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Prologue. 어느 대마법사의 죽음
황금으로,보석으로 치장된 커다란 침대에 한 노인이 누워 있다.
너무나 늙어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외양이다. 바짝 마르고 건조 한 피부는 한 줄기 미풍에도 바스러 질 정도로 위태롭고 머리칼은 윤기 하나 없이 버석버석. 왜소한 팔다리 는 스스로 몸을 지탱할 수 없고 호
흡은 당장에라도 멎을 것처럼 불규 칙한 상태.
그렇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미르.”
“네,대스승님.”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노인의 상체 를 조심스레 잡아 일으켜 세운다.
번쩍!
,으음……
‘무슨 눈빛이……
‘이게 정말 죽어가는 사람의 눈이 란 말인가.’
침대 앞에 빽빽하게 도열해 있던
사람들이 움찔하고 몸을 떤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심지가 약해 벌어 진 일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삼대 마탑.
오대 무파.
칠대 가문.
세계의 이면(R面)인 어나더 플레 인 (Another Plane) 을 지배한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대한 세력 의 대표자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다.
뿐인가.
각국의 권력자,열광적인 지지와
피 끓는 원망을 동시에 받는 독재 자,세계적인 대부호,거대 종교의 지배자,악명이 자자한 테러리스트, 무지막지한 판매량을 자랑하는 밀리 언셀러,노벨상을 몇 번이고 받은 과학자,월드스타라 불리는 가수,할 리우드 최고의 슈퍼스타…….
그저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가 들썩일 스캔들이 될 정도로 화려한 면면들 이 어지간한 강당 이상의 크기를 가 진 침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밖]의 존재들은 모르지만,그들은 한 명 한 명이 무지막지한 이능을 가진 능력자들이기도 하다.
“빠짐없이… 모였군.”
“감히 누구의 명을 거역하겠습니 까.”
“그래. 맨날 자기들 멱살을 쥐고 흔들던 내 마지막 모습이라면 시간 을 내서라도 찾아올 만한 가치가 있 겠지.”
“대스승님•"…
대표로 그의 질문에 답했던 지고마 탑의 탑주,신인화의 얼굴이 안타까 움으로 일그러진다.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해 도… 그들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인 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한
초월자였다. 이면 세계를 만들어 도 탄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고 후진을 양성해 영능의 부흥기를 이끌어낸 인류의 수호자.
대마법사, 제논 호 키프리오스 (Zenon ho Kyprios).
초월자에게도 버거운 기적들이. 강 대하고 강대한 적들이. 참혹하고 막 을 수 없는 세월이 그를 할퀴고 물 어뜯어 이 꼴이 되었지만… 그는 긴 시간 동안 인류의 등불이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생명체 따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다.
“솔직히 준비가 완벽하다는 확신이
안 서지만… 더 미룰 수가 없군.”
한 번,한 번이 힘겨운 호흡을 고 르며 제논이 말한다.
“이제 내가 죽으면… 재앙이 시작 될 것이다.”
“스승님!”
“아,닥쳐. 나는 할 만큼 했어.”
모든 재앙의 시작은 400년 전의 대전쟁이었다.
언네 임 드 (Unnamed).
이름 없는 자,혹은 이름 지어지지 않은 자들이라 불리는 그 공포의 존 재들은 온 우주를 전란의 소용돌이 로 몰아넣었다.
전장(戰場)의 규모는 사실상 전 우 주
지금도 그렇지만 34지구는 당시에 도 3문명에 들어서 있지 못했다. 그 리고 3문명에 들지 못한 대부분의 문명들이 그러하듯 지구 역시 성계 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는데,그것은 지구가 외계(外界)의 존재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 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구는 전쟁에 휘말렸다.
수십 수백 개의 나라가 멸망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
갔다. [적]들의 직접적인 목표나 수 탈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음에도 이 지경이다.
‘정말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지.’
상급 신위에 창조신의 위계를 가진 성계신,가이아조차 언네임드의 공 격으로 살해(神殺)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물론 불사의 존재인 가이아는 몇 번 이고 다시 부활해 지구를 지켰지만, 그럴 때마다 점점 약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어 매일매일 인류 멸망의 공포를 느끼던 나날.
그 시절 지구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초월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살아남은 것은 그중 말석에 불과했 던 자신뿐일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쿨럭!”
“대스승님!!”
제논이 울컥하고 피를 토하자 놀란 인화가 별빛처럼 빛나는 기운을 일 으킨다. 그녀의 주변으로 수십 겹의 마법진이 떠오르며 공명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치료하지 마라.”
“하지만 대스승님!”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넌 동양
인이면서 노인 공경도 배우지 않았 냐?”
34지구에 살고 있던 초월자 중 유 일하게 살아남았다지만…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강대하고 강대한 저 주가 매 순간 그를 고통에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대마법과 기적으로 연명하고 있을 뿐 그의 몸은 이미 시체나 다 름없다. 오래 살아남으면 살아남을 수록 더 강렬한 저주와 고통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중.
때문에 그는 이미 100년도 전에 죽으려고 했지만.
‘예지 능력이 원망스럽군. 차라리
몰랐으면 곱게 죽었을 텐데.’
200년 전,고통에 지쳐 죽으려던 그는 미래를 보았다. 인류가 멸망하 고 34지구의 문명이 리셋 되는 광 경을.
그것은 대전쟁이 끝날 때 즈음 억 눌러 봉인했던 [언네임드]들이 부활 하며 벌어지는 미증유의 재앙이었 다. 그저 가능성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미래 인 것이다.
때문에 그는 준비했다.
세 개의 마탑을 세워 마법사들을 양성했다. 언네임드를 봉인하기 위 해 만든 어나더 플레인은 풍부한 마
나와 온갖 마법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가 넘쳐나 이능자들을 키 우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다.
하지만 실패.
다시 발동한 예지에서 멸망하는 인 류와 리셋되는 문명을 확인한 그는 또다시 준비를 시작한다.
지리멸렬하게 몰락한 무파(武派)들 을 되살렸다. 그들을 지원하고 결집 하게 만들었다. 사라진 무학을 복원 하고 그들이 순조롭게 성장할 환경 을 조성했다.
그래도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준비했다.
흑마법을 비롯한 온갖 비인도적인 기술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간 의 광기를 자극하고 또 그들을 지원 함으로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죽음과 공포,그리 고 시체들은 사악한 비술들을 무시 무시한 속도로 발전시킨다.
그는 키메라를 만들었다. 돌연변이 들을 양산했다. 악마를 소환하고 마 족들과 계약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존재하지 않던 강력한 인자를 생성해 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으 며,그것들로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초능력을 지닌 채 태어나는 일족을 만들어냈고,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
었던 무시무시한 괴물 역시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인공적인 영자기관 을 만들어 마법사와 무술가들에게 이식시키는 [시스템]을 완성해 내는 대역사를 이루었다.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선,그것도 타고난 연구자인 그가 전력을 다하 자 지구의 전력은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제논은 최후까지 미뤄두었던 방법을 사용했다. [외부]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는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접촉했 다. 지구의 문명은 아직 외부의 존 재들과 접촉할 수준이 되지 않았지 만 운명의 틀을 벗어던져 초월지경 에 올라선 그는 개인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가 그런 행 위를 함으로써 상위의 문명이 흘러 들어 을 위험이 있었지만,그런 위 험이 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는 없는 일.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해 통제했다. 특히나 과학기술은 철저하게 배제했 다. 가뜩이나 인류 멸망의 미래가 예지되는데 가이아의 가호마저 사라 지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34지구를 관광지로 조성하고 또 온갖 인력을 제공하여 게럴트를 벌 었다. 그리고 그걸로 더더욱 강한 장비와 시스템,더 높은 지식과 비 기(秘奇)들을 습득해 고위 능력자들 을 양성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바꿀 수 없 는 미래란 말인가?’
제논은 공포에 빠졌다. 파도처럼
닥쳐오는 매일매일은 그에게 있어 그저 절망일 뿐이다. 영혼이 변질되 고 깎여 나가는 끔찍한 감각이 초월 한 그의 정신조차도 좀먹고 있는 것.
오직 사명감 하나만으로,그저 인 류와 34지구를 지키겠다는 목표만 을 위해 견디고 있는 그였다. 그런 데 최소한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으 니 저주가 불러오는 자살 충동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
그런데 지난주.
느닷없이 미래가 변했다.
“대스승님. 당신이 없으면 우리 인 류는……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대스승님……
여기저기에서 울음 섞인 애원이 터 져 나옴에도 제논은 그들을 바라보 지 않았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한다. 조사하고 원인 을 규명하여야 한다. 대체 무슨 일 이 벌어진 것일까? 고작 일주일의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떤 특이점이 발 생하였기에 무쇠처럼 단단하던 멸망 의 미래에 균열이 생겼단 말인가?
그가 여태껏 쌓고 쌓아온 인류의 역량이 드디어 멸망을 이겨낼 수준
에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저 전설 에서나 나올 궁극의 용사라도 태어 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가 모 르는 다른 초월자가 지구에 눈독을 들였나?
그러나 제논은 생각을 멈췄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모두들 사전에 내려놓은 명령대로 움직여라.”
제논은 기나긴 시간 동안 인류를 성장시키며 그들에게 온갖 제약을 걸었다.
당연하다.
믿지 못하니까.
“대스승님,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해.”
거기까지 말한 제논이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힌다. 번뜩이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잦아든다.
“아… 너희같이 어리석은 머저리들 이. 너희같이 탐욕스러운 짐승들이 정말로 재앙을 이겨내고 미래를 마 주할 수 있을까. 이 절망적인 미래 로부터 인류를 지켜낼 수 있을까?”
아무도 그의 탄식에 대답하지 못한 다.
강대한 능력자들조차도 벌벌 떨 정
도로 강렬한 안광이 서서히 꺼져간 다.
“걱정이 된다.”
그리고 천천히.
“걱정이……
눈이 감긴다.
“대스승님!!!”
“아아… 정말로……
“맙소사.”
배경처럼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
그렇게 긴 시간 인류를 지키고,보 살피고,또 키워왔던.
그러면서도.
끝까지 인류를 믿지 못하던.
어느 대마법사가 죽었다.
Chapter 1. 최소가 초월자?
꿈을 꾼다. 그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과거의,그리고 어 딘지도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이 야기.
“당신은 누구세요?”
사랑스러운 소녀가 보인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세상 그 무 엇보다도 사랑스러웠던 존재.
좌악.
피가 된다.
“Hey〜 혹시 호위 같은 거 필요하 지 않나?”
상쾌한 미소가 어울리는 사내다. 너무나 많은 것을 나누어 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사내. 모두에 게 박해받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 던 밝은 영혼.
좌악!
피가 튄다.
“큭큭,네가 바로 그 [위대한 지혜] 인가. 이거 행운이로구먼! 헛소문이 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험상궂은 사내가 수백 명의 부하 앞에서 웃고 있다. 그들은 쓰레기. 욕망에 자신을 던져 버린 자들.
좌악!
피가 튄다.
“아아,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만 월이 가득한 평원 아래에서의 결투 라니.”
더 없이 선량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를 가진 아름다운 사내다. 그 야말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고결한 영혼을 지닌 자.
“그럼 싸워보도록 하지. 무한(無
限)의 학실•자(虐殺者)여.”
좌악!
피가 튄다.
“왜 저런 괴물들 편을 드는 거야! 너도 인간이잖아!”
“살려내. 살려내!! 내 동생을 살려 내란 말이야H!”
“우리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하겠노라.”
“왜. 어째서 이런 짓을……!”
“살려줘. 내,내가 이렇게 용서를 빌 테니……
“지옥에서… 기다… 리……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피눈물을 흘 리며 오열하는 사내,증오를 불태우 며 검을 휘두르는 여인,해일처럼 몰아치는 군대와 새하얀 머리칼의 노인들.
“죽어.”
“죽어라.”
“죽여 버리겠어어어어어!!!!!”
“반가워.”
“사랑해요.”
“망할… 자식.”
“당신을 만나지 말아야 했는데
피가 된다. 팔에 피가 튄다. 발끝 과 가슴에 피가 튄다. 셸 수도 가늠 할 수도 없는 시체와 죽음들. 탐욕 과 욕망,오해와 원망이 어우러져 구르기 시작한 피의 수레바퀴는 멈 출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돌아갔다.
나는 관찰자 시점에서 그것들을 지 켜보았다. 인간이 되었음에도 인간 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우주의 관리자가 상황만 된다면 악마보다도 악해지는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모습도,감정이랄 것이 거의 없었던 초월적인 존재가 기쁨과 슬픔,감동
과 공포,희망과 절망을 겪어가는 과정도. 그리고 마침내 거스를 생각 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창조자에 게 분노하는 모습까지도…….
사실,여기까지만 해도 너무 긴 꿈 이다.
인간으로 영락(琴落)한 친부가 살 아온 삶 중에서도 특히나 임팩트 있 는 몇몇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떠 오르는 것임에도,이미 악몽의 체감 시간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보 통 사람이 이만한 꿈을 매일같이 꾸 면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겠 지.
심지어 오늘은 그것으로 꿈이 끝나
지도 않았다.
절망에 울부짖던 친부의 모습이 천 천히 페이드아웃 되며,이번에는 파 괴된 도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꿈속임에도 신음이 절로 나오는 기분이다.
아이고,맙소사. 악몽을 다시 꾸게 된 것도 모자라서 플러스알파가 붙 었네.
과득!
그저 땅을 내디딘 것만으로 거대한 균열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간다. 그 규모는 실로 파괴적이어서 한순간 새겨진 균열의 길이가 무려 수십 킬 로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이어서.
균열이 하늘로 솟구친다.
그것은 단층(斷層)이다. 왕관의 거 인은 그저 대지를 딛는 동작 하나만 으로 지층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 당연하지만 그 위에 있는 도시 역시 버티지 못하고 뒤집힌다. 온갖 기술 과 마학으로 보호받는 도시였지만 신의 징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악! 살려줘!”
“대체! 대체 왜 라가 이런 짓을 저 지르는 거야?! 황금사자의 명령인 가?”
“황제 폐하! 제발! 저흰 아무것도 모릅니다!”
“안 돼! 안 돼! 칼리나!”
“어머니!!”
“으으•“…! 도시가!!!”
희생자의 수는 셀 수조차 없다. 이 미 파괴한 도시의 숫자가 세 자리 수를 넘었을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감히 가늠하기조차 두려운 수준. 탈 출하려던 수많은 함선과 비행선들이 파괴되고 강대한 전투 능력을 자랑 하는 능력자들 역시 하루살이처럼 죽어나간다. 신의 분노 앞에서,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특별함을 자랑
할 수 없다.
[아아,제국이…….]
그 광경을 직접 보고,또 간접적으 로 보조하고 있던 라에게서 울음이 나 다름없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무생 물임에도 자아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슬픔은 틀림없이 진실한 것.
그러나.
정원사가 정원의 잡초를 뽑아내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듯.
농부가 논에 살충제를 뿌리며 곤충 의 생명과 고통을 걱정하지 않듯.
[나]에게는 후회도 죄책감도 없다.
“고작 공작가 하나일 뿐이야.”
[하지만 왕이여.]
"라.”
나의 것이 틀림없음에도 너무나 이 질적인,차갑고도 오만한 목소리가 말한다.
-건방진 벌레 전체를 박멸하지 않 은 걸 감사해야지.
조용히 눈을 뜬다. 창문을 비스듬
히 빗겨 내려온 햇살이 두 눈을 은 은하게 데우고 있는 상황. 나는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잠시 그렇게 누워 있던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덥다.”
8월이다.
[좋은 아침입니다,함장님. 현재 시 각은 오후 12시 37분입니다.]
“아직 점심시간인가?”
[물론입니다. 저택에서의 식사 시 간은 11시경부터 1시 30분경까지니 늦지 않게 준비해서 식당으로 내려 가시면 되겠지요.]
“추천 메뉴는?”
[고용인들의 말을 단서로 판단할 때 햄버그스테이크에 참치 김치찌개 가 가장 나은 걸로 판단됩니다. 뭐 그래 봐야 제 요리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지만요.]
“레시피에 따른 합성 요리면서
[그렇다 하더라도 우주 최고의 맛 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건 명확한 진 실입니다. 영능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가장 이상적인 맛이지요.]
“…그래,훌륭하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함장님.]
뭔가 묘하게 뻐기는 음성을 들으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숲으로 둘러 싸인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지난 시간을 떠을린다.
많은 일을 겪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또 외계로 끌려가고. 그 리고 그래서 우주 전쟁을 겪고 포로 로도 잡혀보았다. 고문도 당해보고 적진에서 탈출도 해 보았으며 결혼 도 이혼도 경험했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저 광활한 대우주에서도 [제국]이 라 인정받는 거대 세력의 황제가 되 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고작 반년 만에 일어 난 일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 다.
원래 시간이라는 게 부피보다 밀도 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파악한 듯 머릿속에 새로운 음성이 울린다.
[사실 진짜 반년은 아니지.]
"왜?”
[아스트랄계와 물질계는 시간의 흐 름이 다르니까.]
“하긴 그런 말도 있긴 했지.”
드넓은 대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만 들어진 아스트랄 드라이브는 우주선
전체를 물질계가 아닌 아스트랄계로 이동시켜 작동한다. 광속이라는 [물 리적인] 한계를 물질계를 벗어남으 로써 수백 수천 배 이상 초월하는 것!
그리고 물질계가 아닌 아스트랄계 의 시간 축은 물질계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우주선 내부에 존재하는 마 법기,[시계추]에 의해 조율되기에 일정하게 유지되기는 하지만 비율이 차이 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덜컥.
창문을 연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진 창문은 고풍스러운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범한 물건이 아닌지 그 안에 거대한 힘이 흐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건물 전체를 휘감는 마법 회로가 있는 건가? 레온하르트 제국의 물건 들과도 전혀 다른 방식이네.’
당연하지만 레온하르트 제국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 역시 제3문명에 들어선 레온하르트 제국 은 마법과 과학을 적절하게 섞은 마 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나타나 는 차이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대부 분의 경우 마법보다 과학이 경제적 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별다른 기 계장치 없이 건물 전체에 마법을 때
려 박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저기 대하.]
그리고 그때 아레스가 묻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표정 이 안 좋은데.]
“오.”
나는 놀라서 휘파람을 불었다.
“걱정해 주다니. 착하구나,우리 아 레스.”
[뭐,뭐라는 거야,미친놈이!]
발끈하는 녀석의 반응에 웃으며 내 칭호를 확인했다.
[인류의 재앙]
-사망 시,〈1>회 부활 가능.
-반경 10킬로미터 내 인간에게 〈5>회 공간 이동 가능. 모든 방해를 무시하는〈절대 이동〉효과.
-1,000명의 인간을 살려줄 때마다 부활 스택(stack) 1회 충전(최대 2 회)
-악인을 1회 살해할 때마다 이동 스택 1 충전(최대 10회)
-당신은 누군가의 아버지를 죽였 습니다. 어머니도 죽였지요. 딸도, 아들도,노인도,아이도,가리지 않 고 학살했습니다.
100만 명이 넘는 인류를 학살한 당신. 끝없이 회개해도 모자랄 것입 니다.
밤에 잠은 잘 오십니까?
“이 텍스트는 대체 어떤 놈이 쓰는 거야……
어떤 존재를 살해하면 슬레이어 칭 호를 획득한다. 그리고 살해를 계속 해 그 숫자가 100을 넘어가면 사냥 꾼 칭호를 얻을 수 있다. 과거 파리 사냥꾼을 얻은 나는 파리를 천 마리 이상 죽여본 뒤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 보고 파리 사냥꾼이 살해 칭호의
끝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아니었어. 1만 개체가 넘 는 살해를 완수하면 학살자 타이틀 이 생겨나니까.’
그리고 그마저도 끝이 아니었다.
1만,10만을 넘어 마침내 100만에 이르자 [재앙] 타이틀이 나오게 된 것. [살해자] 칭호는 살해 횟수가 100배 증가할 때마다 강화되었던 것이다.
다만.
“하… 100만 명은 무슨.”
쓰게 웃는다. 내가 살해한 숫자가 100만은 물론이고 1,000만 명도 넘
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신위에 취한 나는,그야말로 재 앙신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으니 까.
조금의 자비도,심지어 타오르는 증오나 광기조차 없이 나는 학살을 자행했다. 마치 수확물에 농약을 뿌 리는 농부처럼 그 작업은 무덤덤하 기만 했다.
‘학살의 [경험]은 예전부터 많이 꿔 왔지만……
그러나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항 상 꿔오던 악몽은 아무리 강렬하고 생생하더라도 남의 경험일 뿐이었으 니까. 그 엄청난 감정과 기억의 폭
풍에 휩쓸리는 감각 때문에 고통스 러을 뿐 남이 지은 잘못에 대신 죄 악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것은 오롯한 나의 죄악 (罪惡).
이 학살은 내가 나의 의지로 실행 한 것이다. 물론 그때의 난 제정신 이 아니었다지만… 이걸 부정한다는 건 술에 취해 사람을 죽이고 자신은 무죄라고 우기는 얼간이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겠지.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트라우마가 없다. 심지어 죄책감 조차 희미해.’
어릴 적 친부가 인간으로 영락해 벌어진 일들을 악몽이라는 형태로 경험했을 때 내 정신은 거의 박살나 다시피 했다.
나는 밤마다 울었고 비명을 질렀 다. 물론 내가 경험한 수백 년의 시 간과 다르게 현실에서 꿈을 꾼 기간 은 훨씬 적었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심리적인 타격은 엄청나 다는 게 중요하다. 내 자아는 대부 분 그 악몽 때문에 뒤틀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내가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 을 단지 자각하고 있을 뿐 스스로를
자책한다거나 하는 마음이 매우 희 미하다. 속죄 따위는 생각조차 없다.
“하……
몸을 일으켜 옷을 입으며 한숨 쉰 다.
나는 이미 변했다.
돌고 돌아 드디어 지구에 돌아왔지 만,그 지구에 돌아온 난 이미 과거 의 관대하와 다른,신도 인간도 아 닌 어정쩡한 존재.
“이게 성장이라면 좋을 텐데.”
씁쓸하게 웃으며 문을 열고 경은의 [가문]이 제공한 방을 나선다. 목제 로 만들어진 복도를 지나자 계단 근
처에 시립해 있던 궁녀(宮女)가 꾸 벅 고개를 숙인다. 그 복장과 머리 스타일은 그야말로 사극에서나 보던 종류의 것이다.
‘요즘 세상에 궁녀라니. 무슨 궁궐 같군… 아니,실제로 궁궐이 맞긴 하다만.’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궁녀는 언제 나 그랬듯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 황. 그리고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 거린다.
‘어라?’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차분 했지만 그녀의 칭호는 다른 이야기 를 하고 있다.
[이 (李)가]
[3 레벨]
[긴장한 진영화]
‘긴장?’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칭호에 고개 를 갸웃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 가 나를 보고 긴장했을 리는 없다. 한때 인간 사냥꾼이라는 칭호로 나 를 멘붕에 빠뜨렸던 경은에 의해 초 대되었을 뿐 지구의 나는 배경도 뭣 도 없는 그냥 일반인에 불과했으니 까.
꾸벅.
떠나는 내 모습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궁녀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지상으로 5층. 지하로는 13층짜리 건물이었고 식당은 숙소 밖에 있었으니 일단 내 려가야 한다.
다만 특이할 게 있으니 승강기가 없다는 것이다.
‘통짜 목제 건물이라니 편의성은 대체 어디다 던져 버린 건지.’
투덜거리며 목제 계단을 내려가 숙 소의 근원(根源)이라 할 수 있는 강 녕전(康掌殿)에 도착한다. 신기한 것은 틀림없이 나는 3층에서 아래로
내려왔거늘 아래에서 보면 단층짜리 건물이 보인다는 것.
잠시 강녕정을 둘러보던 난 다시 발걸음을 옮겨 자갈이 깔린 마당으 로 나왔다. 이어 고풍스러운 디자인 의 문을 지나쳐 근사한 연못이 너머 로 보이는 경회루(慶會樓)로 이동한 다.
그리고 그 와중 마주친 궁녀의 수 는 무려 여덟. 모두 [긴장한]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지니,뭔 가 특이한 정보는 없어?’
[원격 도감청을 진행 중임에도 키 워드가 부족합니다. 다만…….]
지니는 놀라운 정보 수집 능력으로 저택의 모든 것을 파악했지만 그렇 다고 그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기술 문명보다 마도 문명이 더 발달 한 지구의 특성상 중요 자료를 인터 넷이나 컴퓨터에 보관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까.
다만 레온하르트 제국이 만들어낸 최신 관제 인격 중 하나인 지니는 그저 모른다고 이야기를 끝내지 않 는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긴 합니다.]
확실히 도착한 식당. 경회루의 분 위기는 기묘했다.
‘술렁이고 있네.’
며칠 동안 봐왔던 것과 똑같은 고 요였지만 저택의 사람들이 명백한 동요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긴장과 두려움. 흥분과 기대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감정의 소용돌이 다.
“햄버그스테이크로 주세요.”
“너는… 아,며칠 전 아가씨가 데 려온 아이구나. 반가워. 방에서 챙겨 먹었던 도시락하고는 비교도 안 되 는 걸로 줄 테니 기다려.”
식당 아주머니가 사람 좋게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햄버그스 테이크를 그릇에 올린 후 갈색 소스 를 뿌려준다. 궁녀가 돌아다닐 정도
로 모든 게 한식인 이 장소의 특수 성을 생각해 보면 이질적으로 보이 는 양식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아주머니의 요리 실력이 보통이 아 닌 듯 기분 좋아지는 향긋함이 콧속 으로 파고든다. 다만 문제는 그 아 주머니의 정체도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李)가]
[12 레벨]
[탐식아귀 하늘 입]
나는 슬쩍 칭호를 분류해 세부 정 보를 확인했고,그대로 그녀의 [종 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족이라니.’
어이없게도 식당을 혼자 책임지고 있는 살집 좋은 아주머니는 인간이 아닌 마족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곳 에 파고든 스파이 같은 건 아닌 모 양이다. 칭호를 구체화하면.
[대마법사 제논]
[12 레벨]
[붙잡힌 하늘 입]
라는 내용이 나왔으니까. 칭호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녀는 인간들에게 포획당한 상태인 것 같다.
‘아귀라면… 내가 봤던 최상급 마 족도 아귀였지.’
내심 기가 막혀 웃었다. 그러고 보 면 그 녀석 역시 대주술사 모르네에 게 패배해서 감옥으로 쓰이는 굴욕 을 당하던 상태가 아니던가?
아무래도 [아귀족]은 지닌 힘은 몰 라도 머리만큼은 그리 좋지 않은 모 양이었다. 이렇게 자주 잡혀 이용당 하는 걸 보니.
다음 화에 계속...
< 당신의 머리 위에 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