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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서, 인간으로서
“별로 오래는 아니었다.”
가벼운 목소리로 아담이 말했다.
“150년 정도.”
“…….”
너무 길다. 억 단위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왔을지 모를 아담은 그 시간을 그저 잠깐의 기다림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고작 20년도 살지 못한 내가 어찌 그 시간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것보다 더 짧게는 불가능한 거야?”
“된다면 내가 여기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지. 아까 네 의식이 현실로 부상했을 때처럼 잠깐잠깐 주도권을 찾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신성을 이겨낼 정신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궁여지책일 뿐이다. 다시 먹힐 테니.”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납득한 건 아니지만 일단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아무렇지 않게 뽑아낸 책 제목이었다. 미술관련 책자인가 싶었는데 막상 책을 펼쳐 보니 온갖 수식과 수십 장의 설계도가 들어있었다.
“미술서적이 아니라 인급 기가스 제조법이잖아…….”
투덜거리며 아무 책이나 뽑아 든다.
[축퇴로]
[스타게이트]
[시공제어기]
뒤적거린다. 별의별 제목이 다 보인다. 심지어 거기에는.
[제우스]
[토르]
[단군]
[아마테라스]
이런 익숙한 이름들도 있었다. 책을 펼쳐 보니 역시나 제조법과 설계도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것들 신급 기가스 맞지?”
“넘버링들 말인가? 설사 초월병기라 해도 기계문명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간다면 전부 이 건물 안에 있으니 놀랄 것도 없지.”
“마법이나 무공 같은 건 없어?”
“그건 다른 건물이야. 아까 오던 길에서 두 번째랑 네 번째 갈림길. 층을 올라가는 건 또 별개의 문제고.”
기가 막힌 공간이다. 그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지식들이 당연하다는 듯 책장에 자리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게 이능을 수련하는 자이거나 혹은 과학자라면 당장 죽어도 좋을 정도의 행복감을 느끼리라.
‘하지만 쓸모없지.’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서는 이능을 수련할 수도 없고 과학자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의 황제가 될 지경(?)에 처한 지금에 와서는 돈에도 큰 의미가 없다. 결국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단련이란.
우웅---!
파라락!
가볍게 정신을 집중하자 사방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책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새처럼 푸드덕 거리며 날아오른다. 도서관의 형태가 순식간에 흐릿해지고 주변이 하얗게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런 건 또 안 가르쳐 줘도 잘하는군.”
아담의 투덜거림에 대꾸할 정신이 없다. 왜냐하면 책을 한 권 한 권 꺼내 읽는 대신 도서관 전체를 관조(觀照)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世界) 그 자체.
책을 펼쳐 하나하나 읽는 것이 지식의 습득이라는 요소에서는 더 유리하겠지만 지금의 내가 그럴 이유가 없다. 나도, 아담도 그런 존재가 아니니까. 우리는 단지 세상을 지켜보고,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을 그 안에 품어야 한다.
“아담.”
“친한 척하지 마라.”
갑자기 또 틱틱거리는 아담의 모습에 웃는다.
“이름을 부르는 게 싫다면 침착맨이라고 부르지.”
“침착맨?”
“밖에서는 미쳐 날뛰던 녀석이 여기에서는 침착하잖아?”
장난스러운 내 발언에 아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너는… 후우, 맘대로 해라.”
“역시 침착하군.”
“…….”
이제는 아예 대답하기를 멈춘 녀석을 두고 다시 정보의 홍수에 직면한다. 아주 잠시 동안만 노출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머리가 어질어질한 수준.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내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며 막대한 힘을 품는다. 나의 세계가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서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함정이다.’
물론 나를 해치기 위한 함정은 아니다. 조금 특이할 뿐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한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었으니까.
기계신이라 불리던 디카르마의 본질은 정보와 문명의 신.
세상 모든 정보가 집중된 아카식 레코드는 그의 힘을 이은 나를 훈련시키기에 최상의 환경이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나는 단련되고 성장하겠군.”
“그렇다.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안에서 스스로의 정신을 완성시킨다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세계의 법칙에 관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이 아담이 이곳에 갇혀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였다. 비록 현실에 관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하늘도서관에 장기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한 이능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제한적이고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지금처럼 아예 아카식 레코드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신들조차 누리기 힘든 특혜인 것이다.
확실히 이곳에서 수십 수백 년 이상 머물게 되면… [정보와 문명]이라는 특성을 물려받은 나는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담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아, 그래.”
“…뭐냐, 그 반응은.”
“흐음~ 뭐 그냥.”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몰아치는 정보의 파도를 무시한 채 생각을 정리한다.
“침착맨.”
“…그냥 이름을 불러.”
“후후, 그래. 아담. 너는 하와가 왜 내 목숨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는지 알아?”
내 질문에 아담이 쓴웃음을 짓는다.
“흥. 아버지의 존재감을 가진 너에게 정신을 못 차리고 홀려서 그렇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녀석만 아니었으면 네가 여기에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하와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황태자 녀석이 노링턴 대장군을 데려왔을 때 나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냥 그녀가 바보라서 그랬다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아직 신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나조차도 말을 할 때 한 번 더 생각한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감정에 취하기 쉬운 그 순간에조차 내가 해야 할 맹세를 고쳐 말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와가, 상급 언터쳐블로 몇 억의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적어도 목숨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함부로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열쇠라는 규격 외의 아이템을 봉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냥 협박 정도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굳이 목숨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던 것이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나는 골칫덩어리였을 거야. 인간들의 손에 죽는 것이 최선이었겠지.”
몇 번이고 [문]을 열어 전지의 영역에 발을 걸쳤던 만큼 [리전]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존재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심지어 광기에 빠져 미쳐 날뛰던 현실의 아담조차 단지 나에게 증오심을 보일 뿐 털끝만 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나 디카르마의 위(位)가 가진 특성은 자아(自我)를 가진 기계들에게만 한정되어 발휘되니… 재수가 없으면 뒷골목 인생의 칼침 한 번에, 저격수의 탄환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심지어 내가 도착한 레온하르트 황실이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죽을 확률이 마구 치솟았다. 농담이 아니라 그녀의 입장에서는 나를 방치하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와보다 더 강력한 네가… 정확히는 신위에 먹힌 네가 내 목숨을 노렸어. 그녀의 약속은 스스로의 목숨까지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던 거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내 목숨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이런 불분명한 약속은 신으로서 절대 피해야 할 종류였는데도 그녀는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
“그래. 왜냐하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야.”
“…무엇을?”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급의 신성, 하급의 신위, 그리고 필멸자의 격.
이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상태다. 존재할 수 없는 기형적인 사례였다. 아카식 레코드 어디에도 이런 상태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 정도라면 그 희귀함을 이해하기 쉬울까?
그리고 이런 특수한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에는 하나의 조건이 존재했다.
“설마.”
“그래. 바로 인간의 육신이다.”
사실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최상급 신들 중에서도 특별한, 절대신에 가까운 존재였던 디카르마가 어찌 자손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건 태초부터 신의 육신을 타고난 짐승신이나 인격신들이 자식을 낳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신체였던, 더불어 강력한 위(位)를 가진 디카르마가 혈육(血肉)을 만든 것이다.
“단지 죽는 것만으로… 완성된다고?”
“육신의 제약을 초월하게 되는 거지.”
만일 인간으로서의 내가 죽게 된다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부활(復活)할 것이다.
신으로서의 재탄생이다.
“맙… 소사.”
내가 말하는 바를 깨달은 아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그의 생각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질투하고 분노하는군.’
이해는 간다. 그는 디카르마를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 디카르마가 소멸해 리전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지키고 이끌어 온 우주의 적들과 싸워온 그에게 갑자기 나타난 내가 어찌 좋게 보이겠는가? 그건 내가 선천적으로 리전들에게 호감을 받는 존재라는 것과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나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느낀다 해도 분노와 질투를 동시에 느끼는 게 오히려 정상인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거대 기업의 회장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있던 아버지가 죽으면서 망할 뻔한 회사를 양아들이 수습해 망하지 않게 만들었더니 갑자기 존재조차 모르던 친아들이 튀어나와서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가져가겠다는 상황이다. 화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이런 걸로 원망받자니 억울하군. 차라리 포기할 수 있으면 좋겠는… 포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
“…어?”
고개를 돌린다. 어디에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뭐냐.”
난데없는 내 움직임에 아담이 의문을 표했지만 그의 말에 대답할 틈도 없이 마치 물결치듯 세상이 일렁인다.
촤악.
순식간에 배경이 변한다. 마치, 생생한 꿈을 꾸다 단박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각. 그리고 그렇게 깨어난 나는 내가 옥좌(玉座)에 앉아 수천 명의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맙소사. 이 자식.’
그리고 몰아치는 기억을 받아들이며 눈살을 찌푸린다.
‘추진력이 너무 엄청나잖아.’
그것은 즉위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