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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결혼식
“글쎄. 무슨 말일까.”
피식 웃었지만, 사실은 약간 후회하고 있다.
‘평소라면 참았을 텐데.’
아무래도… 문을 연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한순간이나마 신이 되었다가 돌아온 것인데 여파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대하님.”
“친한 척하지 말고 일이나 해.”
“대하님. 오해입니다.”
나름 절박해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웃는다. 이 녀석도 밉상이다.
“오해는 무슨 오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할 일이나 해. 셀과 가까운 사이인 건 알지만… 너희는 너무 자꾸 선을 넘어.”
다시 짜증이 솟구쳐 오른다. 애초에 내가 그녀들에게 이런 원망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지금 같은 계약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 그녀들은 나에게 함부로 할 만한 입장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나는 황녀인 셀의 남편이 될 몸이고, 그녀들은 셀의 매니저이자 시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놓고 나를 도발하는 것은 나를 세레스티아에 비해 명백하게 모자란 존재로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이런 비천한 것들이?
파지직!
순간 눈이 번쩍한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금강저를 든 동민의 모습이 보인다.
“살벌하군. 심정은 이해하지만 진정해.”
“아… 음. 고마워.”
순간 차분해져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황금의 공주]를 실체화시킨 보람이 대기 중이었다.
“저기, 선배 괜찮아요?”
“아아, 물론이지.”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상태가 너무나 좋다. 온몸에서 힘이 넘치고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모든 것이 파악된다.
“용서를…….”
“용서를…….”
다이애나를 비롯한 코디네이터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그들의 안색은 너무나 창백해서, 마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고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다.
“…쯧.”
당연하지만 전혀 기꺼운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보기만 해도 불편해지는 광경에 가깝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유도한 광경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여파가 크군.’
들불처럼 끓어오르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지고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애초에 나는 뭔가가 맘에 안 든다고 길길이 날뛰는 성격이 아니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일정은 어떻게 되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답한다.
“즉시 움직이셔야 합니다. 저, 그리고.”
“됐어. 더 이상 감정 다툼하고 싶지 않으니 마무리나 해.”
“알겠습니다.”
코디네이터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등의 마무리 작업을 했다. 사고(?)를 친 레미조차 어떻게든 빗과 가위를 움직여 머리를 정리한다. 당장에라도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처럼 깨질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실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진다. 그게 [나]라고 하는 녀석의 성격이다.
“식이 열릴 시간은 정확히 언제지?”
“30분도 남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아침에 깨우려고 했었습니다만 황녀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건들지 말라고 하셔서…….”
“서둘러야겠군. 안내해.”
“알겠습니다.”
나머지 코디네이터들을 방 안에 남겨둔 채 앞장서는 다이애나를 따라 [별빛]의 복도를 걷는다. 보람과 동민이 자연스레 내 뒤에 서기에 슬쩍 속도를 늦춰 나란히 걷는다.
“그러고 보니 너희도 차려입었구나.”
의식하지 못했는데 보람과 동민 둘 다 근사한 디자인의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는 상태다. 신체 비율이 워낙 좋아서일까? 190에 약간 못 미치는 훤칠한 키의 동민도, 그리고 그보다 30센티나 작은 보람도 화보에서 갓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들이다.
“뭐 자리가 자리니 어쩔 수 없죠.”
“탈단족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옷이라더군.”
보람은 그렇다고 쳐도 동민 역시 매우 만족하는 분위기였기에 살짝 황당해하며 물었다.
“…너 명품 좋아하니?”
“세상에 명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
너무 당당하니 오히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이 녀석 학교 다닐 때에는 항상 말없이 분위기만 잡고 있더니 우주로 나와서 조금씩 성격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이쪽입니다.”
앞서 걷고 있던 다이애나가 복도 끝에 위치한 커다란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특이한 것이, 그곳이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사출구였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셀과 함께 별빛에 들어올 때 탔던 것보다 훨씬 큰 비행선이 있었다.
“뭐야, 나가는 거야?”
빌딩이라고 가볍게 말했었지만 세레스티아의 영지라고 할 수 있는 [별빛]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한 층 한 층이 어지간한 도시 규모에 육박하는데 그게 200여 층이나 되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농담이 아니라 이쯤 되면 이 빌딩 안의 공간만 다 합쳐도 작은 국가의 영토 이상이다. 이 정도 크기에 거주 인원도 많으니 그 안에 결혼식장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일. 때문에 나는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이 안에서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 앞에 비행선이 자리하고 있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이애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예. 결혼식은 [라의 처소]에서 하게 될 테니까요.”
“라의 처소?”
생소한 단어에 의문을 표하자 다이애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골든 로즈의 최정상입니다. 황제의 즉위식 때에나 개방되는 곳이지만… 일음 정가에서 의견을 피력하고 세 공작이 거기에 동의하면서 허가가 났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정유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여인의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별빛 진영에 속하게 되는 기념으로 저희 정가에서 결혼식을 준비해 드리겠어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빛나는 결혼식을 약속해 드리지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빛나는 결혼식인가.”
중얼거리며 비행선에 올라탄다. 세레스티아와 같이 타고 왔던 반중력 자동차와는 다르게 오직 비행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고 당연히 그 속도도 훨씬 빠르다. 구조를 잘 살펴보니 전투 기능도 있는 것 같았다.
우우웅---!
사출구가 열리고 비행선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복잡하군.’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서 완전히 난장판이다. 세레스티아와의 계약에 따라 조용히 결혼하고 얌전히 지내다가 아무 탈 없이 지구로 돌아가는 건 이제 꿈도 못 꿀 상황.
일이 너무 커졌다.
그냥 단순히 묻어가야 했던 내가 레온하르트 제국의 귀족들에게 너무나 선명한 모습을 각인시켜 버렸다. 무려 1,000명이 넘는 귀족들 전부를 압도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 안에는 제국을 이끄는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공작들마저 있었으니,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도 그걸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필…….”
나는 알고 있다. 이제는 나에게 굴복한 공작들이 그때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는지.
그들은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황족 자체를 없앨 필요는 없지만, 그 권한 대부분을 흩어 명예만 남길 생각이었던 것.
즉 황제파와 귀족파는 내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 와중 황제파는 황족이면서도 극히 이질적인 세레스티아를 미끼로 던졌고, 귀족파는 오히려 그것을 빌미 삼아 여론을 전환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내가 모든 판을 부수고 뒤엎어 버렸다.
공작들은 내 모습에서 과거 자신들을 이끌던 절대적인 강자, [황제]의 모습을 보았다. 그 혼자서 자신의 제국과 맞먹는 무력을 발휘하던 신적인 존재를…….
때문에 그들은 굴복했고, 너무나 쉽게 굴복한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황제파 역시 전쟁 준비를 멈추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다. 좋게 말하자면, 나라는 존재가 내전을 막아버린 것과 같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영웅적인 위업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지만.
“제길, 영웅적인 위업 좋아하네.”
그 영웅적인 위업 덕분에 나는 완전히 코가 꿰였다. 지금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세레스티아와 이혼하면 황제파와 귀족파가 ‘아 그렇군요! 남녀 관계가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라고 웃으며 보내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심지어 내 미래는 문을 연 상태에서도 예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앞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몇 가지 경우의 수는 보이지만 [나]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저기 선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요?”
보람이 혼자 암흑의 오오라를 뿜어대고 있는 내 모습에 황당하다는 듯 묻는다. 그리고 그때.
와아아아아-----!!
엄청난 고함 소리가 온 세상을 뒤엎는다.
“우왁?! 이건 뭐예요?”
“하객들입니다.”
“…엄청나군.”
동민마저 놀랍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내려다본다. 거기에는 수천, 수만, 아니, 십만 이상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금빛 태양 아래 그들 모두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 1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완전하게 수용해 내는 거대한 홀의 모습이다. 그 홀의 중앙에는 마치 제단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건축물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하늘에 떠 있는 금빛의 태양에 닿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제단의 정상 위에 떠 있는 태양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원래는 보이지 않아야 하지만, 나는 단지 차분히 집중하는 것만으로 그 태양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기가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신 라(Ra).’
그것은 초대 황제가 타고 다녔다는 기가스로 레온하르트 제국이 가진 유일의 신급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넘버링 중에서도 가장 강한 100위 안에 든다는 초월병기 넘버 92번의 신기답게 휴면 상태에서도 인공 태양이 되어 골든 로즈 전역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한눈팔지 마.]
머릿속으로 들리는 쀼루퉁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중얼거린다.
“화려하군.”
“근 100년… 아니, 300년간 있던 결혼식 중 제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사 공작 전원이 참석하고 오대 장군 중에서도 세 명이 참석했지요. 그리고 타국의 귀족과 권력자들 역시 대거 참석했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자면…….”
레미의 행동을 제대로 막지 못했던 일 때문에 미안하기라도 한 것인지 다이애나가 차분하게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어차피 그녀의 말은 나에게 들리지 않는다.
와아아아아-----!!
내가 타고 있는 비행선을 보며 환호하고 있는 십만… 아니, 그 이상의 인파를 바라본다. 뭐가 그리 신나는 것인지, 마구 소리치는, 혹은 울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세레스티아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점점 더 우울해지기만 한다.
“인생…….”
한숨 쉬거나 말거나,
결혼식이 시작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