튼튼한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으 니까. 보통의 고등학생이 외계의 괴 물들에게 납치당해 고문을 당하면서 도 버텨낸다는 게 어디 정상적인 상
황이겠는가?
그러나,지금의 나는 조금만 화가 나도 이성이 날아가고 내면의 문을 열어젖히려 한다. 그리고 ‘문 열림= 대학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 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이거… 생산계고 뭐고 일단 불경 부터 외워야 하는 거 아니야?’
[정신력 강화가 필요한 겁니까?]
‘응.’
고개를 끄덕이자 지니가 곰곰이 생 각에 잠긴다. 사막의 무희를 연상케 하는 얇은 재질의 옷이 바람에 휘날 리는 것처럼 하늘하늘 흔들린다.
[정신력 강화로 유명한 건 역시 성 법(聖法) 수행이나…….]
‘그건 안 돼.’
지금도 신성이 문제인데 직접적인 연결을 시작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 어질지 모른다.
[도가(道家),불가(佛家)쪽 무공이 나.]
‘내공에 재능이 없다고 하잖아.’
물론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 하더라 도 공부 자체는 가능하다. 지금 당 장에라도 절에 들어가서 벽을 보며 금강경을 외울 수도 있긴 하겠지. 그러나 이능의 영역이 아닌 공부로
정신을 초월지경까지 단련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연속된 거절에 지니가 잠시 고민하 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말한다.
["•그렇다면 소환술을 단련하는 게 나을 겁니다.]
‘소환술?’
[정령 소환술을 포함해서요. 원래 외차원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훈련은 집중력과 정신력 강화에 효과적이니 까요. 그리고 아까 패스하셨지만 생 산계도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는 데 나쁘지 않습니다. 최고 경지에 이른 생산계 능력자는 몇 달이고 명
경지수를 유지하는 경우마저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결국 이거 저거 다 해봐야 감이 잡힐 거 같은데.’
왁자지껄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 서 서 고민에 잠긴다. 우주로 가서는 기가스 조종사가 되고 지구에서는 이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지만,또다시 학살을 저 지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나는 이내 고민에서 빠져나 올 수밖에 없었다. 손등이 뜨거워지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션 발생!]
“으 ”
겨S".
멈칫한다. 그러나 놀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슬슬 뜰 거라고 예상하던 내용이었으니까.
‘미션 시스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자 오른쪽으로 새로운 창이 떠오른다.
-미션 시스템에 접속하신 것을 환 영합니다.
-현재 등급: 튜토리얼
-등급: 27
-담당자: 율
-현재 접근 가능 영역: 신. 영. 응. 체.
-진행 중인 미션: 0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형식의 텍스 트가 떠오른다. 내가 항상 봐오던 [칭히와 동일한 글자체와 줄 간격, 색감과 투명도를 가진 문자의 나열.
‘이해가 안 되네. 칭호를 보는 내 능력은 내 친부에게서 나온 걸 텐 데.’
이미 확인이 다 끝난 문제라고 생
각하고 있던 나에게 있어 이런 연결 점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애 초에 최상급 신위를 가졌던 기계신, 디카르마의 정보 획득 능력이 어째 서 이런 변방 행성의 시스템과 연관 이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친부가 죽은 곳이 바 로 지구였지… 그 와중에 어머니를 만났을 테고.’
그저 외면하고 있었을 뿐 나는 여 전히 부모님에 대한 정확한 사정을 모른다. 물론 나는 친부가 하계로 [추락]한 후 겪었던 기쁨과 슬픔, 화합과 반목,희망과 절망을 무려 300년짜리 꿈으로 강제 시청하였지
만 그건 지구에서의 기억이 아니라 수천 수만,아니,어쩌면 그 이상으 로 까마득한 과거의 일일 뿐. 그 이 후 친부가 어떤 일로 연합의 대적 (大敵)인 리전의 수장이 되었는지, 또 어떤 일로 죽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새롭게 떠오른 창 을 바라본다.
[미션 발생!]
[대한 제국의 혼]
[이가의 역사는 억압과 굴종의 세
월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분열 과 외압에 휘둘려 칠대 가문이라는 강대한 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자 립하지 못했지요.
이가는 창립 그 당시부터 주가(朱 家)를 황실로 모셨으며 양명가(陽明 家)의 침략과 지배를 당했었고 록펠 러 (Rockefeller) 가문의 수혜자였습 니다. 그리고 그 모두의 영향력 아 래에서 줄타기를 하며 긴 시간 유지 되어 왔지요.
그리고 지금. 지고의 마탑과 3개의 무파,그리고 주가를 품고 있는 중 국이 대마법사의 죽음과 함께 이가 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냈
습니다. 과거 양명가가 그러했듯 말 이지요.
시대의 거대한 격변. 그리고 그 격 류에 휘말린 당신! 과연 당신은 중 화대륙의 야욕을 꺾고 대한(大韓)의 혼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나는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2 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 니,한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 도 이를 잊을 수 없다. 노력하여 광 복하라 - 융희황제 유조(遺諸)]
성공 보상 - 대한제국의 혼 5단계
(반영구 버프).
실패 벌칙 - 패배자의 낙인 3단계 (반영구 디버프).
현재 (15)명 진행 중
“이거야… 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미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간단한 내용이 지만 이가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핵심 적으로 알려주는 미션. 자연스럽게 경은의 말이 떠오른다.
“하하하! 저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약하다고 하니 의외로구나? 하지만
사실인걸. 우리가 왜 황가(皇家)는 물론 왕가(또家)도 자처하지도 못하 고 스스로를 이가(李家)라고 부르는 지를 생각해 봐.”
표면 세계와 이면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영향이 없지 는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도 이면 세계에서의 싸움의 결과일지도 모르지. 내 기억에 양명가(陽明家) 는 틀림없이 일본의 오대 섭관가 중 하나인 고노에가(드oZ(t)를 뜻하 는 말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새로운
텍스트가 눈앞으로 떠오른다.
[분기 발생!]
[대중원 (大中原)]
[비공개입니다]
[비공개입니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조건-국적 (중국)
현재 (1,217)명 진행 중
중국 쪽 미션은 국적 문제 때문에 거의 정보가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
난 건 오로지 미션 제목과 참가 인 원뿐!
그런데 그 참가 인원이 문제다.
“차이 봐라……
15명 대 1,217명. 무려 80배가 넘 는 숫자. 그리고 거기에서 추론되는 정보는 두 가지다.
첫째. 이면 세계의 선별자들이 이 미션의 승패를 뻔하다고 생각하거 나.
둘째. 대중원 미션이 대한의 혼 미 션보다 먼저 시작되었거나.
‘지니.’
[네,함장님.]
‘내 손등에 새겨진 문양에 대해 조 사할 수 있어?’
내 물음에 지니가 예상했다는 듯 준비한 답을 말한다.
[일종의 단말입니다.]
‘단말?’
[네. 어떤 거대한 설비를 중심으로 실행되고 있는 강대한 궁극 마법과 연결된 단말. 다른 초월자들과 제대 로 된 교류조차 할 수 없는 이런 변방의 대마법사가 이 정도의 시스 템을 만들었다니 경악스럽기까지 하 군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손등
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비활성화 상 태였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순간 내 재능과 현재 경지를 나타낼 수 있는 육망성이 드 러나게 될 것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선별자가 47만 명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과연 그 47만 명 모두가 이 미션이라는 걸 받을 수 있는 것 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판단하기에 는 두 미션에 참가하고 있는 숫자가 너무나 적다. 율이 내 육망성이 특 별한 물건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이 유 때문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침묵을 지키
던 지니가 말을 걸었다.
[함장님,중국의 완성자가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건가… 사정 정 도는 알아야겠지. 보여줘.’
나는 쓰고 있는 안경. 우자트를 조 절해 근정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황제(皇帝)라 부르고.
누군가는 왕(王)이라고.
그리고 누군가는 가주(家主)라 부 르는.
오합지졸의 우두머리를.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