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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왕관을 위하여
레온하르트 제국의 원형, 지구연방(地球聯邦)은 초대 황제의 초월적인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성립조차 되기 힘든 단체였다. 일종의 시공결계 안에서 문명을 발전시켜 막 우주로 나오게 된 지구인들에게 ‘자신들과 비슷한 다른 지구’라는 것은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만났다면 그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벌어졌을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일 정도.
그러나… 우주로 내던져진 그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우주전쟁] 혹은 [대전쟁]이라 불리는 전란의 파도 앞에 47개의 지구 전부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힘을 합하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가 멸망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만큼 그들은 신적인 힘을 가진 초대 황제의 아래에서 거대한 세력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레온하르트 제국은 그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 ‘있었’다.
“이제는 아니란 말이야?”
“응. 초대께서 잠드시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지.”
레온하르트 황제는 종전 후 약 30년간 제국을 통치하였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었다. 전쟁 중 그의 적이었던 상위신들에게 받은 저주를 끝끝내 치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저주의 힘에 의해 끝없는 잠에 빠지게 되자 그와 함께하던 황금사자신마저도 제국을 떠나게 되었다. 초월적인 힘과 인망, 그리고 명성으로 47개의 지구를 이끌던 존재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황족들은? 초대 황제가 낳은 자식이 셋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봤자 초대에 한참 못 미치지.”
레온하르트 황실의 통제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중급 초월자였던 레온하르트 황제와 상급 초월자, 그러니까 언터쳐블인 황금사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황족들은 빼어난 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47개의 행성과 수천 개의 국가를 모두 통솔하기에는 모자랐다. 레온하르트 황제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수많은 유력자가 점차 자신들의 탐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오직 황족만이 존재했던 레온하르트 제국에 귀족(貴族)들이 생겼다.
각 지구의 최고위 지도자들, 그러니까 전쟁 시 자신의 행성을 이끌던 대통령들을 비롯한 정치가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던 기업인, 혹은 거대 재벌 등이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레온하르트 황실이 전혀 원하지 않는 흐름이었지만, 지도력도 무력도 부족하던 제 3대 황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자신의 형이었던 2대 황제가 스스로를 귀족이라 부르는 존재들에게 암살당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후 귀족들의 힘은 점점 커져만 갔다. 혼인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황족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지만, 그들은 황족의 후예인 동시에 귀족가의 후예이기도 했다. 황족들이 높은 확률로 귀족 가문의, 혹은 그들이 주선한 상대를 반려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물론 역대 황제들도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어. 선계의 강자 청원과 계약하여 혈통을 관리하도록 만들고 상당수의 귀족을 포섭하여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었지.”
“즉 귀족들 사이에 파벌이 생겼다는 거야?”
“말하자면 그렇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귀족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있다고 할 수 있어.”
대회의실로 이동하며 세레스티아의 설명을 듣는다. 나는 레온하르트 제국이 건국 때부터 황족-귀족-평민의 구분이 있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귀족은 중간에 새로 생겼던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황제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가 조사하는 거야?”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당연히 검찰과 경찰들이 나서겠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원로원이 움직일 거야. 현재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가 가능한 건 오직 그들뿐이니까.”
쭉 뻗은 복도를 도보로 이동한다. 비록 주변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가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세레스티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 상황이다.
“오, 4황녀께서 오셨군.”
그리고 그때 우리 옆쪽으로 지나가던 한 무리의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회의실에는 경호원을 데리고 올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저들 전부가 한가락 하는 귀족들일 것이다.
“잠깐 설마 옆에 따라 가는 사람이?”
“허허, 말은 들었지만 설마설마하니…….”
“정말 결혼하는 거요? 진짜로?”
불신에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지나친다. 세레스티아 녀석이 팬들을 엄청나게 모아놓고 일을 저질러 준 덕택에 꽤나 화제인 모양이다.
“시선이 따가운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가진 권한은 개뿔 없어도 황족 중에 제일 유명한 건 나니까.”
“잘났다, 이것아.”
투덜거리며 계속 걷는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세레스티아는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전부 무시해.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아무리 도발하고 깔본다 해도?”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건 정말 미안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상 어쩔 수 없어. 다행히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 결혼을 허락한다는 공문이 내려온 덕에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떻게든 이 회의실 안에서 꼬투리를 잡으려 들 거야.”
그녀의 말에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면 암살자를 보내거나 대놓고 덤비거나 할 수도 있지 않아?”
“그럴 수는 없어. 황제가 시해당한 이 비상시국에 불법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건 정치적으로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게 되거든. 이 자리를 마련한 원로원의 분노에도 맞닥뜨려야 할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가지 말하고 문득 피식, 하고 웃는 세레스티아의 모습에 의아해한다.
“무엇보다?”
“저 밖에 내 팬을 자처하는 노블레스가 와 있잖아? 돈과 권력으로 자칭하는 가짜 말고 전 우주에서도 인정받는 진짜 귀족이.”
“아하.”
잠시 잊고 있던 그림자용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황성 밖에는 여전히 그녀의 [기사단]이 버티고 있다. 레온하르트 제국 입장에서야 외세에 불과하기 때문에 황성 안에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녀가 험한 꼴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뭐, 솔직히 무력으로 치면 어림도 없어. 어둑서니가 노블레스라고 해도 레온하르트 제국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둑서니랑 1:1로 싸워도 이길 강자가 2명은 존재하는 데다 숫자에서는 상대도 안 되고.”
“하지만 문제가 힘만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명분 없이 건드릴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배경이 문제라 이거군.”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모습에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셀, 녀석들을 끌어들이는 건 안 돼?”
“녀석들?”
“네 팬들 말이야. 어둑서니뿐만 아니라 나머지 팬들까지 모두. 사실 그들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세력 아냐?”
말이 좋아 팬클럽이지 단순한 빠돌이 집단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연히 노블레스인 어둑서니이지만, 나머지 역시 먼 우주에서 온 이들로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출신이나 재력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아무리 대우주라 하더라도 항성 간 이동이나 은하 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우주선이 자가용처럼 흔할 리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녀석들이 골든 로즈에 내려와 있었다는 게 그 증거지.’
세레스티아가 힘을 가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황족과 귀족들이 상당한데도 그들이 착륙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면면이 절대 예사롭지 않다는 뜻. 그리고 그런 그들이 뒤를 받쳐 준다면 세력이 없는 세레스티아라도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제법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뜻밖에도 세레스티아는 푹, 하고 한숨 쉬었다.
“이 바보야. 팬들은 내 부하가 아냐. 고용인도 아니지. 아무리 대단한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을 잊으면 안 돼.”
“본질?”
의문을 표하자 또각또각 걷고 있던 세레스티아가 우뚝 멈춘다. 나 역시 따라 멈추자, 그녀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본질.”
“…….”
“또한 그들이 나와 완전한 남이라는 본질.”
또렷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때 반대편에서 금발의 중년 남성이 다가온다.
“셀.”
“삼촌.”
세레스티아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폭 하고 안긴다. 그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세레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뭐야, 친아빠보다도 친해 보이는군.’
앙겔로스 3세와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신기해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이 녀석이냐?”
“응. 내 남편인 관대하야.”
“남편이라…….”
말끝을 흐리며 내 전신을 샅샅이 살피는 그의 모습은 제법 날카로웠지만 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생각해 오던 온갖 상황에 비하면 훨씬 양호한 반응이다.
“셀, 소개 좀 해줄래?”
“응응. 우리 삼촌이야. 내 마법 스승님이기도 하지.”
“삼촌이라.”
일반적으로 삼촌이라 하면 아버지의 형제 중 결혼하지 않은 대상을 부르는 호칭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로 부르는 게 보통이니 아마도 그는 미혼이라는 뜻이겠지.
‘결혼도 강제라고 들었는데… 설마 초월지경에 들어서 벗어난 건 아니겠지?’
떠오르는 가정에 헛웃음 지으며 인사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관대하입니다.”
“로스타 레온하르트다.”
그렇게 자기를 소개하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그 시선에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점.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칭호를 확인했다.
[전투기술부]
[부여 초월자 로스타]
‘부여라니. 제작 쪽 능력을 말하는 건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질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전투 관련으로 완성된 능력자가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장관직을 맡고 있다는 전투기술부의 업무가 대전쟁과 기가스 관리라고 했었으니 의외로 기술자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분위기는 어때요?”
“그건… 아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이런 데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휙, 하고 몸을 돌리는 로스타의 뒤를 따라 걷는다.
황실에 중요한 안건이 생길 때마다 개방된다는 대회의실은 기본적으로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곳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무슨 미궁에 들어온 기분이라 입구에 줄이라도 매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세레스티아도 로스타도 꽤 익숙한 듯 거침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고 있다.
“우글우글하네. 제국의 모든 귀족이 다 모인 것 같아.”
“그만큼 큰일이니까. 긴급 소집이 열려서 자작 이상의 모든 귀족이 소집되었어. 지금 이 안에 모인 귀족만 천 명이 넘을 거다.”
레온하르트 제국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로스타가 같이 걷기 시작하자 다른 일행들이 너도나도 예를 표한다. 잠깐 사이에 한 100명 정도는 지나친 것 같은데 별로 기억에 남는 이는 없는 상황.
그런데 그때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일행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녀석이 설마 그겁니까?”
“허허, 저렇게 안 어울리는 커플은 처음 보는군. 봉황과 펭귄이 나란히 선 꼴이야.”
“도대체 별빛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남자를 데려온 걸까요?”
“그렇게 비싼 척 고귀한 척하더니 기껏 데려온 남자가 저런 천것이라니.”
“역시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수근수근 속닥속닥. 자기들끼리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대화하는 모습에 헛웃음을 짓는다.
어이가 없다. 왜냐하면 저 귀족이라는 녀석들이 나한테도 빤히 들리도록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나는 극히 일반적인 인간에 가까운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보통 사람보다 귀가 밝다거나 하는 특수능력 따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즉, 나에게 들린다면 누구에게나 들린다. 하물며 여기 있는 귀족 중 태반이 고위 능력자가 아니던가?
“참아.”
그리고 그런 내 손을 세레스티아의 손이 잡는다.
“아까 했던 말 기억하지?”
“…물론이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명색이 귀족이라는 녀석들이 너무 졸렬하게 자극해서 황당했던 거지 그걸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자기애가 강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찝찝한 것은.
‘나야 그렇다 쳐도… 세레스티아까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무시한다고?’