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빨리 뇌를 파내서 이놈의 기억을 지워 버리든지 해야지.
“흠,그럼 그 소식이 사실인가?”
“소식?”
“그래. 네 어머니 쪽이 굉장한 분 이었는데 그 피가 이제 와서 각성 (覺®)했다는 이야기. 경은이랑 같
이 가는 걸 보고 설마 하긴 했지 만… 진짜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신음할 때였 다.
쿵!
멀리에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컥!”
“으으윽!!”
“맙소사… 이런… 심후한 내공이라 니.”
저 앞쪽에서 신음과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일까? 나에게 전해지는 타격은 없고 일반
인이라는 재석 역시 별다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은 상황.
그러나 그와 별개로 재석의 표정은 심각하다.
“역시 저우흥이… 스타일대로 하는 군.”
“저우홍?”
“검성(劍聖) 저우홍이(周鳴神). 대 국에도 고작 일곱밖에 없는 마스터 급 무인이야.”
“검성이 라니.”
너무나 무협지스러운 명칭에 고개 를 흔들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재 석이는 진지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다른 별명으 로 부르지.”
“다른 별명? 뭔데?”
“규칙 파괴자. 룰 브레이커라고.”
그는 우려 섞인 눈으로 흥례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너머의 근 정문,그리고 그 너머의 근정전의 상황을 우려한 것이겠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니 가 나에게 전달한다.
[저우홍이. 북경 중산층에서 태어 나 10살의 나이에 이면 세계로 진 입한 무예 능력자로,고작 28살의 나이에 지검대장(벤檢大將)의 자리
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지 검대장의 직위는 중국의 부장(部長) 과 동급으로 이는 한국의 장관과 같 은 위치이며 현재 그 위치를 30년 가까이 지켜오고 있지요.]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28살에 장관 이라고?’
현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다. 그 어떤 대단한 위업을 세운다 하더라도 젊은 청년에게 그만한 권 한과 위치를 주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곳에서는 다르다. 오직 힘이 전부인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중국 전 대륙을 통
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실력자라고 하는군요. 그는 지검대 장으로서 수많은 나라에 방문하고, 또 그만한 ‘성과’를 만들어내 왔다 고 합니다.]
‘성과.’
의미심장한 단어를 곱씹는데 재석 이 탄식한다.
“아… 대마법사께서 돌아가시자마 자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대마법사 님이 맨날 사람들을 보고 머저리에 어리석은 짐승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때마다 발끈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면 역시나 대마법사님다운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나.”
쿵!!!
다시금 저 멀리에서 발 구르는 소 리가 들린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전 해지는 묵직한 진동에 사람들이 술 렁 인다.
“으으! 저 미친놈! 아무리 대륙에 서 왔다고 해도 황제 폐하의 어전에 서 이게 무슨 폭거란 말인가!”
“왕이시여……
“상황이 웃기게 되었군. 과연 가주 가 이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분위기였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대감을 품은 듯 흥분한 사람들도 보이고 개중 몇은 뭔가 기회를 노리 는 듯 눈을 날카롭게 빛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은.
‘개판이구먼.’
그렇다. 그야말로 개판. 그리고 그 광경에 기막혀하는 내 마음을 짐작 한 것일까? 잠시 한심하다는 듯 다 른 사람들을 둘러보던 재석이 입을 열었다.
“대하야,세계 최강국은 어디라고 생각해?”
“음? 미국 아냐?”
상식적인. 그리고 당연한 대답이다.
달러를 찍어내는 기축통화국으로서 의 위상과 압도적인 자본력,외교력, 그리고 무력을 가진 강대한 국가가 바로 미국이 아니던가?
그러나 뜻밖에도 재석의 의견은 달 탔다.
“중국이야.”
“… 진짜?”
“그것도 그냥 강대국 정도가 아니 라… 미국이랑 유럽 전체가 힘을 합 쳐도 중국이 더 우세할 정도지.”
재석의 말에 놀라움보다 의문이 먼 저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 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였으니
까. 물론 중국은 대단한 강대국이기 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 럽과 미국이 합친 것 이상의 국력을 가진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과연 내 의문을 이해한 듯 재석이 말한다.
“무파(武派)때문이야. 너무나 위대 하시고 위대하셔서 인간 세상의 세 력 분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 으신 대마법사님의 안배 때문에.”
세계의 이면(妻面)인 어나더 플레 인(Another Plane)은 15개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삼대 마탑.
오대 무파.
칠대 가문.
각 세력들 중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것은 마탑들이지만 바로 그 아 래에 위치하는 게 바로 무파들이다. 칠대 가문도 강성한 세력인 것은 틀 림없지만,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의 위치는 지역의 유지(有志) 정도로 삼대 마탑과 오대 무파를 지원하는 보조적인 단체들일 뿐.
“물론 칠대 가문들도 사력을 다해 무력을 키우고 조직을 정비해 왔지 만… 아무리 그래봐야 대마법사께서 직접 정성을 다해 키워낸 마탑과 무 파들에 비교할 수는 없어.”
“아.”
그거라면 이해가 된다. 이 34지구 에 살고 있었던 대마법사가 초월자 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유능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필 멸자들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하더 라도 그가 준비해 온 안배를 등에 업고 있는 세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 겠지.
물론 이가에도 대마법사의 안배가 존재하기는 한다. 경회지 깊은 곳에 서 잠들어 있는 이무기는 물론이고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영혼거병(靈 魂巨兵)들까지. 대우주에서 활약하 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시점으로 봐
도 절대 가볍지 않은 무력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비상용이라는 느낌이 란 말이지.’
그렇다. 내가 봤을 때 그것들은 이 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 다. 하긴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었 으면 고작 소드 마스터 하나에 이가 전체가 휘둘릴 이유가 없겠지. 게다 가 저 안배들은 이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것 들이니 더욱 그럴 테고.
재석이 말했다.
“전 세계에 다섯 개밖에 없는 오대
무파 중 3개가 중국에 위치해 있어. 삼대 마탑 중 하나인 지고의 마탑도 사실상 중국이 장악했지. 비록 지금 까지는 대마법사님의 통치 아래에서 감히 이빨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단 말이지?”
“그래.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대 마법사님의 수명이 끝났다는 건 벌 써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 실이니까.”
그때,암담하다는 듯 무거운 목소 리로 늘어놓는 재석의 말을 끊는 목 소리가 있었다.
“표면 세계 출신한테 너무 많은 이
야기를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을 헤치고 여섯 명의 사내들 이 모습을 드러낸다. 말쑥하게 양복 을 차려입은 30대 중반의 사내가 하나. 무슨 전국시대에나 볼 법한 일본식 전신 갑주를 입고 허리춤에 일본도를 차고 있는 노인이 하나. 그리고 근육질의 육체를 그대로 드 러내고 있는 네 명의 거한들.
‘인간이 아니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눈에 확 들 어오는 3미터의 신장을 가진 거인들 은 회색빛 피부에 창백하게 굳어 있 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가 봐 도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아
니,그 정도를 떠나서.
[언데드로군.]
[34지구에도 사령술사들이 있군요. 편견을 안 가지려고 하지만 언제 봐 도 기분 나쁜 종파입니다.]
두 인공지능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잠시 낯빛이 굳었던 재석이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채워 넣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인다.
“아,현석이 형님 돌아오셨군요.”
“때가 때니까. 그나저나… 네가 소 문의 그 녀석인가?”
그렇게 말한 양복의 사내가 슬쩍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리 마음
에 드는 시선은 아니다. 마치 뱀 같 은,먹잇감을 보는 시선.
“소문?”
“선생님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 질문과 재석의 답,그리고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은 양복 사내가 말 한다.
“마스터맨은 이쪽 세계에서도 유명 하지. 하도 튀어서 성계신을 후리지 못했으면 벌써 옛날에 죽었을 정도 거든.”
“죽는다고요?”
“그야 죽겠지. 너무 나대서 매 벌 기 딱 좋은 녀석이거든.”
혀를 날름,내밀어 입술을 할는 그 의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 보았다. 아니,이 아저씨는 당사자의 자식을 눈앞에 두고 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내 가 기막혀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둣 그는 나를 모로 돌아보며 말했 다.
“혹시 현진이를 봤나?”
“현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의문을 표하자 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 다.
“식당에서 만났을 텐데?”
“아,그 붕대……
나는 그제야 그의 칭호를 확인했 다.
[이 (李)가]
[7 레벨]
[사령술 전문가 이현석]
‘아,그러고 보니 찾겠구나.’
그다지 중요하지 여기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 사실 당연한 일이다. 어 깨에 힘 좀 쓰는 세력이,그것도 다
른 장소도 아니고 이가의 심장부라 고 할 수 있는 경복궁에서 행방불명 되었으니 어찌 찾는 사람이 없겠는 가? 그리고 그들과 마지막에 있었던 나는 분명히 가장 유력한 용의자일 것이다. 만일 녀석들이 나를 미행하 기 전에 흔적을 남기기라도 했다면 더더욱.
이건 틀림없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붕대 녀석이 돌 연변이처럼 사악한 심성을 타고났을 리는 없으니,대놓고 내 손가락을 자른다고 협박하거나 그 협박을 비 웃자 바로 뒤쫓아와 살해하려던 시 도 모두가 그들이 속한 집단의 [성
향]인 것.
하지만 순간.
‘뭐 어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그냥 대충 부정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때가 처음이 자 마지막으로 본 거라.”
“하? 뭐라고?”
대번에 사내의 얼굴이 사납게 변한 다. 아무래도 내 말투가 마음에 들 지 않는 모양. 하지만 적어도 동생 보다는 차분한 성격인지,아니면 그 저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몰라 도 깊은 심호흡으로 스스로를 가다
듬고 말한다.
“하긴.”
“..7,,
“너 같은 버러지가 감히 내 동생을 어찌 할 수는 없겠지.”
비웃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에.
순간 울컥,하고 속에서 뭔가가 올 라오고.
‘•••감히?’
이어 당연하다는 듯 머릿속에서
[문]의 형상이 그려졌으며.
쿵.
[무언가]가 그 문을 두들겼다.
“헉?”
기겁해 신음이 절로 나온다. 이마 에 식은땀이 맺혔다.
‘뭐,뭐야. 고작 이 정도로?’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고 작 말 한마디 들었다고 다 치워 버 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다니 이 게 대체 무슨 분노 조절 장애 말기 같은 소리란 말인가? 나는 이를 악 물며 문에 사슬을 두르는 이미지를 그렸다.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아니,나중에도 아 니다.
쿵쿵!
마음을 진정시킨다. 호흡을 고르고 집에서 책을 보거나 TV를 보며 소 일하던 일상을 떠올린다.
쿵쿵....
천만다행히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점점 약해진다. 그리고.
“훗.”
식은땀을 홀리는 내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사령술사,현석이 씨익 하 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배재석.”
“네,형님.”
대한민국에서 최상위 권력층,흔히 일성 공화국이라 불리는 재벌 회장 의 손자라는 직위가 무색하게도 재 석은 고작 사령술사 하나에게 고개 를 숙였다. 이 장소,이면 세계에서 무엇보다 힘이 우선이라는 것을 단 적으로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따라와.”
“네? 하지만……
“뭘 하지만이야? 사업 이야기니 따 라와. 진만이 영감도 관심 있어 할 거다.”
일성 회장을 무슨 옆집 아저씨 부 르듯 하는 현석. 그리고 그의 말에
난감해하는 재석이. 나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 난 걱정할 필요 없어.”
“응,미안. 학교에서 보자.”
재석은 내 손을 한번 잡아주더니 사령술사 녀석들과 함께 사람들을 헤치고 흥례문 안으로 들어선다.
“일진한테 끌려가는 친구를 보는 기분이구먼……
썩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그 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야,큰일 났다.’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함장 님?]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지니의 목 소리를 들으며 한탄한다.
‘나 감정 조절이 안 돼.’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