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Chapter 3. 대국과 소국
한 발짝 내디딘다. 모래 바닥에서 자욱한 먼지가 인다.
쿵!
다시 한 발짝 내디딘다.
쿵!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표면 세계 라면 오른쪽에 매표소가 있어야 할 광장 위로 7명의 일행들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걸음은 느리다.
아니,사실 이건 그냥 느리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고작 한 걸음 내 딛는 데 거의 3초에 가까운 시간이 소모될 정도로 그는,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걷고 있다.
‘아 정말.’
안경 형태의 마도병기 우자트를 통 해 알바트로스함의 [시점]으로 내려 다보고 보고 있던 나는 주변의 모든 존재를 위압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 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대착오적인 복장과 행동들이네.’
어이없게도 그는 사극에서나 볼 법 한 관모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다양한 색으 로 빛을 반사하는 공작의 꼬리털이 달려 있다. 꼬리털을 고정하는 부분 은 금빛을 뿌리는 꽃과 구름으로 세 심하고 정성스럽게 세공이 되어 있 고,꼭대기에는 아주 붉고 투명한 루비가 박혀 있다.
입고 있는 의복은 남색 바탕의 관 복이었는데 가슴팍의 흉배(胸背: 조 선,명나라,청나라 등에서 특정 계 급이 입는 의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 던 표장)에는 무관 1품을 나타내는 금빛 기린이 수놓아져 있다.
-크릉!
‘오. 저거 봐.’
신기하게도 사람이 수놓았을 게 틀 림없는 기린은 사나운 기색을 숨기 지 않으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심지 어 슬금슬금 눈을 굴리며 이곳저곳 을 쏘아보고 있기까지 하는 게 아닌 가? 그것을 입고 있는 사내가 조종 하는 분위기는 아니니 그 스스로가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
놀라워하는 내 기색을 느낀 듯 지 니가 설명한다.
[제작계 능력자가 만든 의복이로군 요. 제법 잘 만든 물건입니다.]
‘그러고 보니 꼭 제작계가 꼭 무기 만 만드는 건 아니라고 했었지… 하 지만 아무리 그래도 비단옷을 만드 는 제작계 능력자도 있는 거야?’
[상상력만 풍부하다면 모든 게 가 능하지요. 능력자가 어떤 속성을 타 고나느냐가 유일한 제약이라면 제약 이겠지만.]
쿵!
쿵!
내가 지니와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 도 계속해서 땅이 울린다. 중세 사 극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옷차림의 중국인들은 거의 완전히 동일한 움
직임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들 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묵직한 기 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것.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위치한 사내의 기세는 꽤 특출하다.
[완성자급 내공 사용자입니다,함 장님. 레온하르트 제국에 투신하면 1년 정도의 군사 훈련만 받아도 대 위부터 군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만한 실력자이지요. 성실하기만 하 다면야 언젠가 별도 달아볼 만하니 앞날이 꽤 창창한 편입니다.]
‘앞날이 창창이라고 해봐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서는 고작 별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190센티미터가 넘을 것 같은 건장 한 신장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 적인 그는 무인치고는 꽤나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다. 절대,누가 봐도 낮은 위치에 있는 이가 갖출 만한 복색이 아닌 것이다.
‘특히 저 목걸이를 보라고.’
가슴을 지나 복부까지 길게 내려오 는 목걸이는 붉은 산호석들이 촘촘 하게 꿰어져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사이사이로 은은한 빛을 흩뿌리 는 구슬들이 보인다. 농담이 아니라 항상 환한 조명에 둘러싸여 있는 경
복궁 안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선명한 빛. 만일 이곳이 어두운 곳 이었다면 그의 주위로 형광등 100 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을 정도이니 그 화려함을 더 말 해 무엇하겠는가? 분위기를 잡고 무 겁게 걷고 있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 다 목걸이의 산호석들이 서로 부딪 쳐 나는 차르릉 차르릉 소리는 차라 리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쿵!
“쿨럭……!”
흥례문을 여유롭게 통과한 그가 영 제교를 지나고 근정문까지 건너 근 정전 앞에 늘어진 박석(薄S) 위에
도달하였을 때,마침내 주변에 도열 해 있던 이가의 능력자들이 피를 토 하며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그들, 그러니까 중국의 무인들이 뿜어내는 기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흠.”
나는 무심코 손을 들어 턱을 쓸었 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슨 구도지,이건.”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
“응? ”
나는 난데없이 끼어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재석아?”
전혀 뜻밖의 등장인물에 놀라 자리 에서 일어났다. 항상 주변을 지키고 있던 궁녀들까지 모조리 사라진 국 립고궁박물관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양복을 입고 있는 내 친우,배재석 이 있었다.
“그래. 나다,이 녀석아. 너 왜 여 기 있어?”
“그냥 어쩌다 보니,그렇게 됐어요. 조폭님.”
웃는다. 말이 좋아 고등학생이지 저 모습을 어느 누가 학생으로 보겠 는가? 얼굴선이 굵직굵직한 데다 어
깨도 떡 벌어진 녀석이 양복까지 갖 춰 입으니 미성년자가 아니라 조직 폭력배 행동대장으로밖에 보이지 않 는 상태.
그러나 재석은 그런 말 하지 말라 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조폭은 무슨. 난 여기 길가는 궁 녀분들하고 싸워도 처맞아야 하거 든? 아니,그보다 얼른 따라와! 여 기 있으면 안 돼!”
“뭐?”
내가 의문을 표하거나 말거나 재석 은 내 팔을 잡아 질질 끌어 광화문 과 흥례문 사이의 광장으로 이동했 다. 한적하던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광장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중국인 일행이 광장을 가로지를 때에는 감 히 접근조차 못 하던 사람들이 흥례 문 앞에 잔뜩 모여 있는 것이다.
“뭐야. 나도 여기에 와야 했던 거 야?”
“나도,가 아니라 전부가 다 모이 라는 왕명(또命)이 있었어. 아무리 외부인이라지만 사람이 눈치가 있어 야지! 문이란 문에는 다 서 있던 궁 녀들까지 싹 다 사라진 걸 보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안 들어?”
거기까지 말한 재석이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아니,그보다 궁녀들은 왜 너를
그냥 놔둔 거야? 결계사들까지 전부 끌려가서 외부 결계마저 일시 중단 된 상태라던데! 아니,이것들이 관 계없는 일반인이라고 차별하는 거 야?”
신경질을 부리는 녀석이었지만 그 목소리에서 나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웃으며 답한 다.
“일이 좀 있어서.”
“아니,왕명이라니까? 일이 있건 없건 다 끌려간 상황인데 이게 무 슨… 새로 들어온 인원이라 누락이 됐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재석이었
지만 나는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 다.
‘율 때문인가.’
아무래도 이면 세계에서 [선별사] 라는 조직이 가지는 위상이 꽤나 대 단한 모양이다. 정말 필수적인 인원 조차 불려가는 상황에서 모두 약속 이라도 한 듯 내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문제가 이면 세계 의 대부분의 권위를 넘어선다는 말 일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이가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는 꽤 심각했다.
“젠장… 대륙 놈들……
“무도하다,무도하구나. 황제 폐하 가 이 꼴이 돼야 하다니.”
“아니,지금 이제 와서 황제는 무 슨、”
“맞아. 지금 이 꼴을 보고도 황제 이야기가 나와? 왕도 못 되는 가주 에 불과하구먼.”
젊은 청년들의 말에 한복을 입고 있는 노인들이 곱게 다듬은 수염을 부르르 떤다.
“뭐,뭐라고? 네놈들이 대한제국의 명예를……!”
“시끄러워,꼰대.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칭제(稱帝: 스스로를 황제라고 선포함)에는 아무런 의미 도 없다고. 아니,그걸 넘어서 칭제 자체가 매우 중국적인 개념이라는 걸 몰라? 지들부터가 이미 사대적인 사고를 가진 주제에 대한제국의 명 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마치 양아치처럼 빈정거리는 사내 였지만 그 역시 보통의 사람은 아니 다. 내공,즉 기를 육신 안에 사역 해 인간을 초월하는 운동능력을 가 진 강력한 무인.
“아니,그보다 제국이라면 제후국 이 필요한 거 아냐?”
대꾸하는 사내 역시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이종(異種)의 피를 받아들여 늑대의 머리를 가진, 밤의 괴수.
표면 세계에서 미쳐 날띈다면 단신 으로 수천 단위의 사상자를 낼 괴물 의 말에 무인이 답한다.
“왜? 탐라국(제주도에 있었던 옛 나라)이 있잖아,탐라국.”
“크크크… 미친놈.”
“그나저나 진짜 짜증 난다. 병신들 이 뭘 하지도 않으면서 주둥이는 아 주 그냥 대마법사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웨어울프 의 말에 노인이 다시 부들부들 떨었
다.
“네,네놈들……
“시끄러워. 자위를 할 거면 아무도 안 보는 방구석에서 혼자 하라고. 대한제국 따위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가의 일원으로서 쪽팔림을 견디기 어려우니까.”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도 못한 채 수군거리는 이가 사람들의 말을 들 으며 흥례문 쪽으로 다가간다.
“많구먼……
“그러게. 이가에 사람이 이렇게 많 았나.”
아까 봤던 대로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의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있다. 심지 어 흥례문 너머로 보이는,과거 왕 의 공간을 나누는 선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제교에도 사람들이 우글우글 서서 웅성거리고 있는 상태.
어디 그뿐인가? 과거에는 문무백관 들이 자리했다던 품계석(品階石)이 세워진 조정(朝起)마저도 질서 없이 들어찬 온갖 능력자들이 가득해 무 리 뒤쪽에 있는 우리는 감히 그 안 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애초에 근 정문은커녕 흥례문에조차 들어서지 못했으니 조정에 사람이 가득하다는 사실조차 광화문 앞 즈음에서 문 안
쪽으로 보이는 광경을 언뜻언뜻 보 이는 장면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 다.
“그나저나.”
그리고 그렇게 벅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물었다.
“너도 [이쪽] 사람이었어? 초능력 자나 마법사나 뭐 그런?”
클래스메이트라는 게 꼭 서로에 대 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재석 이를 이가에서 만난다는 상황은 나 조차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재석은.
녀석은 틀림없이.
“일반인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은 한숨 을 내쉰다. 녀석의 말투에는 왠지 모를 체념과 탄식이 섞여 있었다.
“이면 세계로 넘어올 최소한의 자 격 때문에 약간의 마력을 사역했지 만… 그게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 수 준은 아니지. 나는 정말 전혀,완전 히,아무런 재능도 없는 일반인이거 드 ”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왜긴 왜야.”
쯧,하고 재석이 혀를 찬다.
“집에 돈이 많아서 그렇지.”
녀석의 집안에 돈이 많다는 것은. 그러니까 나름대로 부자들만 다닌다 는 우리 학교에서도 탁월할 정도로 돈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녀석이 별로 부자 티 를 내지 않고 산다 하더라도 그의 [집안]은 틀림없이 녀석의 중요한 상태 중 하나니까.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녀석의 칭 호를 분류해 변경해 보았다.
[원일고등학교]
[1 레벨]
[재벌 3세 배재석]
그것이 녀석의 [대표] 상태가 아니 라는 것은 꽤 재미있는 사실이었지 만, 어쨌든 나의 친우,재석은 대한 민국 최대 재벌 그룹인 일성(一星) 의 회장 배진만의 손자였다. 녀석이 평소 소탈하게 지내고 심지어 점심 시간에 나한테 매점 빵을 얻어먹는 만행을 저지르는 파렴치한이라 하더 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하지만 그 사실에 어이가 없어진 다.
“초능력자들이 수천 수만 명이 있 는 세상에서 용케 재벌들이 무사하
구나.”
“초능력자들이 수천 수만 명이 있 는 세상이라도 돈은 어쩔 수가 없으 니까.”
“…그렇구나.”
“아니,그보다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의 광장. 표 면 세계였다면 매표소가 위치해 있 어야 할 벽에 등을 기댄 재석이 어 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너야말로 완전 일반인 아니었어? 관일한 선생님과 그 친아들이 모두 일반인이라는 건 이면 세계에서도 유명한 일인데.”
“…일반인이라는 게 어떻게 유명할 수가 있어?”
왜 아버지를 선생님,이냐고 부르 냐,예전에는 안 그랬지 않느냐,같 은 질문은 굳이 하지도 않는다. 왜 냐하면 재석이 녀석은 표면 세계에 있을 때에도,그리고 이면 세계에서 만난 지금도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마다 존경과 찬탄을 금치 못할 표정 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할 수 있지. 왜냐하면 그저 일반인이라고 외면하기에 관일한 선 생님은 너무나 비범한 분이시니까. 애초에 신의 마음을 아무나 빼앗을 수 있겠어?”
그렇다. 이면 세계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신의 마음을 훔친 자]. 그 리고 그것은 무슨 비유 같은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 고 있다.
보람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우리 별의 성계신이 선생님께 홀 딱 빠졌거든요.”
“…성계신?”
“벌써 세 번이나 차였다고 하더라 고요.”
그리고 바로 그 [성계신]. 지구인 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문명 의 시작부터 인류를 돌봐온 어버이 와 같은 존재에게 [내가] 했던 말 역시 떠올린다.
“내 아이를 낳아라.”
빨리 뇌를 파내서 이놈의 기억을 지워 버리든지 해야지.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