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 / 0117 ----------------------------------------------
Chapter 19 결혼식
어느 날 하늘을 보고 한(漢)왕조가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天才)가 넘쳐나던 시기였지만, 그를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자는 천하를 뒤집어도 다섯이 되지 않을 정도.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세속의 관직을 얻더라도 위험이 크고, 재산을 모으더라도 도적이나 군대에게 빼앗길 터이니 현세에서 영예를 구하는 것은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의 재능이라면 전란의 시대에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점성술을 연마해 미래를 대략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그는 그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도교 수행에 쏟았고, 들인 노력에 충분히 어울리는 성과 또한 얻어냈다.
그는 세상의 섭리를 초월했다.
기뻤다. 그는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마주 볼 수 없는 지고한 존재가 되었다. 선경(仙境)에 이르러 완벽한 선인이 된 것.
자유. 완벽한 자유.
그것은 그가 항상 꿈꾸던 것이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 어떤 제약도 없는 완벽한 자유.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왕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지?”
“당신이 소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좌자는 자신을 초대한 위(魏)의 조조(曹操)의 마음을 읽고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 한 단어의 진언(眞言)만으로 그는 물론이고 그의 군대까지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 좌자는 여러 가지 편법으로 조조를 농락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굴욕에 가까운 일.
조조를 비롯한 왕과 권력자들은 알 수 없는 힘을 다루는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 역시 그들을 보며 전혀 유쾌해할 수가 없었다.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가를 힘이 있으면 뭐하는가?
선인인 그는 속세에 그 어떤 간섭도 할 수가 없다.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휘두를 방향성에 제약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왕을 죽일 수 없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수도 없다. 자신의 자손을 만들어 대대로 권세를 누리게 할 수도, 세상을 개변할 수도 없다.
그렇다. 그는 하계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인(仙人)이었으니까.
[자유. 완벽한 자유!]
평생의 꿈이 먼지가 되었다. 그는 힘을 얻었지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힘은 아무 의미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죽을 노력을 다해서, 자신의 목에 영원히 풀 수 없는 목줄을 걸어버린 것이다.
[하하하하하! 우습구나! 정말 우습구나!]
긴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방황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높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제약을 벗어던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궁리했고, 방법을 찾았다.
[육체가 필요하다. 나의 힘을. 영혼을.]
그리고 그리하여.
[신(神)을 담을 수 있는 육체가.]
비틀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
눈을 뜬다. 장소는 호화롭게 꾸며진 어느 침실. 나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이미 죽어 나자빠진 녀석의 과거 같은 건 궁금하지 않다고…….”
몸을 일으킨다. 컨디션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눈앞으로 뭔가가 떠오른다.
우웅--
묘한 공명음.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을 흩뿌리는 반투명한 부적이었다.
“범인은 이 녀석인가.”
그것은 보패(寶貝). 둔갑천령부(遁甲天靈符)였다. 좌자가 긴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보물인데 그가 죽자 나에게 넘어온 것. 원래 보패라는 건 이런 식으로 죽어서 넘어가는 물건이 아니지만 좌자가 시공의 미아가 되며 사라지자 그가 새로운 몸에 넘겨주기 위해 조치를 취해 놓았던 보패만이 빠져나온 것이다.
기계류도 아닌 존재의 기억이 뜬금없이 넘어와서 뭔가 했는데 아무래도 둔갑천령부에 깃들어 있던 좌자의 염(念)이 나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지금의 내가 가진 신위는 기계문명의 신에 더 가깝지만, 정보의 신의 특성 역시 가지고 있으니까.
“자유… 라.”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는 나의 안전과 평온을 위협한 명백한 적. 만일 살려 두었다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알았다면?’
순간 떠오른 가설에 멈칫한다. 언제나 그랬듯 내 목에 걸려 있는 [열쇠]를 보았다.
그것은 모든 봉인과 제약을 [열] 수 있는 신기. 그렇다면.
딸깍.
“아, 선배. 일어났구나.”
“오래도 자는군.”
그때 문이 열리고 보람과 동민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둔갑천령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힘을 좀 써서.”
계속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침대에서 내려온다. 보람이 싱글벙글하며 호들갑을 떤다.
“그냥 일이 좀 있는 정도가 아니죠! 아주 깽판을 제대로 쳤다면서요?”
“초월자들이 다 벌벌 떨었다고 하던데.”
“대마녀의 혈통이란 게 범상치 않을 거라는 거야 예상했지만 대우주에서도 통할 줄은 몰랐어요! 세상에 온갖 초월자가 다 와서 난리라니!”
조잘조잘 떠든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동민이 그런 분위기를 자제시킨다.
“일단 서둘러라. 결혼 준비를 해야 하니.”
“…아차, 결혼!”
약간은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잠깐, 동민아. 결혼식이 언제지?”
“그야 당연히…….”
“바로 지금이죠!”
외침과 함께 벌컥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여인이 쏟아져 들어온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요!!”
“이제야 일어나다니… 아니, 그나마 결혼식 전에 일어나서 다행인가?”
“깨우지 말라고 해서 정말 속이 타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됐으니까 서둘러!”
다이애나를 비롯한 코디네이터들이 덤벼들기라도 하듯 달려든다. 내가 움찔하는 사이 여기저기에서 대여섯 개의 손이 달려들더니 하얀 손가락으로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한다.
“일단 머리를 감겨 드릴 테니 가만히 서 계세요!”
“옷도 갈아입혀야 하니 양팔을 들고 계시구요!”
“메이크업을 해야 하니 앞을 보세요!”
“샘플들을 보여 드릴 테니 소품을 그중에서 골라주세요!”
“으아아, 맙소사! 결혼식이 코앞이에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양동이 하나 정도 되는 물이 허공에서 나타나더니 내 머리를 휘감아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고, 얼굴에 뭔가 촥 하고 뿌려져 피부를 씻어내더니 이것저것 발라진다.
그뿐이 아니라 옷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스스로 색과 모습을 바꾸고, 눈앞으로는 대여섯 개의 액세서리와 구두 등이 날아다닌다.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이내 가만히 거기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한 번 받아봤다고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코앞이라니.”
순간 웃음이 나온다. 물론 나는 세레스티아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우리가 서로 약속했던 건 ‘이런 식’의 결혼이 아니다. 귀족들의 관심에서 최대한 멀어져서 최대한 간결하고 조용하게 진행할 예정이었으니까. 물론 황성에 도착해 그녀의 팬들을 만나면서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 예상한… 그러니까 규모가 ‘좀’ 커진 상황을 가볍게 넘어섰다.
그리고.
일을 그렇게 키운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좋지 않은데…….”
어떤 회사에 신입 사원이 있다. 당찬 포부를 가진, 솜털 보송보송한 막내.
그런데 그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회장의 자리에 올라섰다면 어떨까? 신입 사원 때의 그와 굴지의 대기업을 운영하는 회장인 그를 동일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당연히 동일인이다.’
하지만… 설사 동일인이라 하더라도 그 둘은 너무나 다르다. 솜털 보송보송한 신입 사원과 대기업의 회장은 하는 말투도. 행동 원리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같을 수가 없다. 그 스스로의 위치나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는 그 과정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거야.’
어떤 사람이 일생에 거쳐 겪어야 할 변화를 나는 문을 여는 그 순간 겪는다. 아무리 서는 위치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 해도 이런 변화는 너무 빠르지 않은가? 이건 오히려 술을 먹었을 때의 그것과 같다.
‘신성(神聖)과 신위(神位)에 취한다.’
상급의 신성, 하급의 신위, 그리고 필멸자의 격.
그것이 평소의 나라면.
상급의 신성, 상급의 신위, 그리고 하급의 신격.
이것이 [문]을 열었을 때의 나이다. 격은 여전히 볼품없지만 문을 여는 순간, 그에 합당한 신위(神位)가 나를 떠받치고 거기에 최소한의 신격까지 깃들어 버리면서 ‘나’라는 존재가 신으로 재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고작(?) 대기업 회장이라는 [자리]에 위치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달라진다. 권력을 가진 고위 정치인의 자리라면 더하겠지.
하물며 그게 신의 자리라면?
달라지는 것은 필연이리라.
“하지만…….”
한숨이 새어 나온다.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상황이 절대 가볍지 않다. 당장 대회의장에서도 문을 열어버린 내가 사단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원래의 나라면 그냥 넘어갔을 상황을 모조리 뒤집어서 사건을 어마어마한 크기로 키워 버렸다.
물론 그것도 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온전한 나라고 볼 수는 없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평소 꾹꾹 참고 있던 진심을 다 터뜨린 다음 깨어나 후회하는 것처럼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하.”
순간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 꾹꾹 참고 있던 진심이라.’
세레스티아를 떠올린다. 신위에 의해 떠받쳐지던 나는 일견하는 것만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과거, 현재의 상황, 그리고 그 마음까지.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 판을 뒤엎었다.
“하하하.”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이다. 그건, 그건 절대 평소의 내가 아니다. 철저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내가 완전한 기분파가 되었던 것이다. 한순간의 감정만으로 움직였고, 절대 보답 받을 리 없는 감정을 위해 위협을 무릅썼다.
‘세레스티아.’
다시 그녀를 떠올린다. 그녀의 과거를, 아픔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빛나고 있다.
“제기랄.”
다시금 쓰게 웃는다. 내 진심을 깨닫는다는 게 이렇게나 짜증 나는 일인 줄 미처 몰랐기 때문.
그런데 그런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속이 뒤틀렸던 모양이다.
“…아주 죽을상이군요.”
“레미!”
“하지만 언니! 이것 보세요! 이게… 이게 지금 결혼하는 남자의 표정이에요?”
목소리에 분노와 원망이 서린다. 과거의 나는 그녀의 분노에 영문을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화를 받아주기에는 내 기분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럼 꼭 으하하 하고 웃으며 결혼식장에 나가야 하나? 정말 웃기지도 않는 원망이네.”
세레스티아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녀와 나는 철저한 계약 관계이니까. 애초에 그녀는 나와 헤어지는 것을 전제로 결혼을 약속했으니 내가 알게 된 이 [비밀]을 감안하더라도, 그녀가 나를 속이거나 한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아무리 사랑이 이성과 합리를 가린다 하더라도 이들의 원망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종류이고, 그것은 혼란스러운 지금의 나로서는 감내하기 싫을 정도의 불쾌감을 선사했다.
“그래, 레미. 네 말이 맞아.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
“흐, 흥! 그래요. 애초에 당신과 황녀님은.”
“하긴 그녀가 세상 그 어떤 남자를 사랑하겠어. 안 그래?”
“……!”
순간 주변 공기가 돌처럼 굳어버린다. 내 말에 섞인 뉘앙스를 읽어낸 다이애나와 레미를 비롯한 모든 코디네이터가 극도로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기… 그게 무슨 말이야, 선배?”
분위기가 분위기였던 만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보람이 의문을 표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무슨 말일까.”
피식 웃었지만, 사실은 약간 후회하고 있다.
‘평소라면 참았을 텐데.’
아무래도… 문을 연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