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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결혼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고요히 스코프를 들여다본다. 한쪽 눈으로 본 그 원 안에는 이제 제법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발의 소녀.
콰득!
불현듯 그녀가 엎드려 있던 소행성이 굉음과 함께 우그러든다. 그를 향해 저격총을 겨누고 있던 하와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결혼식인가.”
그녀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감정을 정리했다.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고 싶지만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언터쳐블이었지만, 다른 [은하]에 존재하는 존재를 읽어낼 정도로 강력한 인지능력을 가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약속 때문에…….’
그녀는 대하에게 [적어도 목숨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도 위험하지 않게 보호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가 아버지의 유품인 열쇠를 사용해서 자신의 안에 담긴 가능성을 깨울까 두려워 저지른 짓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대하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신혈을 깨울 수 있는 능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가 신혈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이상… 그녀는 그에게 절대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신혈을 각성한 그는 이제 그녀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명령을 내리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위험해.’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그를 버리고 우주 먼 곳에 숨어버렸을 것이다. 대하가 가진 혈통의 힘은 매우 기형적이기에 그녀가 숨어버리면 찾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체적으로는 행성의 중력조차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다. 대여섯 개의 은하를 가로질러 전혀 모르는 장소로 간다면, 그가 그녀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러니 결국 문제는 약속이다.
그녀는 그를 죽지 않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의 상태를 마크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언터쳐블들이나 넘볼 수 있는 상급의 신성을 가진 그이지만, 필멸자의 [격]을 지닌 인간의 육신은 단 한 발의 총알로도 죽어버릴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기 때문이다.
“코미디군.”
그렇다. 코미디다. 하나의 은하계를 비틀어 버릴 수 있는 최상급 신조차 손댈 수 없는 존재가 고작 뇌가 좀 파열되고 심장이 터지는 사소한(?) 타격만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그러나 쓴웃음을 짓는다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와는 우주를 날아다니는 소행성에 누워 대하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인정해야 했다. 상급의 신성, 하급의 신위, 그리고 필멸자의 격이라는 기형적인 상태가 그를 그렇게나 극단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에게 지배당하기도 싫고 도망갈 수도 없는 그녀는 다른 은하에서 저격 준비를 하고 있다 그를 공격하는 적을 요격해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
“죽여야 한다.”
“…한동안 말 걸지 말랬지.”
느닷없는 목소리였지만 하와는 놀라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심지어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 아담이 다시 말한다.
“죽여야 한다, 하와. 녀석을 죽여야 해.”
“시끄러워.”
“외면하지 마라. 지금 녀석의 저 기형적인 상태는 과정일 뿐이야. 아버지의 뜻도, 이상도 모르는 녀석이 아버지의 신위를 강탈해 가고 있다!”
디카르마(Dekarma)의 위(位)는 현재 공석이다. 디카르마가 사멸한 지 고작 400년. 아직 그 누구도 그의 자리에 오를 만한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주에서 그 자리에 가장 가깝던 존재는 바로 아담이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하와를 공격해 [깨뜨]려 버렸고 그녀가 수많은 조각으로 변해 우주로 흩어진 틈을 타 디카르마의 위를 조금씩 가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대하가 나타났다.
“혈육? 웃기지 마!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언터쳐블의 혈통은 뛰어난 재능과 영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당장 레온하르트 제국의 황족들만 해도 상급이나 중급은커녕 초월지경 자체에 드는 경우가 드물 정도가 아니던가? 상급 초월자인 황금사자신과 중급 초월자인 초대 황제의 피를 이었음에도, 심지어 혈통관리인의 역할을 수행한 좌자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그 정도가 한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급도 상급도 아닌 최상급 신이 혈육을 남기고, 그 혈육이 친부의 신위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심지어 [개념]을 지배하는 디카르마이기에 그의 육신은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했는데?
“죽여야 한다. 녀석을 죽여야 해…….”
숫제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아담의 모습에 하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수백 년간 겪어오고 있는 일이니까. 대화가 통하고 논의가 가능한 존재였다면, 자신을 깨뜨려 힘을 강탈한 주제에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그는 긍지로 똘똘 뭉친 존재였으니까.
‘한심하군.’
하와는 쓰게 웃을 뿐 더 이상 아담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쳐 날뛴다 해도 리전인 이상 대하를 공격할 수는 없다. 심지어 그 본인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죽여야 해.”
아담의 광기는 점점 더 짙어져만 갈 뿐이었다.
*
황족과 귀족들은 긴 시간 동안 혈연으로 엮여왔다. 역대 황제의 반려는 대부분이 귀족, 혹은 귀족이 주선한 상대였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있는 황족들은 대부분 외가(外家), 즉 어머니의 가문을 가지고 있는데, 황제파는 바로 이 가문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세력이다. 황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어 황제의 행사에 힘을 실어주게 된 것.
그리고 그들에게 세레스티아는 매우 이질적인 존재다.
‘왜냐하면 외가가 없으니까.’
그녀에게는 가문이랄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친모는 대가를 받고 전대 황제를 모신, 일종의 창부(娼婦)였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는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건너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쿵!
묵직한 발걸음이다. 그 정도 되는 경지라면 자신의 무게를 제어하는 것쯤 숨 쉬듯 간단할 터인데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족적이 남을 정도로 무겁게 걷는 것.
“하워드.”
“아는 녀석이야?”
“사 공작 중 하나야. 네가 못 본 마지막 공작이지.”
얼굴을 반 이상 가릴 정도로 덥수룩한 수염에 바위 같은 근육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사내는 실로 어마어마한 신장을 가지고 있다. 그저 단순히 큰 게 아니라 3.5미터가 넘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백곰인 천현일 소장보다 더 큰 존재였던 것.
그는 미리 준비된 커다란 의자로 가서 앉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워드 공작가]
[순기강체 하워드]
‘순기강체?’
무공관련 칭호 같기는 한데 내가 지금까지 봐온 무투형 초월자들과는 좀 다른 방식의 기세가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세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느낌. 다만 문제는.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루이가 저 녀석의 외손자니까.”
루이라고 한다면 현 황태자인 루이 레온하르트를 말한다. 나와 세레스티아가 황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 그녀를 납치하려고 했던 그녀의 배다른 오빠.
그러나 그가 잡은 절호의 타이밍은 나라는 존재로 인해 망해 버렸다. 일을 철두철미하게 처리하기 위해 대장군인 노링턴까지 데려왔는데, 그가 나를 지키던 하와의 손에 너무나 쉽게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노링턴에 대한 일을 알고 있을 수도 있겠군.”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아무리 막가기로 유명한 그라도 모든 귀족을 정면에서 짓누른 대영웅에게 거스를 자신은 없을 테니.”
“…….”
약간은 딱딱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세레스티아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 목소리가 환청이기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제단 아래에서 환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그때 옆에 서 있던 다이애나가 작게 속삭인다.
“이제 일어나셔서 나선형의 계단을 천천히 돌아 올라가시면 됩니다. 꼭대기까지 가실 필요는 없고 꼭대기 바로 아래 있는 단상까지만 걸어가면 되지요. 아,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안 된다면?”
약간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의문을 표하자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좀 더 환하게 웃어주십시오, 대하님.”
“…그러지.”
나름대로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레스티아 역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내 팔을 안아 든다.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나는, 액자로 만들어 팔아도 불티나게 팔릴 것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셀. 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하아…….”
그녀는 가볍게 한숨 쉬었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걸으며 저 아래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펄럭!
바람 한 점 없는데 세레스티아가 입고 있는 순백의 드레스가 펄럭이기 시작한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드레스 자체가 스스로 펄럭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풍성한 디자인임에도 무게감이 전혀 없게 만든다고 한다. 선계에서 직수입한 천으로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던가.
“너.”
그리고 그때 세레스티아가 물었다.
“어쩔 생각이야?”
“뭐가?”
“뭐가? 뭐가라고 했어?”
세레스티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스스로를 가다듬고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없어. 그렇다고 말하면 오히려 내가 양심도 없는 여자겠지. 지금 넌, 내가 평생에 걸쳐 이뤄내야 할 목표를 거의 다 끝내놓은 상태니까.”
“평생에 걸쳐 이뤄내야 할 목표가 뭔데?”
내 물음에 세레스티아는 대답하지 않고 내 품에 머리를 묻었다. 저 아래에서 [으아아]라든가 [오오오] 하고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셀?”
“…이 바보 멍청아. 지금 문제는 내 목표가 아니라 바로 너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리면 너와 나의 계약을 지킬 수가 없단 말이야.”
“어째서?”
“그야 이대로 가다간.”
시름 깊은 목소리로 세레스티아가 내 가슴팍에 속삭인다.
“이대로 가다간 네가 제국의 황제가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