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
“잠깐! 잠깐만!”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있는 지구상 의 유일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정말 역시 이렇게 되고 말았 잖아!”
나타난 것은 작은 소녀였다. 굳이 나이를 말하자면 대략 중학생 정도 로 짐작되는 어린 소녀.
그녀는 마치 보람이처럼 귀여운 외 모를 가진 미소녀였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큼 밝고 귀여운,그러면서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성숙함과 현기를 함 께 품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군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의 정체를 눈치 첸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계신인가.”
“넌 조용히 있어봐. 아 정말 어떻 게 해야 하나. 이거 완전 개판이 네… 아니,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 고 내 별에서 선천신족(先天神族)이
두 명이나 태어났지?”
‘두 명?’
내가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성계신 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 다보았다. 마치 귀찮지만 처리해야 만 하는 민원을 받은 공무원 같은 표정이다.
‘다행이군.’
그리고 그 모습에 안도감이 밀려온 다.
여러 번 말하는 바이지만 신성에 취한 [나]는 딱히 사악한 존재가 아 니다. 약간 결벽증 증세가 있고 난 폭한 기질이 있을 뿐 오히려 선량하
고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 존재.
그러나 선량한 사람이라고 몸에 달 라붙는 벌레에게 꼭 자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벌이 팔을 쏘아붙인 후 날아간 것 도 아니고 그 위에 앉아 있는데 그 걸 내버려 둔다면,그건 선량한 게 아니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 다. 마찬가지로 신성에 취한 [나]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하찮은 존재들 을,그것도 도망갈 생각조차 안 하 고 어쩌면 계속해서 덤벼들지도 모 를 벌레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 다. 조금만 힘을 쓰면 그들을 모조 리 절멸(絶減)시킬 수 있는데 가만
히 놔둘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문제는 격(格).
신성에 취한 [나]는 인간을 동급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성계신이라면… 지구상에 서 유일하게 [나]와 동급. 아니,그 이상의 존재야.’
성계신은 흔히 대우주에서 가장 [흔한] 언터쳐를이라 불리는 존재.
그러나… 흔하다는 게 약하다는 뜻 은 아니다. 아니,오히려 성계신은 언터쳐블(상급 초월자) 중에서도 아 주 강력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
전투에 특화되지 않아 흔히들 중급
초월자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고들 판단하지만 그건 정말 단순한 시각일 뿐. 창조신의 위계(位階)를 가지고 있어 [신]으로서의 거의 모 든 권능을 다 가지고 있는 성계신은 드넓은 대우주에서도 손에 꼽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아… 이거 기술 문명이… 아니야. 이건 외부에서 들어온 힘이라고 해 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지,원래 품고 있던 가능성이니……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 이며 중얼중얼거린다. 그리고 그러 다 획!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노 려본다.
핑!
순간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마치 더듬이처럼 빳빳하게 몸을 일 으킨다.
“이압! 사명 레이더!!”
삐비비!
일어선 머리카락이 진동하면서 그 곳으로부터 뭐라 표현하기 애매한 파동이 퍼져 나간다. 파동의 간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짧아진다.
그리고 그 간격이 0에 수렴하는 순간.
명!
무슨 전자레인지 알림을 같은 소리
와 함께 진동이 멈춘다.
“으앙! 정명(正命)하다니!”
성계신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목 격한 듯 절망적인 표정으로 털썩 주 저앉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나]는 그 광경을 그저 가만히 내려 다보고만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뭐?’
잠시 내면으로 가라앉았을 뿐 여전 히 녀석과 의식을 공유하는 나는 [내]가 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니,아니다. 사실은 모르겠다.
[내] 생각이 머릿속으로 전달이 되 었는데 이해가 안 된다.
‘야. 아,아니지? 내 착각이지? 이 거 뭔가 혼선이지?’
녀석에게 들리길 바라며 소리친다.
‘멈춰! 그만둬! 이 미친놈아r
그러나 내 비명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너.”
[나] 놈이 말하고 말았다
“내 아이를 낳아라.”
끔찍한 정적이 사방을 뒤덮는다. 성계신,그러니까 중학생 정도의 외 양을 가진 소녀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말한다.
“아,너무 빨랐나?”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 제야,미친놈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 힐 지경. 나는 전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이건 녀석이 학살을 저지 르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끔찍한 일.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럼 결혼부터 하지.”
‘육체의 통제권을 찾아야 해r
이를 악물며 정신을 집중한다. 그 러나 소용없다. 그저 술에 취한 것 만 같던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다. 녀석이 완전히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성계신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 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됐지만 나는 사모하는 남자가 있어.”
“양부(養父) 말인가… 그가 대단한
남자라는 건 동의하지만 그래 봐야 인간일 뿐이다. 우리같이 위대한 존 재라면 당연히 격에 맞는 상대를 만 나야지.”
거만한 목소리에 어이가 두개골을 열고 뇌를 탈출하는 것만 같다.
‘아니, 이 패륜아 새끼가 뭐라는 거야? 돌았냐?’
식겁하는 순간.
“미안하지만.”
성계신이 웃었다.
“너같이 천지분간 못 하는 애새끼 는 딱 질색이야.”
[나]는 태연한 모습으로 성계신을 바라보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렇지 도 않아 보이는 모■습이겠지만… 그 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나는 안다. 느낄 수 있다.
“어,흠.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 데.”
태연한 척하려 하지만 입술이 파르 르 떨리고 머릿속으로 유리창이 깨 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충격과 절망감이 몰아치는 게 느껴 진다. 심장이 쓰라릴 정도로 가슴이 아파온다.
“뭘 이해가 안 돼? 너 같은 애새 끼는 싫다고.”
“…어. 그,어.”
떠듬떠듬 중얼거리며 휘청거린다. 중급 신,그러니까 황제 클래스에 해당하는 녀석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성계신의 공격도, 뭔가 대단한 권능 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첫 실연(失懸)의 아 픔.
난 어느새 내 몸의 통제권을 되찾 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성계신이 소녀의 얼굴로 웃는다.
“아,우리 대하 정신 차렸구나?”
“우리 대하라니……
“헤헤! 우리 일한 씨 아들이잖아!”
“일한 씨……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한숨 쉰다. 중학생 꼬마로밖 에 안 보이는 애가 나를 남친 아들 취급하는 현실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처음 뵙겠습니다. 관대하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건방을 떨 생 각은 없다. 아버지와 썹(?)을 타고 있다는 점을 외면한다 하더라도 그 녀는 34지구의 문명이 탄생하는 순
간 태어나 수천 수만 년이 넘는 시 간 동안 인류를 수호해 온 신이었으 니까.
“그리고 감사합니다.”
“응? 뭐가?”
“제가 날뛰는 걸 막아주었으니까 요.”
농담이 아니라 레온하르트 제국에 서 했던 대학살이 또다시 반복될 뻔 했다. 백 번 양보해서 하워드 공작 가의 경우 미래의 적,그것도 강대 한 적이 될 게 뻔한 세력을 정리한 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지만 지구의 경우에는 그것조차 아니지 않은가? 그야말로 무의미한 학살을 저지를
뻔한 것이다.
“홈,그건 고마워해야 할 일이긴 해.”
“…보통 여기에서는 겸양을 보이지 않나요?”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성계신이 어깨를 으쓱인다.
“하지만 사실인걸? 사실 지금 내가 이렇게 나선 건 꼼수에 가까운 행동 이야. 너는 이 별에서 태어난 정명 자(正命子)이기 때문에 원래대로라 면 학살을 하건 외부 문명을 사용하 건 난 지켜만 봐야 한다고. 그나마 친부가 외계의 존재라는 걸 근거로 움직이긴 했는데 이게 자의적 판단
에 가까워서 꽤 부담이 된단 말이 야.”
꽤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대충 무 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좌자 녀석과 비슷한 경우인가.’
지닌 힘이나 수고가 문제가 아니 다. 성계신인 그녀 역시 신선인 좌 자처럼 지켜야 할 룰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사명을 마구 곡해한 좌자가 파멸에 이르렀듯 그녀에게도 지금 이 행위가 그리 좋지 않은 영 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뭐 그렇게 감사하다면 말이야…
부탁 하나 들어줄래?”
“부탁 말입니까?”
전지전능에 가까운 그녀에게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단 말인가? 의아 해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씨익 하고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라고 불러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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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한다. 순간 성계신의 모습에 [그네의 모습이 겹쳐진다.
‘으아,데자뷰가.’
나는 순간 떠오른 이미지를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하필 [그네도 성계신도 중학생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안 좋은 추억이 떠올라 버 렸다.
“그건 좀……
“흥,칫. 고맙다면서?”
“아… 음.”
잠깐의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고민 이 몰아쳤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인 다. 평소였으면 미친 소리 말라고 했겠지만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구의,심지 어 한국의 인간들을 학살하고 멘탈 이 나가 버렸을 테니까.
“어,어어……
입술이 부르르 떨리지만 할 때는 해야 한다.
“어,엄마.”
“어머---次!!”
순간 성계신이 다다다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는다.
“그래그래! 착하지,우리 대하!”
자그마한 소녀가 내 엉덩이를 토닥 토닥하는 느낌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든다.
“뭐 어쨌든.”
거기까지 한 성계신이 얼굴의 장난
기를 버리고 말한다.
“네가 지금 위험한 상태라는 건 알 지?”
“네.”
세레스티아에게 씌워준 빛의 왕관. 라에 모든 신성을 담아내고 떠나옴 으로써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는 신성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양아치 삼총사 녀석들에 게 공격당하고 내가 진심으로 [분 노]하는 것만으로 나는 하급의 신성 을 각성하는 게 가능했으며.
일단 하급이라도 신성을 각성한 순
간,[나]는 절대명령권을 이용해 저 먼 우주 너머에서 신성의 원천을 품 고 있는 라를 불러오는 것이 가능하 다.
“문제는 두 가지야.”
성계신이 오른손으로 V자를 그린 다.
“미약한 정신력과 허약한 육신.”
육신이야 뭐 할 말 없다지만 나름 대로 강철 멘탈이라 자부하던 나로 서는 꽤 억울한 평가. 하지만 명색 에 신이라는 존재가 하는 말이니 아 마 맞을 것이다.
“지금의 넌 공기가 가득 찬 풍선이 나 다를 바 없어. 바늘로 톡 찌르면 뻥 하고 터지지.”
“터진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신성이 터져 나온다고. 지금도 봐 봐. 부모형제가 눈앞에서 고문을 당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고 있던 상대한테 배신을 당한 것도 아 니고.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닌데 그냥 한 번 찔렸다고 바로 터지잖 아.”
나는 기습을 당했고 그 기습은 나 를 죽이기 위한 종류의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정말 위험했던 것은 아니다.
내 친부,기계신 디카르마의 딸이 라 주장하는 언터쳐를 하와는 나에 게 [적어도 목숨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한다] 라는 약속을 했다. 상급 초월자인 그녀의 약속은 그냥 약속이 아닌 반 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니 그녀의 방 어를 뚫을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나오지 않는 이상 내 안전은 보장받 았다고 해도 좋겠지.
어디 그뿐인가? 나에게는 나폴레옹 의 어빌리티도 있고 확인은 못 해봤 지만 [인류의 재앙]이라는 타이틀에
는 부활 효과까지 달려 있으니 그 어떤 기습,함정으로도 나를 즉사시 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 황이 죽지 않은 채 납치를 당해 봉 인을 당한다거나 하는 것이지만… 일이 그렇게 되면 내 전함,알바트 로스함과 그 위하 병력이 가만히 있 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양아치 삼 총사 녀석들이 나를 납치했을 때 알 바트로스함의 관제 인격인 지니가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출동시키 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참지 못했어.’
화가 났다. 어마어마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치욕스러웠다. 물론 그 게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 는 그것이 내 본연의 성정(性情)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원래의 나였으면 참았을 텐데.’
농담이 아니라 원래의 나는 평화를 위해 깡패들 다리 사이로 기는 행위 까지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데 지금은 어땠는가? 양아치 삼인방 이 날 죽이려 든 것은 녀석들이 말 종이기 때문이지만,동시에 내가 그 들을 도발하고 자극해서이기도 하 다.
내 자아(自我)는 이미 변질되었고, 또 변질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제가 두 가지인 만큼 방법 역시 두 가지야.”
“육체와 정신?”
“그래. 첫 번째 방법은 육체를 강 화하는 것이지. 외공(外功)이나 생 체력(生體方)을 단련해 육신이 세계 와 일치되는 경지에 이르면 신성의 범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 을 테니까.”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방법은 정신을 단련하 는 방법이지. 네 정신이 육체를 초 월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정신 그 스
스로가 신성을 이겨낼 수 있을 테니 까.”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본다. 뭐가 뭔지 전혀 감을 못 잡겠 지만,그럼에도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 다.
“잠깐. 잠깐만요.”
“응? 왜?”
“아니,흠. 그러니까. 그 [경지]라 는 게 대충 어느 정도인 겁니까?”
“뭐 그런 질문을.”
쯔쯔,하고 혀를 차며 그녀가 말한
다.
“당연히 초월지경이지.”
“하급이면 돼.”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