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머리 위에-100화 (100/249)

0100 / 0117 ----------------------------------------------

Chapter 18 왕관을 위하여

“아까 했던 말 기억하지?”

“…물론이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명색이 귀족이라는 녀석들이 너무 졸렬하게 자극해서 황당했던 거지 그걸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자기애가 강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찝찝한 것은.

‘나야 그렇다 쳐도… 세레스티아까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무시한다고?’

레온하르트 제국은 엄연한 신분제 국가이고 당연히 황족은 귀족보다 더 위에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던 나는 익숙하지 못한 문화이지만, 그것이 바로 이곳의 [질서]인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걸 어그러뜨리고 있다는 건 그건 그걸 감수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순간 떠오른 생각에 눈살을 찌푸린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뜻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진행되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만약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최악의 타이밍에 황성에 들른 것이다. 재수 없으면 고래 싸움에 끼어든 새우처럼 등이 터져 버릴 수 있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세레스티아의 판단과 다를 게 없군. 지금 건수를 잡혀서는 안 돼. 잘못하면 괜히 적만 늘어난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칭호를 확인한다.

[아몬 공작가]

[어글러 파르테르]

[아몬 공작가]

[어글러 세타라]

“큭큭. 어글러가 뭐야, 어글러가.”

“대하야?”

실소하는 내 모습에 세레스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괜한 도발에 발끈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순순히 들어주기도 짜증난다.

‘내가 이런 성격이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시하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아몬 공작가랑은 정말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구나. 지구에서도 살육병기인가 하는 녀석들을 보내서 암살하려고 하더니 여기서는 이런 수작이라니.”

나직한 목소리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왜 아몬 공작가라는 겁니까? 저희는 세나 백작가의….”

“당신들 이야기 한 거 아닙니다만. 그리고 그것보다.”

녀석들의 말을 끊고 피식 하고 웃는다.

“우리 대화 중이었습니까?”

“…….”

가볍게 무안을 주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뒤로 물러선다. 뭔가 따지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내 옆에 있는 로스타와 세레스티아는 정통 황족이다. 비난도 대놓고 못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방식으로 하던 녀석들이 이제 와서 말을 걸 수는 없다.

그런데 놀란 건 그들뿐이 아니었는지 여태 가만히 있던 로스타 역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살육병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뭔가 알고 있는 듯 심각한 물음이었지만 어깨를 으쓱일 뿐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도 세레스티아하고 친한 척은 다 한 주제에 그녀가 비난받는 걸 막아주지 않았다. 은근히 밉상이다.

“말해줘, 대하야. 몇 없는 아군이야.”

“몇 없는 아군치고는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아이잉~ 그러지 말구.”

세레스티아가 드물게도 애교를 부리며 내 목 즈음에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 그러자 뒤에서 ‘어헉!’, ‘으악!’ 등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로스타마저 놀라서 그녀를 돌아본다.

“세, 셀? 지금 너 뭐하는 거니?”

“뭐하긴요. 남편한테 하는 깜찍한 애교~♡”

당당하게 웃으며 하트를 뿅~ 하고 쏜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뭐라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그걸 바라보는 로스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다.

‘뭐야, 답지 않은 짓이라고는 하지만 세레스티아가 애교 좀 떠는 게 이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인가?’

어이가 없어서 묻는다.

“너 평소 이미지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반응이 이래?”

“어떻게 했긴, 고고한 여왕처럼 했지.”

“그런 것치고는 대하는 태도들이 마음에 안 드는데 말이지.”

“흥. 그거야 내 노력이나 인생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 관심 없어. 뭐 어쨌든 그만 이동하자. 앞장서, 삼촌.”

“그, 그러지.”

다시 이동하는 두 황족을 따라 대회의실 중앙부에 위치한 좌석으로 이동한다. 대회의실의 구조는 극장과도 비슷했는데 다만 그 크기가 훨씬 크고 좌석이 여섯 자리씩 나뉘어 있다. 좌석끼리 어깨 높이의 격벽으로 분리되어 있는데다 그 안에 테이블까지 설치되어 있어 최소한의 개인 공간을 보장하는 구조다.

“그나저나 다시 묻고 싶군. 살육병기라는 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죠. 지구에 쉬러 왔던 세레스티아를 습격했던 녀석들이 있었거든요.”

난 지구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살육병기]라는 칭호, 그리고 [황녀를 죽이러 온]이라는 칭호.

그때는 아몬 공작가라는 게 어디인지를 몰라서 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그 단체를 다시 보니 대충 감이 온다.

“셀, 또 공격당했던 거냐?”

“뭐 그렇지. 그래서 성계신이 지정한 성지(聖地)였던 대하 집에 들르게 되었고… 거기서 바로 알바트로스함으로 가게 됐어. 성계신이 직접 날려줬거든.”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지만… 이야기가 비어 있군. 그렇다면 대체 어떤 근거로 그 습격자들이 아몬 공작가 소속인 걸 안 거지? 그리 쉽게 단서를 흘릴 녀석들이 아닐 텐데.”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어느 정도나마 신뢰하는 건 세레스티아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이 아저씨가 아니었다.

“그건.”

“그건?”

“비밀입니다.”

“…….”

내 상쾌한 발언에 로스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봐, 너 뭔가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나 본데…….”

약간은 으르렁거린다는 느낌으로 나를 바라본다. 악의(惡意)는 없다. 아마도 기선을 제압하고 싶은 모양.

그러나 그때 세레스티아가 끼어들었다.

“말 들어, 삼촌. 비밀이라잖아.”

“아니, 지금 이게 비밀이라고 쓱 넘어갈 문제야? 지금 상황이.”

“삼촌.”

세레스티아의 시선이 서늘해진다.

“두 번 말하게 할 거야?”

“…….”

쌀쌀맞은 목소리에 로스타의 눈초리가 축 처진다. 제법 중후하던 인상이 싹 사라지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이 되었지만 세레스티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해.”

“으, 으으…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어…….”

“누가 딸이야, 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그때였다.

“집정관(Consul)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것 같은 또렷한 목소리와 함께 웅성웅성하던 대회의실이 단숨에 침묵에 잠겨든다. 고개를 돌려 정면에 위치한 단상을 바라보자 그 중앙으로 걸어 올라가는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어쩐 일인지 세레스티아와 로스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런…….”

“맙소사. 당했군.”

당혹스러운 그들의 표정에 나 역시 단상에 내려선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180… 아니, 190은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를 가진 그는 도저히 노인의 것으로 보기 힘든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을 가지고 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패도적인 기세는 주변 모든 것을 짓누르는 수준.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아이고.”

설명이 필요 없었다. 칭호를 보는 순간 나 역시 절로 신음이 나왔다.

거기에는 나로서도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몬 공작가]

[신검의 주인 아몬]

불과 몇 분 전에 입에 담았던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세레스티아를 공격했던, 말하자면 [적]이나 다름없는 이름이.

더불어 거슬리는 것은 초월자로 보이는 그가 능력 관련 칭호가 아니라 다른 칭호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뭔가 강력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삼촌. 삼촌도 원로원 소속 아니었어요?”

“그렇긴 하다만… 완전히 배제되었군. 원로원 멤버 중 절반 이상을 모아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모양이야.”

속삭이는 둘의 대화에 끼어든다.

“그러니까 원래 집정관이라는 직위를 가진 게 저 노인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집정관은 대대로 순혈의 황족만이 맡을 수 있었어. 물론 아몬 역시 황족의 피를 이은 건 사실이지만… 아니, 그보다 마켈란 형님은 어쩐 거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내면서도 일어나 따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있는 분 중 본인을 아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야기로만 들어본 사람도 있겠구려. 만나서 반갑소. 페일 아몬이요.]

또렷한 목소리에 대회의실을 짓누르듯 퍼져 나갔다. 목소리 자체에 담긴 힘이 상당해서 그 넓은 대회의장이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전 집정관이셨던 마켈란님께서 불의의 습격으로 사고를 입어 원로원 투표 끝에 잠시 집정관 역할을 맞게 되었소.]

“불의의 습격이라니! 설마 황제 폐하뿐만 아니라 집정관님도 당하셨단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흉수는 밝혀진 겁니까? 이번에도 황족 간의 골육상쟁은 아니겠지요?”

“영자 폭탄이 터졌다고 들었습니다! 조사 결과는 어떤가요?”

여기저기에서 질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조용하던 대회의실이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진다. 그야말로 난잡한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걸 보고 있는 아몬이 만족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느낌이 안 좋은데.”

“확실히……. 삼촌, 페인 공작가 놈들은 어디에 있어? 황태자를 비롯한 언니 오빠들은?”

“없다. 이것들, 애초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은데?”

“…설마.”

“그래. 힘겨루기다. 귀족파가 황제파와 본격적인 대립을 시작한 거야.”

“하지만.”

“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황제가 죽은 이 상황에서 무슨 자신감으로 원로원까지 장악한 귀족파와 싸우려는 거지? 명분도 없는데?”

세레스티아는 원로원의 소집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황제가 피살된 상황에서 그들의 소집을 무시하면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고, 어쩌면 결혼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군.’

원로원의 소집을 황제파에 속해 있는 귀족과 대부분의 황족이 불응했다. 일종의 보이콧을 해버린 것.

그런데 그런 회의장에 황족인 세레스티아와 로스타가 들어왔다.

“당했어. 이렇게 완벽하게 따돌림 당하다니……. 미안해. 설마 삼촌까지 휩쓸려 버릴 줄은 몰랐어.”

“새삼스럽게 사과 같은 거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군. 내가 그렇게나 만만해 보였나?”

로스타의 눈이 서늘해진다. 전투기술부의 장관이자 초월자인 그는 레온하르트 제국의 실세 중의 하나인 그를 황제파가 너무나 쉽게 방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삼촌.”

“그래. 일단 나가야 해. 내가 정치질을 너무 안 하긴 했군. 당장 담당 부서를 마련해야겠어.”

벅벅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킨다. 다행히도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운 상태였기에 조용히 빠져나간다면 별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물론 회의 중간에 나가는 걸 통제하는 이들이 있을 테지만 초월자인 로스타는 어지간한 방해로 막을 수 없는 존재이니까.

그런데 그때.

[우리 레온하르트 제국의 자랑인 별빛의 여왕께서도 자리를 빛내주고 계시구려. 황제 폐하께서 가장 마지막 만났다고 들었는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오.]

단상에 있던 아몬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야말로 전조조차 없던. 기습이나 다름없는 공격이었다.

“…젠장.”

의자에서 일어났던 로스타가 나직이 신음하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대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려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