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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왕관을 위하여
“관대하다.”
그들은 저 아래 까마득한 곳에 있다. 그들이 나를 보기 위해서는,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만나서 반갑다.”
시끄럽던 대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은은하게 흩뿌려지는 빛은 원래부터 밝은 대회의장에서도 그 존재감을 선명하게 발한다.
“맙소사.”
“이게 무슨…….”
나와 눈을 마주친 모든 귀족이 부르르 몸을 떤다. 가까이 있던 아몬 공작이 주춤주춤 물러서고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보좌관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조금 전의 여유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는 상황.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귀족의 숫자는 총 1,132명. 지금 내 옆에 있는 아몬과 같은 공작위를 가진 녀석이 2명 더 있고 하나의 행성을 대표하는 후작이 25명, 국가를 대표하는 백작이 대략 300여 명 자리하고 있다. 나머지는 자작이나 남작들 중에서 나름대로 힘 있는 녀석들로 채워져 있는 상태.
‘어디 보자.’
나는 먼저 나에게 멸시의 시선을 보냈던 상대를 바라보았다. 지구의 시점에서 미래시대나 다름없는 상위 문명을 가진 레온하르트 제국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굉장히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다.
“크윽…….”
눈을 마주치자 신음하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내 시선을 견디려는 듯 한껏 기세를 끌어 올리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그의 기세는 한껏 달궈진 프라이팬에 던져진 버터처럼 가볍게 녹아버리고, 이내 내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레온하르트 제국에 대한 내 이미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은 편이었지.”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떠는 그의 시선에 공포가 어릴 때 즈음 시선을 돌렸다. 그가 털썩 주저앉는 모습이 언뜻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대회의실에 와서 느낀 감정은 불쾌함뿐이군.”
내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의 귀족이 움츠러들고, 주저앉고, 신음을 터뜨렸다. 그들 전부가 나라는 개인에게 위압당해 흔들리고 있다. 다만 아까의 사내가 그러하듯, 모든 이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굴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내 시선을 마주 본 이는 내가 단상에 올라섰을 때 의문과 호기심으로 나를 보았던 여인이다. 1미터 80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높게 땋아 올린 까만 머리칼을 비녀로 고정한 고풍스러운 인상의 미녀.
그녀 역시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 표정을 굳혔지만, 아까의 사내와는 반응이 사뭇 다르다. 그녀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살짝 자세를 낮춰 예를 표했다. 내가 뿜어내는 영력에 반발심이나 적대감보다는 존경심을 느꼈다는 뜻.
그녀의 존재로 인해 그들 전부가 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영력을 갈무리한다.
“…2일 뒤 나와 셀은 부부가 된다.”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주 아이돌인 세레스티아의 결혼은 큰 사건이었지만, 그래 봐야 가십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황제의 죽음이 그 사건을 덮었기 때문.
하지만 그들은 이제 모두 알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그녀를 깔보거나 능멸하려는 존재가 있다면…….”
타오른다. 빛이, 거대한 힘이. 헤아릴 수 없는 영력과 강대한 신성이 타올라 사방을 비추었다.
“그 책임을 제국에 묻겠다.”
그들을 내려다본다. 그들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존재이든 강대한 능력자든 상관없다. 초월지경에 다다른 세 명의 공작조차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우웅…….
초월적인 영력이 물결처럼 퍼져 나간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다. 그들은 눈을 감아도 정신을 잃어도 나의 존재를 선명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만… 그만하시오. 아니, 그만해 주시기를 간청하겠습니다.”
지치고 지친 목소리로 아몬 공작이 말한다. 어차피 할 이야기는 다 한 상태였기에 몸을 돌려 단상에서 내려온다.
“대하, 너…….”
“잠시 후에.”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세레스티아의 입을 다물게 하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여기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어어 하며 끌려간다.
당연하지만 왔던 길로 나가지는 않는다. 뒤쪽으로 VIP들이 따로 다니는 길이 있었다.
“자, 잠깐!”
그리고 그 길에는 두 명의 초월자가 있었다. 대회의실에 있던 3명의 공작 중 아몬 공작을 제외한 두 명, 그리고 그중 맨 처음 나와 시선을 마주쳤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이를 악물며 따졌다.
“여, 영압… 영압을 뿜어내는 것은 연합법에 어긋난다.”
영압(靈壓).
그것은 고위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에게 가하는 영적인 압력이다. 영혼 그 자체의 힘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으로, 상대와 압도적인 차이가 존재해야만 할 수 있는 행위.
사실 그의 말대로 이건 옳은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도 연합법에서는 초월자들이 하위 능력자들 앞에서 영력을 개방하는 걸 정신지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범법 행위로 인식하니까.
‘말하자면 영적인 폭력(暴力)이지.’
초월자의 영압은 그 자체만으로도 필멸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준다. 굳이 초월자가 뭘 하지 않더라도 그가 스스로의 기운을 갈무리하지 않으면, 하위의 존재들은 초월자를 계속 마주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그에게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나 압도적인 [효과]를 보이려면 영혼의 격이 초월자와 일반인 수준으로 벌어져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내용만큼은 틀림없이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이니 이 녀석이 이렇게 따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나는 별상관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서?”
“뭐, 뭐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설마 연합에 달려가서 이르겠다고?”
연합법에 어긋난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연합법에서 초월자의 영력 개방을 범죄로 인식하는 건 사실이지만,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경범죄(輕犯罪)이다. 영력을 개방하는, 단지 그뿐인 행위가 엄청난 범죄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당연한 말이지만 그걸 연합에 신고한다고 해서 연합에서 무슨 조치를 취해줄 리가 없다. 연합은 대우주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인 동맹이지 우주를 통합하며 치안을 유지하는 정부의 개념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하면 오히려 내정 간섭이지.’
연합법은 꽤나 세세하게 정해져 있지만 그건 일종의 가이드라인일 뿐 연합이 그 모든 것을 관리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건 연합이라는 거대 세력 자체에 위협이 되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한하니까.
솔직히 연합법으로 치면 초월자가 필멸자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것도 안 되고 사사로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삼가야 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온하르트 제국과 테케아 연방이 사사건건 전쟁을 벌이는 것 역시 원칙적으로는 연합법에 위배된다. 둘 다 연합 소속이지 않던가?
“그, 그건…….”
“까불지 마라.”
가볍게 한 걸음 내딛자 그가 깜짝 놀라 물러선다. 그는 강대한 전투 능력을 가진 무투계열의 초월자였지만, 그가 긴 시간 누려온 권력과 평온한 생활은 그의 전투 본능을 녹슬게 만들었다. 단순 스펙으로만 보면 제법 강한 녀석이지만, 아마 실제로 싸우면 천현일 소장조차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벌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
갈색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흔들린다.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군.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4황녀께서 이런 남편감을 데려올 줄이야.”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 쉴레이만 오스만은 지금 이 순간부터 별빛 진영의 승리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하오.”
거기까지 말하고 휙 몸을 돌려 대회의실 쪽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며 보고 있던 흑발의 여인이 나를 보며 웃는다.
“소개를 안 했군요. 일음(日陰) 정가(在家)를 이끌고 있는 정유리라고 합니다.”
여자치고는, 아니, 어지간한 남자보다도 더 큰 180센티라는 키에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어 나를 내려다볼 만한 신장의 그녀는 내 앞에서 자세를 낮춰 정중히 예를 취하고 있다. 강대한 힘을 몸 안에 품은 초월자이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과 분위기.
그러나 그 분위기는 세레스티아의 한마디로 깨져 나간다.
“큰 할머니.”
“어, 어머! 호호! 호호호호!!! 자, 잠깐만요!”
다급히 세레스티아의 팔을 잡고 후다닥 한쪽으로 물러나더니 옥신각신한다. ‘너 진짜 이럴 거니?’라든가 ‘뭘요 제 편도 안 들어 줘놓고’라든가 ‘내가 로스랑 상황이 같니! 친분 하나에 가문을 다 걸라니 무리한 이야기를!’ 등등의 이야기가 오간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돌아와 단아한 분위기를 취한다.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지만, 그냥 넘어가 주었다.
“아까도 소개했었지만 관대하다.”
“정말 반가워요. 솔직히 이런 상황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레스티아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2일 후 결혼식이라고 하셨지요?”
“그래.”
“그렇다면 별빛 진영에 속하게 되는 기념으로 저희 정가에서 결혼식을 준비해 드리겠어요. 가장 화려하고 가장 빛나는 결혼식을 약속해 드리지요.”
“그럼 고맙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공손히 예를 표하더니 대회의실 쪽으로 사라진다.
“…대하.”
그리고 그렇게 모두들 사라져 버리자, 세레스티아가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급작스러운 사태가 별로 기쁜 것 같지 않다. 하긴, 그녀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응, 셀.”
“너, 대하가 맞긴 한 거야?”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긴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저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맞아.”
“맞아, 라고 해봐야…….”
여전히 의혹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게 쳐다봐 봤자 어쩔 수 없다. 내가 나인 걸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다만.
“슬슬 시간이다.”
“…뭐가?”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릴 시간.”
신데렐라는 항상 신데렐라다. 마법의 힘에 의해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 탄 신데렐라가 누더기 옷을 입은 신데렐라와 아무리 다르게 보인다 해도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딸깍.
문이 닫힌 후의 나는 내가 불과 5초 전에 한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하…….”
신음한다. 기억은 완전히 멀쩡하다. [내]가 한 짓들은 물론이고 그때의 내 심리 상태라든가 읽어낸 정보 중 상당 부분이 나에게 남아있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이중인격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나]였다. 다만 문제는, 그때의 내가 완전 미친놈이라는 사실이다.
“저, 저기… 대하야?”
난데없이 바뀐 분위기에 당황한 듯 세레스티아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기에 답할 기분이 아니다.
“이런.”
그저 신음한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런 미친…….”
그리고 그대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