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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결혼식
“…이 바보 멍청아. 지금 문제는 내 목표가 아니라 바로 너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리면 너와 나의 계약을 지킬 수가 없단 말이야.”
“어째서?”
“그야 이대로 가다간.”
시름 깊은 목소리로 세레스티아가 내 가슴팍에 속삭인다.
“이대로 가다간 네가 제국의 황제가 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나는 제국에 단 네 명밖에 없는 공작 중 세 명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고 뭔가 특별한 능력을 보인 것도 아닌,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 압도한 것. 그리고 이것은 그들과 싸워 이긴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만약 어떤 강자가 나타나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해 공작들을 이겼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단지 그뿐이다.
공작이라는 자리가 가진 진짜 힘은 스스로의 무력이 아닌 세력.
결과적으로 살아남아서 세력을 휘어잡은 존재들이 초월자인 거지 단순히 그들보다 강하다고 그들 위에 설 수는 없다. 한국 대통령을 주먹다짐으로 이긴다고 대한민국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사 공작 중 무려 세 명이나 반항할 생각조차 버린 채 나를 인정했다. 이는 그들이 본 [나]라는 존재가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세력]을 압도할 만한 강자로 보였다는 뜻이다.
‘결국 힘인가.’
나는 우주에 나와 제국이나 귀족, 황족 같은 개념을 보며 황당해했다. 대우주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 드높은 문명을 이룩했음이 틀림없는 대우주의 세력들이 왜 지구에서조차 옛날에 버린 왕정제를 유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답이 바로 힘.
개인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일개 개인이 그가 속한 문명 자체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의 틀과 룰, 법률로 묶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지금 공작들은 나를 그런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그래서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고 세레스티아는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레온하르트 황가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닌데?”
“대신 지금 이렇게 결혼식을 올리고 있지.”
즉 명분은 충분하다. 말은 좀 나올 수 있어도 어차피 황제가 죽은 지금 실권을 공작들이 콱 틀어쥐고 있으니 무마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러나 순간 인상을 찡그리던 하워드의 얼굴이 떠오른다.
‘과연 그 의견에 모두가 동의할까?’
상황이 웃기게 되었다. 나는 황녀인 세레스티아와 혼인했으면서도 완벽한 귀족파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이미 황제파의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황태자를 엿 먹이고 그를 지지하던 강대한 초월자 노링턴 대장군을 해치운 상황이니만큼 황제파 녀석들이 나를 향해 이를 득득 갈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 거기다 더해 지금 이렇게 귀족파를 등에 업고 나타났으니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뭘 어떻게 봐. 황가의 적으로 보겠지. 물론 지금 당장이야 명분도 없고 힘도 부족하니 가만히 있겠지만.’
사 공작 중 무려 세 명이 나와 세레스티아의 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고 대회의 때문에 모여든 귀족이 천 명이 넘는다. 어디 그뿐인가? 이러니저러니해도 나와 세레스티아의 결혼은 죽은 전대 황제가 승인한 사항이니 그걸 막을 명분이 없다. 우리가 아무 힘도 없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찌 이 결혼을 막을 수 있겠는가? 황제파에는 근위기사단과 7대장군이 있다지만 그들은 명분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결국 다음 기회를 보겠지.’
중얼거리며 세레스티아를 본다.
“흐음. 좋아, 그럼 이제…….”
“이제?”
약간 기대를 담은 세레스티아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웃는다.
“이제 어떻게 하지?”
“…….”
환한 미소에 금이 간다. 슬쩍 내려다보니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로서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다.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냐. 그때는 말하자면… 만취 상태 같은 거였거든.”
“마, 만취? 만취 상태로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렸다고? 지금 전개가 너무 급작스러워서 내가 10년 동안 해온 준비를 하나도 활용 못 하고 있거든? 우리 애들은 아직도 데트로 은하 연합에 대기 중인데 만취?”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는다. 나도 이게 황당하게 들릴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게 사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때, 그러니까 [신성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짓 때문에 제일 난감한 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마치 술 취해서 깽판 친 다음 날 후회하는 취객 같은 꼴이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을 연 상태의 [내]가 멍청할 리는 없기에 당연히 대책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문제는, 그 대책이 지금의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이겠지.
와아아아아--!
순간 계속해서 들려오던 환호성이 한층 더 커진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제단의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호호, 두 분 다 웃으세요. 이 모든 장면이 촬영되고 있으니까요.”
제단의 꼭대기에 도착하자 단아한 이미지의 비단옷에 검은 머리칼을 높이 땋아 올린 미녀가 우리를 반긴다. 사 공작 중 하나이자 일음(日陰) 정가(在家)의 가주, 정유리였다.
“정 공작이라고 부르면 됩니까?”
“후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니아니, 셀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상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요.”
“…….”
화사하던 미소에 쩍 하고 금이 간다. 아무래도 이런 식의 호칭을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었는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굳이 그걸 더 따지지는 않았다.
“…두 분이서 맹세의 키스를 나누시면 결혼이 완료됩니다.”
“과정이 매우 짧군요.”
반색하는 내 모습에 유리가 웃는다.
“후후, 그런 걸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쓸데없는 과정을 빼버렸거든요.”
사실 그보다는 나와 세레스티아의 가정 형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황성의 결혼식은 세력과 세력의 결합인 경우가 많은데 지금의 경우 나도 세레스티아도 데려올 가족이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둘 다 고아로 보이겠군.’
세레스티아의 경우 친모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친부는 바로 얼마 전에 테러를 당해 사망했다. 내 경우에도 태어날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태이고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있지만…….’
그러나 이런 자리에 어떻게 그를 데려올 수가 있겠는가? 수천 광년 떨어진 거리도 문제지만 이혼이 약속된 결혼을 굳이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번쩍!
빛이 터져 나온다. 거슬리거나 눈을 못 뜨게 하는 그런 공격적인 빛이 아니라, 뭔가 주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 같은 포근한 빛.
고개를 슬쩍 들어보자 제단의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인공 태양이 한층 더 밝아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오, 이것은-!]
[축복이다! 라의 축복이야!]
여기저기에서 다시금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우리 앞에 있던 유리 또한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건… 의외로군요. 역대 황제 중에서도 라가 스스로 반응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좋은 겁니까?”
“아주 좋지요. 이 정도면 황제파가 시비 걸 엄두를 못 내겠는데요.”
만족스러운 표정의 유리가 나직하게 속삭이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자, 그럼. 신부 세레스티아 양은 신랑 관대하 군을 영원히 사랑하고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웃으며 묻는 유리의 질문에 세레스티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참 대단한 게 대답하는 얼굴에는 홍조가 어려 있고 목소리는 설렘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다. 정말이지 너무나 행복한 신부의 모습이라서, 한순간 사정을 아는 나조차 혹할 정도이다.
‘죄 많은 여자로구먼.’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남자가 그녀를 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상상도 안 간다. 그녀는 마치 땅 위에 내려선 별처럼 화려하게 빛나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좋군요. 그럼 신랑 관대하 군은 신부 세레스티아 양을 영원히 사랑하고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 했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세레스티아에 비하면 아무래도 모자라겠지만, 나 역시 연기는 꽤 자신 있으니 어색하지 않게 대답할 자신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그러나 대답하려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거 맹세해도 괜찮은 건가?’
신성을 얻은 자는 함부로 거짓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당장 하와만 해도 나를 지킨다고 말했다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내가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고 함께하겠다]라고 말해도 괜찮은가?
“관대하군?”
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세레스티아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마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는 10만 명의 하객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하늘에 떠 있던 인공태양이 한순간 더 밝은 빛을 뿌린다. 그 난데없는 기사(奇事)에 모두들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불러라.]
묵직한 목소리다.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한번 충성을 바치면 영원히 변치 않을 우직한 충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를 불러라.]
묵직한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모두 경악에 빠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눈앞에 있는 유리는 너무나 놀라 말조차 더듬었다.
“어, 어떻게? 아니, 어째서?”
있을 수 없는 모습을 봤다는 듯 당황한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다른 공작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귀족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라.”
[그렇다. 나는 라. 온누리를 밝히는 빛이자 영광.]
하늘에 떠 있는 인공태양이 서서히 수그러들더니 거기에서 밝게 빛나는 빛의 거인이 나를 향해 내려온다.
‘이건 또 특이한 형태로군.’
온통 빛으로 이루어진 라는 그 형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금속으로 만들어진 아레스와 다르게 [빛]이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은 모양새. 그는 가볍게 떨어져 내리더니 순식간에 제단에 도착했다.
쿵!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지만 질량이 없는 건 아닌 듯 녀석이 내려선 제단이 크게 울린다. 녀석은 내 앞에 내려서 한쪽 무릎을 꿇고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의 검이자 방패, 그리고 명예의 증거가 되리라.]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점점 더 크게 빛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눈부신 빛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머리 위에 환하게 빛나고 있는 왕관의 모습이 있었다.
[세상에… 태양의 왕관이야.]
[태양의 왕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니.]
[초대 황제 이후로 아무도 쓰지 못했던 태양의 왕관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온다. 물론 모두가 놀라고 기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째서… 어째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 위의 왕관을 바라보는 하워드의 모습이 보인다. 놀라 한 걸음에 제단 위로 달려 온 그였지만, 꽤나 상당한 거리에서 더 다가오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레스였다.
[내가… 내가 한눈팔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상황이 상황이니 좀 참아.”
[아… 내가 이런 놈을 믿고…….]
뭔가 미묘한(?)한탄과 함께 조용해진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잡담이었지만, 덕분에 모두가 충격과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세레스티아와의 결혼을 맹세합니다.”
“응? 아? 네? 아… 네.”
완전히 넋을 놓고 있던 유리가 허둥대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그럼 이제 결혼식은 끝난 겁니까?”
“아… 네. 그, 그럼 이것으로! 관대하 군… 아니, 관대하 님과 세레스티아의 결혼식을 마치겠습니다!”
내 재촉에 밀려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세상을 향해 공표하자 그 목소리에 내 머리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왕관을 보고 있던 십수만의 사람이 [라의 처소]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와 세레스티아는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