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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머리 위에 2부-12화 (129/249)

12화

화악!!!

“뭣?!”

여섯 개의 촛불 중 하나가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한순간이지만,그 크기가 거의 햇불에 필적할 정도였 다.

“대행자의 이름으로 명하니! 폐하 라!!”

비명과 같은 고함과 함께 쩡,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리고 이내 주 위의 모든 사물이 회색으로 물들었 다. 마치 흑백영화의 그것처럼 주변 의 모든 것을 정적(靜寂)에 잠기게 하는 힘. 그러나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은 그 모든 게 상관없다는 듯 홀로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후욱!

양초가 순식간에 거의 절반까지 타 버리자 어지러울 정도로 자욱한 사 과향이 주변을 휘감는다. 나는 가만 히 서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 다.

“가장 낮은 빨간색이군요.”

“아니,이건. 이건.”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율 이 이마를 찡그린다.

“이건 뭔가 다릅니다. 아무리 색이 빨간색이어도 이 크기는……

팟!

순간 촛불의 색이 바뀐다. 주황색. 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다.

“색이… 변한다? 확인 중간에 변화 가 있다고?”

그러나 그런 그의 반응 따위 아무 래도 상관없다는 듯 초의 색은 계속 해서 변했다.

노란색,초록색,파란색.

남색,보라색.

그리고 마침내.

“이건 무슨 색이죠? 흰색? 아니, 은색이라고 해야 하나.”

“이,이,이게 무슨……

“아,또 바뀌네. 이번에는 금색인 가.”

나는 자꾸자꾸 바뀌는 색이 신기했 지만 거기까지다.

팟!

촛불이 꺼져 버렸다. 무지막지하게 덩치를 키우던 불길 때문에 심지가 다 타버린 것이다. 책상 위에는 녹 아버린 촛농만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흐음,신성력의 초인가.”

놀라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었 다. 이 초에 담긴 기능이 신성 적성 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가정했을 때, 신성력의 적성이라는 것은 결국 신 성력을 제어할 수 있는 재능과 신의 힘을 받아들일 [그릇]의 수준을 나 타낼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신성의 초가 읽어 내는 재능은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영적인 재능일 테지만……

그러나 스스로 상급의 신성(神聖) 과 하급의 신위(神位)를 가진 나는 그런 틀 자체를 부숴 버리는 존재가

아니던가? 당연한 결과에 나는 금방 관심을 잃고 다음 초에 기도했다.

피시식…….

피식!

“아,역시. 이 두 개는 안 될 거 같더라니.”

마법이나 무공을 쓸 팔자는 아니었 던 모양인지 마력의 초와 기력의 초 는 불꽃을 일으키는 데 실패한다. 다행히 다음 기도는 잘 먹혔다.

팟! 팟!

“호응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초록 색이고… 영력은 보라색인가.”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에서

체크가 가능한 재능의 종류는 신마 기영응체. 그리고 그 여섯 가지 힘 의 재능 중 가장 강렬하다고 할 수 있는 신성력을 수련해서는 안 된다 는 걸 생각하면,결국 내 재능은 초 록색의 재능을 가진 체력과 호응력, 그리고 보라색을 가진 영력일 것이 다.

“당신.”

마침내 모든 초를 꺼버리고 몸을 돌린 내 눈에 온몸에 회색의 영기를 뿜어내고 있는 율의 모습이 비친다. 지금까지의 여유는 다 날아가 버린 듯 안색이 창백하다.

“괜찮으세요?”

“당신은… 립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양초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거나 이게 왜 이러냐고 오히려 되물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다.

그리고 사실 별로 그럴 생각도 없 었다.

“고등학생이요.”

“아니,그게---!”

황당한 얼굴로 따지려 하는 율의 말을 끊는다.

“평범하게 태어나 십몇 년 동안 평 범한 학생으로 살아왔어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단지 어 릴 적부터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 었고,올 봄에 우주로 나가서 제국 의 황제가 되었을 뿐이지.

“뭔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제가 타 고난 핏줄에 있겠지요.”

이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힘들이 내가 간절히 원해서 손에 넣은 게 아니라 는 것 정도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으 니까. 이것들은 문명과 정보의 신이 라는 위대한 자리에서 영락해 떨어 졌던 나의 친부,기계신 디카르마의 유산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마녀의 혈통이 어째서

신성력을 가질 수 있.”

거기까지 말한 율이 문득 말을 멈 춘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가 찡그려 졌다가 다시 창백해진다. 그의 가느 다란 실눈이 까만색의 눈동자를 드 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하기를 그대 로 1분여. 마침내 정신을 차린 율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군요. 그랬어요. [마스터맨]은 역시 인간이 아니었어요.”

“…네?”

“그래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던 겁 니다! 모든 조사가,모든 이론이 그 를 인간이라 가리키고 있다 해도 그 비범함은 인간일 수가 없는 수준이

었어요! 그래! 애초에 성계신께서 일개 인간에게 빠진다는 것 자체가 말끼 안 되는 일이었지요. 그래! 역 시 그래서……

중얼중얼. 정신이 나간 듯 방을 서 성이는 율의 모습에 나는 그가 아버 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니,아버지. 보통 사람이라면서 왜 여기서 유명해요.’

헛웃음이 나을 만한 일이지만 아버 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빛나는 사람. 뭘 해도 완벽 한 사람.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경시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단지 이능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해

서 펌하하기에 아버지,관일한이라 는 인간은 지나치게 뛰어나다.

‘하긴. 그러니까 [인간 대표]지.’

아버지의 어처구니없는 칭호 중 하 나를 떠올리며 피식하고 있는 사이 율이 다시 내 앞으로 와 앉는다. 잠 시간의 혼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힌 것 같았다.

“후우… 추태를 보였군요. 워낙 예 상외의 사태라.”

그는 쓰게 웃으며 테이블 위를 가 법게 훑었다. 꺼진 양초와 녹아 홀 러내린 촛농으로 지저분했던 테이블 이 마술처럼 깨끗하게 변한다.

“선별은 이걸로 끝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촛불은 그저 해당 영적인 적성을 알려줄 뿐이니까요. 예를 들어 마력에 대한 재능을 가지 고 있다 하더라도 지능이 떨어진다 면 위저드(Wizard)가 될 수 없고 지능이 높더라도 영성을 타고나지 못한다면 소서러 (Sorcerer) 가 될 수 없듯 그 외의 변수는 무궁무진합니 다. 아주 높은 등급의 신성력을 타 고났다 하더라도 신심(信^心)이 부족 한 무신론자라면 성직자 보다 차라 리 소환 마법을 익히는 게 나은 것 처럼.”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

했다.

“일단 신성력을 제외한 재능을 찾 는다면 어떨까요?”

“뭐,어차피 일곱 빛깔을 벗어난 재능은 전례가 없어 가이드를 제시 하기도 어려우니… 좋습니다. 그렇 다면 소환사와 정령사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군요. 영능 적성과 호응력 이 함께 있다면 영력을 거래 대상으 로 삼아 외계의 존재를 부를 수 있 으니까요. 영능을 극대화한다면 오 오라 단련도 노려볼 만하고 호응력 을 연마한다면 박수가 되어서 채널 링을 목표로 할 수도 있겠지요. 그 리고 또……

“호오”

뭔가 체계적이고 다양한 선택지에 휘파람을 분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니와 아레스도 기가 막힌 모양이 었다.

[이건 거의 제국에 맞먹는 다양성 이군요. 이런 변방 행성이…….]

[역사도 얼마 안 되는,그것도 표 면과 이면이 나눠진 행성에서 발달 할 수준이 아닌데? 그 대마법사 아 무래도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한 것 같아.]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다운로드 를, 심지어 수많은 사람들한테 전파

까지 하는데 성계신이 놔두는 건 이 해가 안 되는군요.]

뭔가 자기들끼리 수군수군거리지만 이내 흘려넘기고 율을 바라본다.

“혹시 그중에서 율 님이 가르쳐 주 실 수 있는 이능이 있나요?”

“선별사는 가르침을 내리지 않습니 다. 새로운 세력을 만드는 것은 선 별사들의 기본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니까요. 대신.”

“대신?”

의문을 표하는 내 손등에 율이 손 을 얹힌다.

응!

가벼운 울림과 함께 손등 위로 육 망성이 그려진다.

“이건?”

“일종의 자격증입니다. 신분증이기 도 하고요. 대하 님은 알 수 없을 테지만 그 문양에는 꽤 많은 정보가 담겨 있거든요.”

왠지 모르게 우줄해하는 율을 두고 왼쪽 손등을 내려다본다. 육망성은 마치 파스텔로 그린 듯 뿌연 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네 번째 꼭짓점 에는 보랏빛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꼭짓점에는 녹색 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숫자 27이 쓰여 있다.

‘재능의 증명인가.’

다만 다행인 게 있다면 신성력에 대한 표시는 없다는 것이다. 율이 빼준 것인지,아니면 상정 외의 상 황이기에 표시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귀찮은 일이 적을 것 같 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든다.

“그런데 실력이 아니라 재능을 증 명으로 삼는 겁니까?”

“하하! 물론 아닙니다. 지금 보이 는 색은 대하 님과 선별사만 알고 있는 것이고 이제부터 거기에 깃들 색은 직접 쌓은 경지에 대한 것들이 표시되게 되죠. 물론 그마저도.”

팟.

율이 내 손등을 툭 치자 육망성이 사라진다.

“직접 보이고 싶을 때에만 표면으 로 드러나게 될 겁니다.”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이가에 이런 육망성을 새기고 다니는 녀석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기능이다. 1,100만 정 도 되는 능력자들 중 선별자가 47 만 명이나 된다는데 이가에 한 명도 없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니 까. 아마 다들 숨기고 다니는 상태 일 것이다.

“아,물론 대하 님의 [별]은 그중에 서도 특별합니다.”

“특별대우인 겁니까?”

“네. 당신에게는 그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선별사인 제가 판단했으니까 요. 아까 제게 이능을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으셨지요?”

가져온 가방을 챙긴 율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은 은한 미소가 맺혀 있다.

“그게 대답입니다.”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 정이군요. 너무 태연해서 잊고 있었

는데 표면 세계 사람이 맞긴 맞아 요.”

‘두 자리 수 [별]을 받고 이런 반 응이라니’라며 잠시 허탈한 웃음을 짓는 그였지만 이내 자세를 고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모든 게 생소할 겁니다. 표 면 세계에 살았던 당신에게… 이면 세계는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는 수 라장처럼 보일 테니까요.”

그의 말대로다. 당장 나만 해도 단 지 건방지게 굴었다는 이유 하나만 으로 살인을 하려던 망나니들과 만 난 것이 바로 얼마 전이 아니던가? 법과 질서가 살아 있는 사회에서 살

던 표면 세계의 인간에게 이면 세 계,어나더 플레인은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던 것 이다.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은……

율은 나를 보며 말했다.

“범인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나 가지만,영웅은 그 세상을 변혁시키 고 이끌어 나가지요.”

“…저보고 영웅이 되라는 건가요?”

“소망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가느다란 실눈을 부드럽게 휘어 사 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그려낸 율이 말한다.

“모쪼록 인류의 수호를 위해 힘써 주시기를.”

딸깍.

율이 나가고 나는 잠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율이 밖으로 나갔음에 도 딱히 날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 다. 다만 궁녀들과 능력자들이 바쁘 게 돌아다니는 걸 보아 이가에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생긴 분위기다.

“나 참 어쩌라는 건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곳 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가 없는 상황.

그런데 그때,불현듯 손등이 뜨거

워지기 시작하더니 내 눈앞으로 무 언가가 떠올랐다.

-미션 시스템에 접속하신 것을 환 영합니다.

-현재 등급: 튜토리얼

-넘버 확인 중… 확인되었습니다.

27.

-담당자: 율

-현재 접근 가능 영역: 신. 영. 응. 체.

너무나 뜬금없는 등장과 내용에 신 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함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 니까?]

어? 이 텍스트……

당황해 버벅거린다. 그저 눈앞에 뭐가 나타났다고 놀라는 것이 아니 다. 고작 그런 걸로 놀라기에 요 반 년간 너무 험난한 삶을 살았으니까. 내가 놀라는 건 조금 다른 부분이 다.

“이건.”

텍스트의 내용 따위에는 관심 없 다. 오히려 내 신경을 잡아 끈 것은 텍스트의 색감과 투명도,그리고 글 자체와 줄 간격 등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나에게 있어 너무 나 익숙한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24시간,언제나 봐오던 문자 배열.

그것은.

“이거 내 거잖아?”

내가 평소 봐오던 칭호에 사용되는 문자들이 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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